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1. 02:56ㆍ번역/비문학
W. B. O'Shaughnessy and the Introduction of Cannabis to Modern Western Medicine
현대 서양 의학에 대마초를 소개한 남자, W. B. 오쇼네시(W.B. O’Shaughnessy)
글쓴이ㆍ수잔 무커지(Sujaan Mukherjee)
번역ㆍ오성진
Cataleptic trances, enormous appetites, and giggling fits aside, W. B. O'Shaughnessy's investigations at a Calcutta hospital into the potential of medical marijuana — the first such trials in modern medicine — were largely positive. Sujaan Mukherjee explores the intricacies of this pioneering research and what it can tell us more generally about the production of knowledge in colonial science.
무감각한 트랜스 상태, 어마어마한 식욕, 낄낄대는 웃음을 동반하는 발작을 뒤로하고, W. B. 오쇼네시(W. B. O'Shaughnessy)은 캘커타(Calcutta) 병원에서 의료용 마리화나의 가능성을 실험했고 -- 현대 의학에서는 첫 시도로 알려져있기도 하다 -- 그 연구 결과는 실로 엄청나게 긍정적인 영향을 세상에 가져왔다. 수잔 무커지(Sujaan Mukherjee)는 이 에세이를 통해 선구자적인 이 연구결과를 뜯어보며 오늘날 우리들에게 과연 ‘식민지 과학(Colonial science)’은 어떤 방식으로 지식을 축적해왔는지 고찰해본다.
원문 게시일ㆍ2017년 4월 20일
Drawing of Cannabis indica featured in O’Shaughnessy's article on the plant in the Journal of the Asiatic Society of Bengal (1839) — Source.
1839년에 발표된 ‘벵골의 아시아 사회 연구(Journal of the Asiatic Society of Bengal)’에 오쇼네시가 대마초를 연구하며 쓴 논문에 삽입된 카나비스 인디카(Cannabis Indica, *역주: ‘인디카'라고 불리기도 하며 대마초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 두 가지 종류, 인디카와 사티바 중 하나이다) 그림 --- Source
In 1833, a twenty-four-year-old Edinburgh graduate arrived in India, an assistant surgeon in the East India Company. He had failed to acquire a license under the London College of Physicians and Surgeons, but had already established himself as an exciting young medical researcher, authoring an important paper on cholera following an outbreak in Europe. This man was William Brooke O’Shaughnessy, an Irish physician who would — over the next few years working in India — make significant contributions to the history of research in electricity, telegraphy, pottery, and, his primary discipline, medicine.
1833년, 어느 스물네살 에딘버러 대학원생은 외과의 조수 자격을 안고 인도에 도착했다. 그는 비록 런던 의과대학원(London College of Physicians and Surgeons)에서 의료 면허를 수료 받지는 못 했지만, 이미 당시 유럽에서 터진 콜레라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던 그는 의학 연구자로서 각광을 받고 있었다. 이 젊은 대학원생의 이름은 윌리엄 브룩 오쇼네시(William Brooke O’Shaughnessy). 아일랜드 출신의 의사였던 그는 이후 몇 년간 인도에서 일하면서 전기, 전화, 도예, 그리고 그의 주전공인 의학에 역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기게 될 것이었다.
(더 미씽링크:) The colonial peripheries had no shortage of impressive polymaths, but what sets O'Shaughnessy apart is the manner in which, while conducting research in his many areas of interest, he not only tapped into elaborate local knowledge networks and structures, but also rigorously documented them, thoroughly crediting his sources both bibliographic and human. O'Shaughnessy also stands out on account of what was, arguably, his most significant contribution to medicine: the claim that cannabis could be used as a medicinal drug. As an intoxicant cannabis was fairly common in India, as O'Shaughnessy noted, but he demonstrated its potential use in a medical context, particularly as an anaesthetic. The papers on his experiments with the plant were published in the Journal of the Asiatic Society of Bengal in late 1839 — and were also read in front of the Medical and Physical Society of Calcutta in October of that year. In them we find detailed records of his prescient experiments and a fine example of his unique style of research.
