2021. 6. 1. 20:27ㆍ번역/비문학
1895년, 블랙 아메리카
글쓴이ㆍ도로시 베리(Dorothy Berry)
번역ㆍ오성진
뉴욕, 브루클린 공원, 1895년, 뜨거운 여름. 그 곳 목화밭에서는 오백 명에 달하는 흑인 노동자들이 과거 노예들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도로시 베리(Dorothy Berry)는 이번 에세이를 통해 ‘블랙 아메리카(Black America)’ 가 미국 흑인 역사의 괴상하고 복잡한 단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종차별적인 사회에서 개개인의 표현의 자유이란 과연 어디까지 인정되어야 할 지, 그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원문 게시일ㆍ2021년 2월 24일
1895년 6월 29일 발행된 일러스트레이티드 아메리칸(Illustrated American)에 실린 전시회, ‘블랙 아메리카(Black America)’ 출연자들의 사진— 사진 출처
수많은 에이커(Acre, *역주: 1에이커당 약 1224평이라고 한다) 넓이의 목화밭 위의 백 개가 넘는 통나무 집에는 대략 오백 명 정도의 흑인 노동자들이 살고 있었다. 줄기에서 뽑아낸 솜은 모두 분주하게 돌고 있는 조면기(*2: 목화의 씨를 빼거나 솜을 트는 기계)로 옮겨졌다. 현관에선 잔집안일을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렸으며 그들의 감시하에 뛰노는 아이들도 간간이 보였다. 동네 목사님은 종교를 져버렸다가 다시 그에게 돌아와 회개하는 자를 부둥켜 안고 있었고 그나마도 없는 쉬는 시간에 일꾼들은 노래를 부르며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1845년,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목장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위와 같은 장면은 1895년 뉴욕의 한 전시에서 과거의 모습 고대로 재현되었다. '블랙 아메리카(Black America)'는 3번 애비뉴와 -- 당시엔 앰브로즈 공원(Ambrose Park)이라고 불렸던 -- 37번가 사이에서 열린 노예제도 코스플레이와 민족지학적(ethnography) 전시, 그리고 흑인들의 퍼포먼스를 포함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던 일종의 쇼였다. 한 번 티켓을 구매하면 하루종일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는데, 25센트(공연장의 박스석은 1달러)만 지불하면, 관람객들은 이전과 달라진 앰브로즈 공원에 들어갈 수 있었고 공원을 유지하기 위해 전시회 제작자들은 13,000달러(오늘날 돈으로는 40만 달러에 가까운 돈)를 매주 지불해야만 했다. 공연 내용은 매주 바뀌곤 했는데,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관람객들은 공연장 바깥에서 민스트럴 공연(Minstrel show, *3: 흑인으로 분장하고 흑인 가곡 등을 부르는 백인들의 인종차별적인 공연)에서 나올법한 노래들을 들으며 새로이 재현된 과거의 목화밭을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시장 분위기를 차용해 백 개 이상의 오두막으로 지어진 마을은, 노예 연기를 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주해온 총 500명의 흑인 연기자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비평가들은 남부 사람들의 현실적인 연기에 집중했다. 당시 제작과정에서 섭외를 맡았던 루 파커(Lou Parker)는 “알맞은 재능을 지닌 사람을 섭외하기 위해 겨울동안 남부를 돌아다니면서 열 명에게 제안을 하면 아홉 명에게 거절당했다”고 당시 상황을 말했다. 이 와중에 그의 제안에 응해준 흑인 연기자들은 '역사적 사실주의(historical realism)'를 보여주기 위해 참가했다고 밝혔는데 사실적인 현장 분위기를 위해 몇 주 동안 지속된 전시기간 동안 오두막에 살아야만 했던 그들은 ‘사바나에서 온 순례자들(Pilgrims from Savannah)’, ‘4명의 아틀란타 소녀들(Four Little Atlanta Girls)’, ‘필라델피아의 여덟번째 구 모임(The Eighth Ward Club of Philadelphia)’, 그리고 ‘탈 힐러들의 고향(Tal Heelers)’에서의 흑인들 처럼 그들의 신분을 기록한 플래카드를 제작해 오두막 근처에 게시하기도 했다.