당시 식민지였던 인도에는 유럽의 많은 학자들이 마를 날이 없었지만 그 사이에서도 오쇼네시는 특별했다. 그는 관심있는 분야를 연구하며 인도 지역의 학식있는 사람들에게 자문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열심히 기록하곤 했으며 그가 참고한 내용은 그 출처가 책이건 사람이건 간에 확실하게 밝혀두기를 미루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쇼네시는 의학계에 그가 남긴 가장 큰 족적, 바로 카나비스(*2: 대마초의 대분류)를 의료용 약으로 쓸 수 있다고 주장한 연구로 눈에 띄었다. 오쇼네시의 대마초 실험 내용이 담긴 논문은 1839년 후반기에 ‘벵골의 아시아 사회 연구(Journal of the Asiatic Society of Bengal)’에 실린 채로 발표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 캘커타 대학 의과대학원 강연장에서 발표되기도 했다. 그의 논문을 통해 독자들은 그의 시대를 앞서간 실험결과들과 그의 독특한 연구 방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His first series of cannabis experiments were conducted on an unfortunate menagerie of animals (fish, vultures, and storks, amongst others, ) and also, perhaps not without controversy today, a few children — all subjected to various preparations and extracts of Cannabis indica. The first experiment, for instance, involved administering "ten grains of Nipalese [sic] Churrus, dissolved in spirit" to a "middling sized dog". O'Shaughnessy's breathless notes read: "In about half an hour he became stupid and sleepy, dozing at intervals, starting up, wagging his tail as if extremely contented, he ate some food greedily, on being called to he staggered to and fro, and his face assumed a look of utter and helpless drunkenness." 1
그의 첫 카나비스 실험은 가엽게 잡혀온 야생동물들(생손, 독수리, 황새가 대표적이었다), 그리고 --- 이 부분은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데 -- 몇몇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으며 해당 대상들에게는 카나비스 인디카의 추출물이나 조제용 물질이 부과되었다. 예를 들면, 첫 실험은 “카나비스 인디카에서 나오는 점성 물질을 굳히고 갈아 만든 가루 열 알 정도를 탄 액상"을 “중간 사이즈 정도 되는 개"에게 적용시켜보는 내용이었다. 긴박감 가득한 오쇼네시의 연구 기록지에는 “삼십분이 채 되기도 전에 개는 멍청해지고 졸음이 늘었으며 주기적으로 꾸벅거리다가도 뭔가 굉장히 만족스러운지 꼬리를 엄청나게 흔들기도 했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 헤치웠으며, 이름을 부르면 온사방을 신나게 뛰어다니기도 했다. 개의 표정은 영락없이 만취한 남성의 그것이었다.”
Illustration of W. B. O’Shaughnessy at work in the laboratory, artist and date unknown — Source.
연구실에서 집중하고 있는 W. B. 오쇼네시의 그림 -- 작자 및 날짜 미상 Source
O'Shaughnessy then tried variants of these initial treatments on a number of maladies. He describes the effect on four patients suffering from rheumatism, on a case of hydrophobia, and on cholera and tetanus victims before issuing a warning about the delirium that may be occasioned by inappropriate dosage. Some of the reports wouldn’t be out of place as descriptions of a merry stoner’s night in (minus the video games). One rheumatism sufferer, to whom “half a grain of Hemp resin was given in a little spirit … became talkative and musical, told several stories, and sang songs to a circle of highly delighted auditors, ate the dinner of two persons …, sought also for other luxuries I can scarcely venture to allude to, and finally fell soundly asleep, and so continued till the following morning ”. Perhaps not unsurprisingly the next day the patient, “begged hard for a repetition of the medicine”.2
이후 오쇼네시는 손에 꼽을만한 당시의 심각한 병을 대상으로 카나비스를 적용시켜보기 위한 연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류마티즘, 물공포증(hydrophobia), 콜레라, 그리고 파상풍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비정상적인 양으로 인해 환각을 볼 수 있다는 경고 없이 진행한 카나비스 약물 치료 결과를 묘사했다. 그리고 이 설명문 중에서는 행복하게 취한 (비디오게임을 뺐다고 가정하면) 약쟁이의 모습을 그린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내용도 눈에 띄게 보인다. “헴프(hemp, *3: 카나비스의 소분류) 가루 반 알이 섞인 액상을” 류마티즘으로 고통받던 한 환자에게 투여했을 때 그는 “훨씬 더 말이 많아졌으며, 음악적으로 변하고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즐겁게 들어주는 관중들을 두고 많은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2인분 어치의 식사를 헤치우기도 하고 여러가지 내가 기술하지 못 할 것들을 가져오라고 소리치다가 결국 세상 편안한 잠에 들었다. 그는 다음날 아침까지도 비슷한 행각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고 더했다. 그리고 놀랍지 않게도 환자는 “다음날에 울고불고 빌면서 다시 한 번 같은 약을 투약해달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Elsewhere O'Shaughnessy describes a somewhat surreal episode in which a rheumatism patient administered with cannabis enters a state of “catalepsy”, whereupon his rigid limbs could be moved only with the help of medical staff, who could place them in “every imaginable attitude” where they would remain “no matter how contrary to the natural influence of gravity” — all while the patient remained completely “insensible”. The commotion of events ended up rousing a second patient, similarly dosed, who became “vastly amused at the statuelike attitudes” he witnessed, and then proceeded, after a sudden “loud peal of laughter” to exclaim that “four spirits were springing with his bed into the air”. After a subsequent “uncontrollable” fit of the giggles this second patient then took up the strange condition of the first, his arms and legs “remain[ing] in any desired position”. Despite the slightly chaotic scenes, within a day or so both patients were much relieved of their rheumatism, and in three days completely cured.3
다른 지면에서는 오쇼네시가 카나비스를 투여받은 류마티즘 환자가 강경증(catalepsy, *4: 몸이 갑자기 뻣뻣해지면서 순간적으로 감각이 없어지는 상태)을 겪게 된 요상한 사태를 서술하기도 한다. 그의 팔다리는 오로지 의료진들의 도움을 통해서만 움직여질 정도였다고 한다. 오쇼네시가 적은 글에 따르면 의료진들은 아무렇게나 환자의 몸을 다뤘으며 환자의 몸은 “지구에 중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여기저기로 뻗어있었고 환자는 이와중에 아무것도 못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계속해서 벌어지던 일련의 소동은 비슷한 정도의 약물을 투여받은 두 번째 환자를 자극시키는데에 이르렀고 그는 “첫 번째 환자의 굳은 몸을 보며 굉장히 흥미로워 하며 즐거워 했다고" 오쇼네시는 당시 상황을 기술했다. 그 후 두 번째 환자는 “너무나도 큰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네 개의 영혼이 내 침대 위를 방방 뛰고 있잖아!’라고 소리쳤다”고 했다. 계속해서 ”조절할 수 없을 정도의” 발작같은 웃음을 터뜨리던 두 번째 환자는 너무도 갑자기 첫 번째 환자의 상태와 동일하게 강경증을 겪으며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흩어지도록 두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물론 사태는 약간 혼란스러웠지만 환자들은 24시간 내외로 류마티즘 증상이 훨씬 줄어든 양상이었으며 삼 일이 채 되기도 전에 병이 완전히 나았다고 한다.
Interestingly, it is while recording a failed treatment of hydrophobia that O'Shaughnessy notes one of the fundamental arguments for this medicine: even if it failed at curing the actual root of the illness, "at least one advantage was gained from the use of the remedy -- the awful malady was stripped of its horrors". If the illness was terminal, at least cannabis could enable the physician to “strew the path to the tomb with flowers”.4
흥미롭게도 물공포증 환자에게 적용한 약물 치료가 실패했을 때가 되어서야 오쇼네시는 비로소 카나비스 약물 사용에 가장 근본적인 주장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설령 약물 치료가 병을 뿌리채 뽑는데에는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약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이점은 확실했다 -- 그건 바로 환자를 병의 끔찍한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수는 있다는 점이다." 만약 한 환자가 앓고 있는 병이 불치병이라고 한들, 카나비스의 도움을 통해서 의사들은 적어도 환자가 죽음으로 가는 길 위에 예쁜 꽃송이들을 흩뿌려놓고 장식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The argument is not unfamiliar today, and indeed, in a prescient echo of more recent advocates of cannabis’ legalisation, O’Shaughnessy also downplays the drug’s supposed negative effects compared to certain other popular legal narcotics. He writes, “As to the evil sequelae so unanimously dwelt on by all writers, these did not appear to me so numerous, so immediate, or so formidable, as many which may be clearly traced to over-indulgence in other powerful stimulants or narcotics, viz. alcohol, opium, or tobacco.”5
오늘 날에도 이러한 주장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으며 카나비스의 합법화를 주장하는 이들의 논거로 꼭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오쇼네시는 많이 상용되고 있는 약물과 다르게 카나비스가 지닌 부작용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모든 작가들이 달고 사는 후유증이 그러하듯이 카나비스의 부작용은 내게 그렇게 크거나 즉각적이거나 강력하게 보이지 않았다. 심한 부작용은 아편, 담배, 술, 그리고 어떠한 약물을 과다하게 복용하면 똑같이 생겨난다는 점에서 그렇게 큰 문제로 보고 있지 않다.”
The interest of O'Shaughnessy’s medical students was also clearly piqued. He reports that several ended up experimenting on themselves and describes in detail one particular auto-experiment by a “retiring lad of excellent habits” which, twenty minutes after ingestion, led to the “most amusing effects I ever witnessed”.
오쇼네시의 의학학생들의 관심사 또한 분명히 남다른 점이 있었다. 오쇼네시의 말에 따르면 학생들중 몇몇은 자신의 신체에 실험을 했다고 하며 그는 그중에서도 “훌륭한 습관을 지닌 학생 한 명이 투약 이후 20분만에 보인 매우 흥미로운 반응으로 인해 완전히 변하게 만든” 가장 인상 깊은 실험을 묘사한다.