블랙 아메리카의 포스터, 밑쪽에 있는 초상화들은 쇼의 한 부분인 “역사 속 초상화들(Historic Portraits)”에 전시된 그림중 일부이다. 사진 출처
오두막 뒤에는 과거 현장을 모방해서 만든 목화밭이 있었으며 이 밭에 있는 솜은 전부 실제 목화 줄기에서 따와서 실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채 조면기에 연결되어 있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과거, 노예들에게 땡볕의 목화밭에서 솜을 따도록 강제했던 마음복잡한 광경을 제대로 재현해내기 위해 '블랙 아메리카'의 제작진이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는 실제 농장주인 관람객 중 몇몇은 가짜 목화밭을 돌아다니며 이 정도 규모의 세트장이라면 실제 목화솜을 따는 것보다 현장에 즐비한 가짜 목화솜을 따는게 훨씬 더 많은 돈이 될 것이라 상상할 정도였다. 이렇듯, 과거를 재현해내기 위해 구상한 모의 목화밭 세트장은 흑인을 바라보는 당시 북부 지방의 백인들의 인식에 위험할 정도의 부조화를 일어나게 했다. 뉴욕에서 게시한 ‘블랙아메리카’는 과거 힘든 시기를 지나 드디어 흑인들이 천천히 현대생활에 적응하고 있다는 (철저히 백인들의 편견이 박힌) 입장을 지니고 있던 북부 사람들에게 혼란을 줬다. 세트장 위에서의 편안함과 휴식을 즐기고 있는 노예연기자들의 모습은 노예제가 성행했을 당시의 비인간적인 면모는 찾아보기 힘들도록 만들곤 했기 때문이다.
500명의 노동자들이 일을 하던 이 세트장에는 채찍도, 감시자도 없었으며 아이를 엄마의 품에서 떼어내서 팔아 해치우는 일도, 또는 아내의 품에서 남편을 억지로 분리시키는 일도 없었다. 세트장 위에 흑인 연기자들은 모두 “남자들은 하얀색 밀짚모자를, 여자들에겐 붉은 반다나를” 쓰는 형식으로 깔끔하게 통일된 유니폼을 갖추고 있었다. 평론가들은 세트장의 “진실성을" 치켜세우며 이렇게 적었다:
니그로(Negro, *4: (원래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가 남부지역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그대로 볼 수 있었으며 실제로도 전시장에는 남부의 니그로들로만 배치되었다고 한다. '블랙 아메리카'에는 그 어떤 쓸데없는 풍자도 없었으며 남부 니그로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입에서 입으로만 구전되어오던 미국내 흑인들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실제로 흑인들을 목화밭 현장에 배치시켜놓은 전시장의 세팅은 각자 지니고 있는 인종차별을 숨겨오던 일부 학식 높은 북부 백인들에게 실로 크나큰 “배움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이는 시카고에서 주최한 1893년 만국 박람회(World’s Columbian Exposition)의 실제같은 다호미안(Dahomean) 마을을 꾸며 “민족지학적인 장면"을 연출했을 때의 효과와 같았다고 보는 입장도 있었지만, 이와 반대로 W. E. B. 뒤부아(W. E. B. Du Bois)는 이를 두고 그가 5년 후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네그로 전시회(The Exhibit of American Negroes)’를 소개하는 문구중 '블랙 아메리카'의 목장은 교육적인 면도 분명히 있겠지만 그와 함께 여흥도 합쳐진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라고 반박하기도 한다.
“다호메이 마을, 그 중간" 1893년 만국 박람회에서 재현해낸 다호메이 마을의 입구 사진— 사진 출처
199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의 “미국 네그로 전시회"중 한 부분을 포착한 W. E. B. 뒤부아의 사진 — 사진 출처
전시된 사회학적 차트는 이 링크를 통해 볼 수 있다.
‘블랙 아메리카'를 두고 재미가 가미된 일종의 교육현장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반복되어 언급되었다. 평론가들중 한 명은 “현장은 해변에 앉아 멍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지적수준이 높은 층을 위해 지어졌다"라고 하기도 했다. 평론가들은 ‘블랙 아메리카’는 흔히 봐오던 ‘블랙 페이스(*4: 얼굴에 검정칠을 해서 흑인들을 조롱하던 인종차별적인 공연)’가 사용된 공연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며 잠재적 방문객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혹시나 흑인을 비하하는 내용을 미리부터 염려하여 이 엔터테인먼트 쇼를 보지 못 한 사람이 아직도 있다면 바로 그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고 알려주고 싶다. 그들의 노동현장에서 들려온 음악은 그 어디서도, 특히 북부지방에선, 들을 수 없었던 선율이었으며 지금이 아니면 아마 다시는 직접 들을 기회가 없을 것이다.”