I found him enacting the part of a Raja giving orders to his courtiers; he could recognize none of his fellow students or acquaintances; all to his mind seemed as altered as his own condition; he spoke of many years having passed since his student's days; described his teachers and friends with a piquancy which a dramatist would envy; detailed the adventures of an imaginary series of years, his travels, his attainment of wealth and power. He entered on discussions on religious, scientific, and political topics, with astonishing eloquence, and disclosed an extent of knowledge, reading, and a ready apposite wit, which those who knew him best were altogether unprepared for. For three hours and upwards he maintained the character he at first assumed, and with a degree of ease and dignity perfectly becoming his high situation. A scene more interesting it would be difficult to imagine. It terminated nearly as rapidly as it commenced, and no headache, sickness, or other unpleasant symptom followed the innocent excess. 6
내가 그를 봤을 때 그는 이미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라자(Raja, *5: 과거 인도의 국왕)를 연기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동료 학생들이나 친구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의 정신은 그의 상태와 같이 변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학생 신분을 끝마친 이후 몇 년을 산 사람처럼 자신의 미래 상황을 읊어댔으며 상상으로 만들어낸 몇 년간 그가 한 여행들과 그가 어떻게 재력과 권력을 쥐게 되는지 설명했다. 그는 종교적, 과학적, 그리고 정치적인 주제를 두른 토론에도 물불 안가리고 참여했는데 그 안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 한 현명함과 능변술, 그리고 엄청난 량의 정보량과 독서량, 그 위에 그 어떤 말도 위트있게 반박할 수 있는 능력까지 겸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매우 놀라며 그를 주시했다. 세 시간동안 학생은 자신이 만들어낸 이 새로운 캐릭터를 유지하며 하이 상태(high, *6: 흔히들 마약에 취한 상태를 일컫는 말)를 지켰으며 그가 보여준 장면보다 더 이상하거나 인상깊은 장면은 기대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엔 -- 빠르게 효과가 나타난 만큼 -- 효과는 빠르게 중단되었으며 이후 학생은 두통이나 그 어떤 통증, 또는 안 좋은 기분이 들만한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Photograph from 1878 of the Medical College Hospital, Calcutta, where O'Shaughnessy worked, although this picture shows a building completed in 1852, by which time he was working on the telegraph system — Source.
1878년에 찍은 캘커타 의과대학원 병원의 모습 -- 오쇼네시는 근무했던 이 병원은 1852년에 완공 되었으며 당시 오쇼네시는 전보 시스템을 연구중이었다고 한다. -- Source
In and amongst these colourful accounts, O'Shaughnessy’s paper is peppered with references to other instances in which his fellow medical men had employed the administration of cannabis to alleviate patients' symptoms. The list includes his cousin Richard O'Shaughnessy, Dr Bain of the Police Hospital, Mr O'Brien of the Native Medical Hospital, and not least, James Esdaile (another Edinburgh student, best known for his experiments with mesmerism at the Hooghly Imambarah College, which he recorded in his 1851 book Mesmerism in India). The historian Shrimoy Roy Chaudhury feels that it was the "conquest of pain in surgery" that granted British medicine historical credibility in India.7 Hemp played a key role in this. And veterinary science got involved as well — among notable experimenters in this field was the firm Hughes and Templar, who claimed to have cured three out of "five cases of horses suffering from tetanus" with the hemp resin.8
위예시와 같이 카나비스 실험과 관련하여 화려한 전적은 다양하게 존재했으며 오쇼네시의 논문에서도 이를 포함해 환자의 증상을 줄이기 위해 카나비스를 적용시키는 다른 의학계 동료들의 이야기들도 많이 언급되어 있었다. 그가 참고한 의학계 동료들중에선 오쇼네시의 사촌 리차드 오쇼네시(Richard O'Shaughnessy), 경찰 병원의 베인(Dr. Bain), 네이티브 병원(Native Medical Hospital)의 오브라이언씨(Mr. O’Brien), 그리고 -- 빼놓을 수 없는 이름 -- 제임스 에스데일(James Esdaile, 오쇼네시의 에덴버러 동창이었던 그는 훌리 이맘바라 대학(Hooghly Imambarah College)에서 진행한 최면술 관련 연구로 이름을 알렸으며 관련 내용은 1851년에 발표된 그의 책 ‘인도에서의 최면술(Mesmerism in India)’라는 책에 담겨져있다)이 있었다. 역사학자 슈리모이 첫후리(Shrimoy Roy Chaudhury)는 “수술과정에서 고통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으며 이로 인해 인도 안에서 영국의학을 향한 신용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헴프(Hemp, 카나비스의 한 종류로서 대마초와 분류된다)는 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수의학도 한몫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분야에서 흥미로운 실험결과를 내놓은 회사는 휴스(Hughes)와 템플라(Templar)였고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헴프 원액을 이용해 “파상풍을 입은 다섯 마리의 말 중" 세 마리를 완전히 치유 시켜주었다고 한다.
Before setting out the details of his experiments, O'Shaughnessy offers a background to the drug in four sections: its botanical character, popular uses, historical details, and medicinal properties. But he does all this with a little help from his friends: some regular and some, as that other great “generalist" Sherlock Holmes would call them, irregular. The network, as the following series of annotations to O'Shaughnessy's article will demonstrate, is an incredibly wide and diverse one.
오쇼네시는 자신이 진행한 실험 과정, 또 그 결과의 세세한 정보를 나열하기 전에 카나비스에 관한 배경지식을 총 네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했으며 그 중엔 식물학적인 특징, 자주 쓰이는 용도, 역사적 사실, 그리고 어떻게 약재로 쓰일 수 있는지에 관한 정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설명마저도 약간이나마 그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진행했는데, 도움이 된 친구들 중 몇몇은 보통의 사람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비범한 인물들이었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오쇼네시가 언급한 인물들은, 곧 밑에 있을 발췌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폭이 상당히 넓고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For the historical and statistical data he thanks the following: "the distinguished traveller the Syed Keramut Ali, Mootawulee [guardian] of the Hooghly Imambarrah", "Hakim Mirza Abdul Razes of Teheran", Pandit Madhusudan Gupta, "the celebrated Kamalakantha Vidyalanka, the Pandit [sic] of the Asiatic Society", and Mr Da Costa.9
역사학적 사료와 통계학적 자료를 두고 그는 다음 인물들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뛰어난 여행자, 셋 케라무트 알리(Syed Keramut Ali)과 훌리 이맘바라의 무타울리(Mootawulee, 수호자)”,”테헤란 출신의 하킴 라제즈(Hakim Mirza Abdul Razes)”, 판딧(pandit, 힌두교의 성직자를 의미함) 매후수단 굽타(Madhusudan Gupta), “명성을 넓게 떨치고 있는 카말라칸타 비댜랑카(Kamalakantha Vidyalanka), 그리고 아시아회(Asiatic Society)의 회장”, 그리고 다코스타씨(Mr. Da Costa).
Portrait of Syed Keramut Ali, featured in Arthur Conolly's Journey to the North of India (1838)
아서 코놀리(Arthur Conolly)의 책 ‘북인도 탐방기(Journey to the North of India, 1838)’에 실린 셋 케라무트 알리의 초상화 — Source.
Syed Keramut Ali, former Great Game "Newswriter" under Arthur Conolly in Kandahar, helped O’Shaughnessy with Persian references and a few manuscripts. Additional translation help may have also come from “Mr Da Costa”, who is presumably Lewis Da Costa, a polyglot and a prolific translator serving as assistant Persian translator to the Government of India in the 1840s. O’Shaughnessy wished also to appeal to Hindu authorities and the most obvious names listed in this regard are Madhusudan Gupta — celebrated as the first Indian to dissect a cadaver (though recent histories have questioned this claim) — and Kamalakantha Vidyalanka, who was appointed teacher of rhetoric at the Sanksrit College and became part of the British judicial system as a pundit. Vidyalanka appears to have had no direct link with medicine but provided O’Shaughnessy with a number of obscure Sanskrit references to the use of hemp, including a prohibition for Brahmins in particular found in the texts of Manu.
칸다하르(*7: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도시)에서 거주중이던 작가 아서 코놀리 밑에서 “뉴스를 보도하는 일"로 이름을 널리 알렸던 셋 케라무트 알리는 오쇼네시에게 손을 내밀어 페르시아에 관련된 정보와 글을 작성하는 일 몇 개를 도와줬다. 추가적인 번역은 다코스타씨의 도움을 받았는데 아마 여기서 다코스타씨는 루이 다코스타(Lewis Da Costa)를 의미하는 것일테며 그는 여러 방면에 학위를 지니고 있고 인도 정부에서 페르시아어 통역사로 높은 명성을 차지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오쇼네시는 힌두교내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과도 연결되고 싶어했는데 그렇게 해서 만난 이들이 바로 -- (물론 현대에 들어서는 이게 사실이 아니라는 반박문도 많이 제시되고 있지만) 인도에서 처음으로 시체를 해부했다고 알려진 -- 매후수단 굽타와 산스크리트 대학(Sanskrit)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며 카말라칸타 비댜랑카 영국 사법부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비댜랑카는 의학과 큰 연관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지만 오쇼네시에게 모호하기만 했던 상스크리트어로 된 참고문헌들을 해석해주며 그 서적들은 마누교에서 말한 브라만(Brahmin, 뉴잉글랜드 지역의 상류층 인물)과 멀리하는 방법에 이어 헴프의 사용법이 담겨있었다.
While reaching out to his scholarly friends on the one hand, O’Shaughnessy also sought advice from the deputy superintendent of police, Mr McCann, on official surveys regarding the consumption of “gunjah”. But if he wanted to know about the daily lives of his consumers, he needed someone “irregular”. For such purposes he tapped into the experience of one Ameer, “the proprietor of a celebrated place of resort for Hemp devotees in Calcutta, and who is considered the best artist in his profession.” For understandable reasons, that is all we ever learn regarding the identity of Ameer.10
오쇼네시는 위와 같이 학식 높은 친구들에게 손을 뻗는 동시에 경찰서장, 맥캔(Mr. McCann)이 “군자(gunjah, *8: 카나비스 인디카, 즉 인도에서 나는 카나비스를 뜻하는 말)”를 소비하고 있는 현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듣고 싶어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쇼네시가 정말 그의 소비자들의 일상생활은 어떤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비범한 인물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런 연유로 그는 “아미르(Ameer, 가명)”라는 인물과 친해지고 그의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상황을 이끌었다. 아미르는 “캘커타(Calcutta)시에서 헴프를 애용하는 자들이 자주 이용하는 공간의 소유주이자 동종업계에서 가장 예쑬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걸명에서 충분히 유추되는 이유로 인해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정보는 여기까지만 제공되었다.