위에 발췌된 평론에서 언급된 “아름다운 선율”은 실제로 목화밭 세트에서만 들을 수 있었지만 현장에서 과거 남부 목장을 경험했던 방문객들을 제대로 즐겁게 해줄 쇼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바깥에 위치해있던 원형극장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형극장에서의 퍼포먼스 종류는 너무나도 다양해서 일일이 나열하기 불가능할 정도였으며 출연진은 매주마다 바뀌었기에 방문객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전시회를 다시 찾고싶게끔 만들었다. 그곳엔 저글링하는 사람, 곡예사, 승마인, 코미디언, 연주자, 달리기 경주, 스케이터, 케이크워크(cakewalk, *5: 19세기 남부지방에서 비롯된 춤의 일종), 그리고 몇백 명이 한데모여 부르는 합창 공연도 있었다. 당시 뉴욕에 온 흑인 연기자들은 그들의 개인적인 경험이 담긴 가사를 사용해 어반 장르의 음악을 키워오고 있었지만 대중에게는 그것마저 남부출신 흑인들의 진실된 모습으로 인식되었다.
1895년 일러스트레이티드 아메리칸(Illustrated American)의 6월호의 ‘블랙 아메리카' 비평과 함께 실린 사진— 사진 출처
왼쪽 사진: “아마존족(The Amazons)”; 오른쪽 사진: “9번째 미국 십자군(Ninth U. S. Calvary)” --- 1895년 일러스트레이티드 아메리칸(Illustrated American) 6월호의 ‘블랙 아메리카'의 비평과 실린 사진 — 사진 출처
블랙페이스를 그려가며 조롱하던 식의, 공격적인 인종차별에서부터 할렘 르네상스(Harlem Renaissance)를 통해 비춰진 흑인들 삶의 진정성, 그리고 흑인예술운동(Black Arts Movement) 까지 미국의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대중 퍼포먼스가 겪은 변화를 역사학자들은 "하나의 일련 과정"이라고 해석해왔다. 즉, 백인들이 지어낸 시골에서 닭고기나 훔쳐먹는 도둑들(*6)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떨어져 독립적으로 자라온 흑인들의 삶과 역사가 지닌 복잡한 문제들을 되돌아보게끔 재정리해준 것이다. 역사를 하나의 선으로 보는 시선이 역사기록자들에게 더욱 안정적으로 연구할 거리를 던져줄 뿐만 아니라 흑인들의 역사에 있었던 수많은 전쟁과 고난, 그리고 패배의 경험을 하나씩 짚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블랙 아메리카'라는 일종의 유흥거리는 인종차별이 벌어지는 사회 속 각 인종의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또 어떻게 표현할지 제대로 고민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했다. 노예가 부르던 음악, 인종간의 차이를 마냥 새로운 개념으로 받아들이던 인식을 줄여줄만한 극장, 민족지학적으로 구상된 인간 동물원(“human zoo”)이 이루어낸 장관을 어떻게 보면 과거 노예제도가 활발하던 당시를 그리워하거나 그와 반대로 20세기로 들어서며 도시화된 흑인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에 대해 백인들에게 알려줄, 어쩌면 양쪽면을 다 보게 해줄 수 있는 조그마한 창 두 개를 마련해주었다. 당시 ‘브루클린 이글(Brooklyn Eagle)’은 인종차별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인종간의 차이를 줄여주는 이 이상한 혼종쇼를 몇 마디로 잘 정리해낸 광고문을 내놓기도 했다:
"[‘블랙 아메리카'는] 미국의 흑인들이 겪어내야만 했던 모든 시기, 마냥 노예로서 보내야만했던 남부에서의 농장생활에서 북부에서 전문직을 따낼 수 있고 병사로서 나라에 힘을 보태고자 하는 오늘날의 모습까지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
브루클린에서 벌어진 농장 코스플레이('블랙 아메리카')는 많은 이들에게 좋은 사업 아이템이라기 보다는 특이한 소설의 전제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블랙 아메리카'의 후원자, 네이트 샐스배리(Nate Salsbury)에게는 이보다 더 논리적으로 말이 되며 시기적절한 공연은 없었다고 한다. 1895년이 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미국내 존재했던 제국주의, 그리고 탄압을 여과없이 보여준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Buffalo Bill’s Wild West)’의 제작자 및 매니저로 널리 알려져있었는데, 이 ‘버팔로 빌의 (...)’는 애니 오클리(Annie Oakley)와 원주민 족장과 재빠른 총잡이들, 그리고 미국 원주민의 역할을 맡은 연기자들로 꾸며졌으며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나 현대 웨스턴(*7: 장르의 한 분류)에 자주 등장하던 소재였다. ‘블랙 아메리카'가 사람들이 만들어낸 편견이 가득한 역사관과 다르게 제작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오히려 적었던 제작비와 긴 이야기거리를 만들기 버거웠던 점, 등의 덕택일 수도 있다. ‘와일드 웨스트 쇼(Wild West show)’들은 '카우보이 대 인디안(Cowboys vs. Indians, *8: 명백히 틀린 호칭이지만 당시엔 이렇게 불렀기 때문에 그대로 적어보았습니다)'의 양상을 만들어내며 당시 유명세를 날렸던 고전 드라마 이야기의 전제를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블랙 아메리카'는 뭔가 조금 다른 것을 제시했는데,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제대로 보여줄만한 백인 악역이나 누가 인종차별을 주도했는지 언급하며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기보다는 “인종의 다양성"을 두둔하며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려고 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좌: '웃을 때 부르는 노래(The laughing song)'; 우: '목화 공장(The cottonpress)' -- 일러스트레이티드 아메리칸(Illustrated American)에 실린 ‘블랙 아메리카'의 비평문에서 발췌함(1829년 6월 29일). — 사진 출처
일러스트레이티드 아메리칸의 ‘블랙 아메리카'의 비평과 함께 실린 사진들 (1895년 6월 29일)— 사진 출처
'블랙 아메리카'의 스폰서였던 네이트 샐스배리가 무대 뒤에서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으로 이름을 알렸다면 전시를 위해 각종 구상을 해내고 제작에 힘을 썼던 빌리 맥클레인(Billy McClain) 또한 총괄제작과 그닥 멀지 않은 인물이었다. 맥클레인은 북쪽, 흑인 작가로서의 입장을 지닌 인물, 연기자, 그리고 흑인 노예들의 삶을 재현하는 일에 힘쓴 사람이었지만 뉴욕 브로드웨이의 홍보문구 “네이트 샐스배리씨(Mr. Nate Salsbury), 총괄 제작자"라는 글 뒤에 묻히곤 했다. 하지만 다행히 맥클레인의 역할은 현대 학자들에 의해서 겨우 되살아나고 있는 듯 하다. ‘블랙 아메리카'가 일어나기 전에 ‘빅스버그의 전투(The Battle of Vicksburg)’, ‘전쟁 전의 남부(The South Before the War)’라는 두 개의 거대한 공연에 영향력을 펼쳤던 맥클레인은 재능 발굴, 무대 관리, 그리고 음악 감독으로 힘쓰며 명성을 떨쳤던 시절이 있었다. ‘블랙 아메리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그의 역량은 언론을 통해서나마 가끔씩 알려지곤 했는데, 그의 이름은 “유희거리 제작자 및 무대 매니저" 또는 500명의 공연자들을 지휘하는 매니저, 그리고 “‘블랙 아메리카’ 전시회의 매니저"라는 직책과 함께 언급되었다. 흑인 작가가 구상하고 당시 엔터테인먼트계의 큰손이었던 인물이 후원을 맡아준 ‘블랙 아메리카'는 과거 노예제도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새로이 시민권을 얻게 된 흑인들의 창의력과 예술성을 축복하며 맘껏 뽐내게 해주기도 하는 요상한 혼종이었던 점 만큼은 분명하다.