It is perhaps thanks to Ameer, that O'Shaughnessy's report is so able to display an exceptionally close knowledge of the uses of the various extracts. While Sidhee, Subjee and Bang ("used with water as a drink") is "chiefly used by the Mahomedans of the better classes", Sidhee ("ground, mixed with black pepper, and a quart of cold water") is the "favourite beverage of the Hindus who practice this vice". Gunjah, on the other hand, is "used for smoking alone", and one rupee weight mixed with dried tobacco "suffices for three persons", although you find "four or five persons usually join in the debauch". The demography is curious, especially in the case of Majoon, (a hemp confection which is "a compound of sugar, butter, flour, milk, and Sidhee or Bang") which is consumed by all classes, "including the lower Portuguese or 'Kala Feringhees,' and especially their females".11
오쇼네시의 논문에 존재하는 액상의 종류부터 그들의 용법을 포함한 수많은, 아무데서나 얻을 수 없는, 정보들은 어쩌면 모두 아미르에게 감사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의 논문에 따르면: 시디(Sidhee), 섭지(Subjee), 그리고 뱅(bang, “주로 물과 함께 섞은 채 섭취한다"고 한다)은 “주로 이슬람교도(Mohammedan)의 사람들 중 상류층에 위치한 사람들이 주로 사용했다", 시디(Sidhee, “카나비스 원료를 갈아서 순후추와 약 1리터에 달하는 물과 섞어서 만든 제품")은 “불법약물을 즐기는 힌두교인이 가장 즐겨 마시는 음료였다”고 한다. 군자(Gunjah)는 오로지 “흡연용으로만 사용되었"으며 1루피와 비슷한 무게만큼의 원료를 말린 토바코와 섞어서 흡연하면 “세 명은 만족스럽게 취할 수 있다고 알려졌다"고 하지만 사실 “네다섯명이 구멍에 숨어 군자를 즐기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고"도 한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던 마준(Majoon, “설탕, 버터, 밀가루, 우유, 그리고 시디나 뱅을 섞어 만든 디저트 모양의 마약")은 당시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즐기곤 했는데 여기서 모든 계급이라고 하면 “저 밑에 있던 포르투갈인들 또는 칼라 페링히(Kala Feringhees, *9: 오스만 투르크 제국인들), 그들중에서도 특히나 여성들" 또한 포함되었다고 봐도 된다고 적혀있다.
Photograph of "a hemp drug shop" in Khandesh, with "bhang, ganja, & majum" for sale, featured as part of the Report of the Indian Hemp Drugs Commission, 1893-1894 — Source.
칸데쉬(Khandesh)지역, 어느 “헴프 상점"의 사진 -- “뱅, 간자, 그리고 마점(bhang, ganja, & majum *10: 위에서 설명된 헴프의 종류와 스펠링이 조금씩 다른 이유는 인도인과 유럽인이 그들을 표기하는 방법이 달라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을 팔고 있는 남성이 등장하는 이 사진은 ‘인도의 헴프 약물 위원회 보고서(Report of the Indian Hemp Drugs Commission, 1893-1894)’에 실렸다. Source
For interested parties, let it be known O’Shaughnessy has provided ample details to try out your own nineteenth-century recipes. He distinguishes between each type of extract and offers specific descriptions of how they are prepared, although the one which he recommends in greatest detail is meant for medicinal use only. Inadvertently he also maps the availability of the finest quality of each kind — sourcing his churrus as he did from Nepal, thanks to Dr A. Campbell of the Bengal Medical Service, a man with the dubious distinction of changing the course of Darjeeling’s history when as superintendent he oversaw a huge population rise between 1839 and 1849. The first part of the article also offers a rare glimpse into the contemporary consumption habits — an account that differs in tone and content from the usual official surveys.
흥미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오쇼네시는 아무나 직접 제작할 수 있는 19세기형의 헴프 제조법을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제공했다. 그는 물론 의료용으로 쓰라고 강력하게 권장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각종 추출물을 구분하는 법과 그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려주기도 한다. 실수라면 실수로 그는 각 종류의 헴프중 가장 괜찮은 질의 물품을 구할 수 있는 경로 또한 적어내린 그는 그가 네팔에서 즐겼던 차라스(churrus, *11: 대마 정상의 꽃에서 나오는 점성 물질로 환각 성분을 일으키며 일부에서는 “코카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의 원산지도 밝힌다. 오쇼네시가 차라스를 즐길 수 있었던 이유는 벵골 의료 서비스(Bengal Medical Service)소속인 A. 캠프벨 의사(Dr. A. Campbell) 덕분이었다. 캠프벨은 자신이 감독관으로 지내던 1839년에서 1849년 사이에 인구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것을 목격하며 이를 이용해 다르질링(Darjeeling)의 역사를 바꾸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 인물이었다. 추가적으로 그의 논문의 첫 부분은 당대 사람들이 대마초를 소비하는 습관에 대한 글도 적혀있었는데 이 부분 만큼은 논문의 나머지와는, 그러니까 일반적인 학술자료와는, 다른 톤과 내용을 지니고 있다.
If we discard the binary model often used to understand the exchange of knowledge (scientific, legal, or otherwise) between the colonial centres and peripheries, and turn to the idea of networks (as the historian Kapil Raj, for instance, has done), we realise that the networks that produce knowledge are much more complex than they appear at first glance. In W. B. O’Shaughnessy we have someone who is rigorous in noting down all the different sources of information that he taps into, and we realise that, upon closer inspection, even the nodes of a network give way to many other interconnected webs.