1901년경 찍은 빌리 맥클레인의 사진 — 사진 출처
‘블랙 아메리카'를 관람한 사람들의 반응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장 먼저 ‘블랙 아메리카'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부터 파악해야만 한다. 민스트럴 공연과 집에서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악보들 사이에 만연한 “과거를 향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주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노예제 폐지를 원하게끔 만든 동시에 역으로 감성적인 유럽 음악을 통해 경제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백인들 또한 많이 양성해냈다. 실제 노예제도와 관련한 경험이 전무했던 도시인들은 단순한 시골의 삶, 흘러가는대로 사는 방식, 매미(Mammy, *9: 과거 미국 남부의 백인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보던 흑인 여자를 경멸적으로 가리키던 말)의 푸근함을 주제로 한 음악 테마를 좋아했다. 흑인 작곡가 제임스 블랜드(James Bland)의 '나의 옛버지니아로 돌아갈래요(Carry me Back to Ol’ Virginny)'와 같은 노래는 이민자들과 새로이 도시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 사람들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정을 들끓게 만들었다. ‘블랙 아메리카'는 시카고의 1893년 만국 박람회에서 주목을 이끌었던 -- 마냥 사실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 민족지학적인 전시와 미국 흑인들의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제작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팅장은 흑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목화밭에서 일하던 노예들에서 이제는 도시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인물들로 볼 수 있게끔 힘썼다.
향수와 진보가 묻어나는 테마는 특수한 퍼포먼스 형식을 통해 그 빛을 발현했다. ‘케이크워크’ 춤은 북부지방에 이미 잘 알려져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블랙 아메리카'에서 진행된 케이크워크 춤을 보며 이것이야 말로 남부지방 고유의 “진짜" 케이크워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본래 귀족층 주인 백인들을 비꼬기 위해 만들어진 풍자적인 춤, 케이크워크는 시대가 흐르며 점점 더 계속해서 발전했고 나중엔 춤 경연에서, 또는 민스트렐 쇼에서 인종에 관계없이 췄을 정도로 커졌다. “(‘블랙 아메리카'에서 보여준) 버지니아주의 전통 케이크워크는 북부 사람들이 봐오던 번지르르한 케이크워크와는 다르다"라는 당시 비평문중 발췌한 인용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북부 지방의 관람자들은 ‘블랙 아메리카'를 통해 케이크워크의 원조격인 춤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블랙 아메리카'의 일정표— Source.
'블랙 아메리카'에서 부른 합창곡(Chorus) 또한 마찬가지였다. 관람객들은 합창곡을 들으면서 이는 분명 남부 지역 흑인 특유의 것일거라 생각하기도 했으며, 특히나 뉴욕 지방의 것이라기 보다는 흑인들의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많았다. 한 비평가는 “그들이 진짜 남부 지방의 네그로들이 아니라 페리를 타고 이스트 리버(East River)를 경유해서 온 공연자들이라고 의심하던 시선들은 그들이 목화밭에서 부르는 노래소리와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른 이들도 백 명 이상의 흑인이 부르는 노래를 두고 흑인 특유의 성질이 있는 멜로디라고 평했다:
“… (흑인들이 내는) 소리의 깊이와 그 어우러지는 정도에는 뭔가 단단한 성격이 있었다. 이에 영감을 받은 드보르작(Dvorak, *10: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곡가)은 네그로 합창단을 통해 미국과 독일 백인들의 합창곡에만 관심을 지니던 사람들에겐 완전히 새로울법한 합창곡을 만들게 되었다.”
‘블랙 아메리카'를 향한 찬사는 일전에 언급한 민족지학적(ethnographic)인 틀이 많은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전시에 참여한 연기자들이 전부 숙련된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정말 자연스러운 “남부에서 평생을 자라고 뉴욕에 온 흑인", 그 자체였고 그렇기에 그들에겐 태생부터 창의적인 능력이 있었다. 물론 당시 시대와 공연자들이 살던 지역의 환경을 고려해본다면, 그들 중 대다수는 실제로 연기와 노래를 제대로 배운 자들도 많았겠지만 설령 일부 인원이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 했다고 하더라도 예술성을 지닌 그들의 집단 내에서 저절로 실력을 키워나갔다고 쉽게 예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전시회는 북부 지방 사람들이 미국의 흑인들을 바라보는 시점에 그들의 예술성 뿐만이 아닌 가치있는 주제의 또다른 존재를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바로 흑인들이 지닌 시민으로서의 자격이었다.