과학, 법률, 또는 그 어떤 종류의 정보건간에 식민지를 두고 일어나는 연구인지 아닌지를 재는 이분법적인 시야를 버리고 단순히 그 안의 사람들간의 이루어지는 네트워크가 벌이는 일로 본다면(예를들어 역사학자 카필 라즈(Kapil Raj)가 그러하였듯이) 처음에는 단순하게 보이기만 하던 외관이 실로 어마어마한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W. B. 오쇼네시를 통해 우리는 그가 연구를 이용해 이용하는 다양한 연줄이 실은 조금만 더 가까이서 본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르고 더 깊은 종류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하는데에 힘써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In the thirty-one-page Report on the Investigation of Cases of Real and Supposed Poisoning (1841), found in the National Library of India (Kolkata), we see our doctor sitting in the centre of another web of intrigue. After a call-out, people sent O’Shaughnessy items ranging from “the remains of a chapattee, which is said to have been the cause of death of Dasi Bania” to “a stomach . . . and the small intestines with the contents thereof, all stated to have been removed from the body of a man” found dead in the Native Hospital. O’Shaughnessy, who was Chemical Examiner to the government, received mails from persons in different posts in the British government from all over Bengal. He would send back his reports with details of his chemical analysis, opining whether there may have been foul play. He often struggled with forms of poison (often with the common bish which is available at any Calcutta market) that were not yet recognised by Western medicine.
인도의 국립 도서관(Kolkata)에서 찾을 수 있는 31쪽으로 이루어진 ‘대마초의 위독성, 그 진위를 위한 예시 연구(Report on the Investigation of Cases of Real and Supposed Poisoning, 1841)’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의사, 오쇼네시가 또다른 정보의 거미줄 중심에 앉아있는 장면을 포착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주로 그에게 의뢰된 사건들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인도로 출장을 간 뒤로 오쇼네시의 우편함에는 “다시 바니아(Dasi Bania)의 사인으로 알려진 ‘먹다남은 차파티(chapatti, *12: 인도 등지에서 먹는, 팬케이크처럼 둥글넓적하게 구운 빵)'”부터 “안에 소화가 덜 된 음식이 있는 채로 죽은 사람의 몸에서 떼어낸 소장(작은 창자)”까지, 정밀검사를 필요로하는 참으로 다양한 내용물의 우편물이 도착했다. 정부 소속의 화학 검진자였던 그는 벵골 전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국정부로 보내는 소포들을 고스란히 다 받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보고서와 덧붙여 화학 검사 결과를 동봉하여 그가 생각하기에 원래 이루어진 검사에 과연 부정행위가 있었을지, 그의 의견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서양 의학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캘커타 시장에 흔히 돌고 있는 값싼 종류의 대마초를 두고 자주 혼란스러워하기도 했다.
Table from O'Shaughnessy's Report on the Investigation of Cases of Real and Supposed Poisoning (1841) — Source.
‘대마초의 위독성, 그 진위를 위한 예시 연구(Report on the Investigation of Cases of Real and Supposed Poisoning, 1841)’에 실린 오쇼네이의 연구 도표 -- Source
O'Shaughnessy's language seems to anticipate at times the medico-forensic phrasings of Conan Doyle’s Dr Watson. He begins Case 12 thus:
오쇼네시의 글은 코난 도일이 만들어낸 가상의 캐릭터, 닥터 왓슨(Dr. Watson)이 해부할 때의 말투를 떠올리게끔 했다. 그 예로 그의 열두 번째 연구예시를 보면:
These are by far the most interesting cases which I have ever met with. The respectability of the individuals implicated; the extraordinary period which elapsed during which the bodies were exposed, without coffins, to the destroying influences of the heat and rains of Bengal; the curious changes which the poison underwent…constitute an array of circumstances scarcely surpassed in medico-legal interest by any but those of the celebrated Laffarge trial.12
이번에 맡은 일련의 사건들은 내가 여태껏 다뤄본 그 어떤 의뢰보다 훨씬 흥미로운 일이었다.내게 주어진 시체들을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난 이렇게 생각했다: 관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로 바깥에서 벵골의 무더위와 장마를 온몸으로 견뎌내며 말도 안 될 만큼의 양의 파괴가 이루어진 몸 안에서 흘러다녔던 독극물을 조사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신기한 일일까, 라고. 아마 라파즈(Lafarge, 프랑스의 유명한 아세닉 독약물 사건) 사건이 아니고서야 볼 수 없는 원료가 눈 앞에 있으니 그렇게 생각이 들 수 밖에.