시민권 이야기를 하자면, ‘블랙 아메리카' 전시회는 상상도 못한 절경과 함께 그 막을 내렸는데, 그 절경의 이름은 바로 '역사 속 사진들(Historical Pictures)'이라는 공연이었다. 이 공연은 몇백 명의 흑인들이 무대 위에 선 채로 애국심 가득한 노래를 부르는 와중에 뒤에 비치된 가로 3미터, 세로 6미터 정도 되는 초상화들의 포장이 하나씩 벗겨지는 구성이었다. 초상화들은: 존 브라운(John Brown), 프레드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 윌리엄 셔먼(William Techumseh Sherman),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 그리고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의 것이었다(*11: 위에 언급된 인물들은 미국 노예제 폐지와 관련되었다). “살아 숨쉬는 과거의 목화밭"부터 미국 제9기병대 출신인 브라스 밴드의 공연을 지나 공연의 마지막 부분에 분위기의 절정을 불러일으켰던 이 공연은 현대성과 애국심을 동시에 자극시키며 지난 시대를 지나 이제는 새로워진 ‘블랙 아메리카'를 소개하는 느낌으로 웅장하게 제작되었다.
“존 브라운의 초상화", “역사 속 사진들" 공연 도중 찍혔다고 추정되는 사진 -- 6월에 발간된 일러스트레이티드 아메리칸의 ‘블랙 아메리카' 비평문에 실렸다.(1895년 6월 29일) — 사진 출처
언론을 통해 공연에 참가한 연기자들이 담아낸 당시의 소회는 존재하지만 정작 아직까지 진정으로 미지의, 또 매우 흥미로운 영역으로 남은 건 ‘블랙 아메리카'에 참석한 흑인 관람객의 경험은 과연 어땠는지에 관한 것이다. 일찍이 학자들이 ‘블랙 아메리카'가 백인들만을 위한 전시라고 생각될 정도로 백인 입장에서의 논평을 많이 발표했다면 적어도 하루, 적어도 딱 하루동안 흑인 여성들과 아이들이 참석했다고 말해주는 자료를 바로 이 20세기 초반 특유의 미사여구가 많고 감성적으로 무딘 형식의 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초콜릿으로 뒤덮인 라파엘 체럽(Raphael cherubs, *12: 천사 라파엘이 아이었던 시절을 일컫는 말)들은 블랙베리같은 모습으로 어제 앰브로즈 공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블랙 아메리카'의 매니저, 네이트 샐리스배리는 지역에서 2세 이하의 유아를 키우고 있는 모든 유색인종 어머니들을 초대했다. 과거 남부에서 행해졌던 역사를 그들의 눈으로 직접 지켜보기 위해 초대된 어머니들 중에는 새로운 경험을 앞두고 흥분을 감추지 못 하던 이들, 흑인 아이를 입양한 백인 엄마들도 있었다.”
벅 댄싱(buck dancing, *13: 케이크워크와 마찬가지로 흑인 노예들이 만들어낸 춤의 일종), 케이크워크와 같이 현대식으로 재현된 과거 흑인 노예들의 행동양식을 바라보며 흑인 어머니들이 어떻게 느꼈을지 어림짐작 해보는 기자의 의견은 찾을 수 있지만 정작 흑인 어머니 그대들이 어떻게 느꼈을지,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표현하는 자료는 현재까지도 찾을 수 없다. ‘블랙 아메리카'는 전문가들의 어느 정도 편집된 목소리를 통해 구전되오고 있지만 여전히 역사 속 미지의 행사로 남아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과거의 몇몇 백인 미국인들이 전시를 관람하면서 어떻게 느꼈을지 알 수는 있지만 흑인 공연자, 그리고 흑인 관람객들이 1895년의 ‘블랙 아메리카'를 통해 받은 인상은 과연 어땠을지 알 수 없다는 점은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도로시 베리(Dorothy Berry)는 하버드 대학교, 허프턴 도서관(Houghton Library)의 디지털 자료 프로그램 매니저로 재직중이다. 그녀는 인디애나 주립대에서 문헌정보학과 박사학위, 민족 음악학의 학사학위를 수여받았고 밀스 대학교(Mills College)에서 음악 연주로 석사과정을 밟기도 했다. 그녀는 이전에 미네소타 대학의 미국 흑인들의 역사를 조사하는 기관에서 메타데이터와 디지털화 부문을 이끌었고, 미국 흑인 역사와 문화 국립 박물관(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에서 멜론 펠로우(Mellon Fellow) 직책을 맡은 적도 있으며, 또한 흑인 영화 센터/아카이브와 흑인 음악과 문화의 아카이브(Black Film Center/Archive and the Archives of African American Music and Culture)에서 조교로 일한 적도 있다.
영어 원문 출처: https://publicdomainreview.org/essay/black-america-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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