This was not his first encounter with the science of criminal activity. In 1830, a young O'Shaughnessy arrived in London, struggling to find permanent employment. Soon after, urged by the editor of the Lancet, he published an article on "Poisoned Confectionary", the result of an extensive study. Along with a Dr Green, he purchased "at several shops, different specimens of coloured confectionary, and of colourless articles wrapped in stained paper." Each colour was analysed rigorously. The yellow, for instance, was understood to be a result of adulterating the candies with either "gamboges, massicot, Naples yellow, the chromate of lead, or vegetable lakes."13 A report on the study was published in an 1831 issue of The Medico-chirurgical Review and Journal of Practical Medicine, in which the writer remarks: "Dr. O'Shaughnessy is evidently a clever chemist, and his industry appears equal to his talent in the department of human knowledge".14
오쇼네시가 처음으로 범죄 사건의 과학 수사관으로 일한 것은 이 때가 아니었다. 1830년, 런던에 도착한 청년, 오쇼네시는 꾸준히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랜셋(Lancet)지의 편집자로부터 여러번 권고를 받은 끝에 장시간의 연구를 통해 쓰여진 그의 논문 “독이 든 간식(Poisoned Confectionary)”을 발표했다. 닥터 그린(Dr. Green)을 포함해 그는 “여러 상점에 들려 다양한 종류와 색상의 (마약이 든) 간식류들을 구매했다"고 한다. 각각의 색깔은 정밀하게 연구되었다. 예를 들어 오쇼네시는 이 논문을 통해 노란색은 사탕에 “유황, 마시콧, 네이플스 옐로(Naples Yellow, *13: 채색이나 윤을 내는 데 쓰는 유독한 황색 안료(顔料)), 납에서 추출한 크롬산염, 또는 채소에서 추출해낸 진홍식 안료"를 섞어서 색을 낸다고 밝혀내기도 했다. 이 보고서는 1831년에 ‘내과·외과학계 평론(The Medico-chirurgical Review)'와 ‘실제의학 저널(Journal of Practical Medicine)'라는 잡지를 통해 발표되었으며 한 평론가는 이를 두고 “오쇼네시 박사가 뛰어난 화학자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의 성실도와 노력 또한 그의 출중한 재능과 맘먹는 덕택에 그는 계속해서 인간이 알 수 있는 정보의 영역을 넓히고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적기도 했다.
The Journal of the Asiatic Society of Bengal published in the span of a few months two other experiments performed by O'Shaughnessy. In 1839 he reports on his use of the Galvanic battery for the "successful destruction of the wreck of the Equitable at Fultah Reach", where the Sydney-bound ship "leaden with wheat, rice, rum, &c.," had touched on the sand below and turned over "in six to seven fathoms of water".15 The first one, however, anticipates his later work on telegraphy -- a form of communication that would be taken seriously only after 1847, with Lord Dalhousie's appointment as Governor General.16
이후 ‘벵골의 아시아 사회 연구(Journal of the Asiatic Society of Bengal)’는 몇 달이 지나기도 전에 오쇼네시가 수행한 실험을 두 개나 더 발표했다. 1839년, 그는 “인도의 훌타(Fulta) 지역에서 전류가 흐르는 배터리를 이용해 성공적으로 진행한 폭발 실험" -- “곡물, 쌀, 럼, 등등”을 싣고 시드니에서 출발한 배가 실수로 배터리 폭탄이 설치되었던 인도 영토에 닿자마자 전복되며 심해속으로 가라앉은 사건 --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실험은 폭발물의 발전으로 받아들여지는 대신에 오히려 훗날 전화기 발전에 큰 공헌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다.
At the Botanical Gardens in Shibpur (he already had cordial relations with the persons in charge, such as Nathaniel Wallich), he experimented with the first telegraph circuit. After laying the cables, the two ends starting and ending where he positioned himself, he used to a pair of modified watches "of the cheapest kind". (This is before his visit to England where he learnt of the Morse.) "Round the second hand was placed a card dial laid off with three concentric circles divided each into twenty parts." He omitted "vowels and superfluous letters" (reminiscent of today’s SMS truncations), and using this he successfully sent across messages. Each signal took about three minutes to transmit, and both watches were "then allowed to run to No. 1 or zero, and stopped".17
쉽퍼르(Shibpur) 지역(오쇼네시가 네이든 왤리치(Nathaniel Wallich)와 같은 관리자들과 이미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지역이라고 한다)의 수목원에서 그는 그의 첫 전화 장치를 실험해보았다. 실험을 위해 그는 시작하는 지점과 끝나는 지점이 그가 서있는 곳에 위 전선을 바닥에 나열하고 “제일 싼 값에 구할 수 있던" 시계에 임의적인 조작을 한 뒤에 연결시켰다고 한다. (당시 오쇼네시는 영국에서 모스코드라는 것이 발명된 사실을 알기 전이었다.) “Round the second hand was placed a card dial laid off with three concentric circles divided each into twenty parts.” 그는 “모음들과 필요없는 글자들"을 잘라냈다고 한다(오늘날 SMS 문자의 시스템과 일부 겹치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준비된 장치들을 이용해서 여러가지 메세지를 보내는 데 성공하였다. 각각의 신호가 전달되는데 까지는 대략 삼 분씩 걸렸다고 하고, 양쪽 시계 모두 “한 번 메세지를 주고받기가 끝나면 1에서 0으로 간 뒤에 멈췄다.”
Diagram of the telegraph system, featured in O'Shaughnessy's "Memoranda relative to experiments on the communication of Telegraphic Signals by induced electricity" in Journal Of The Asiatic Society Of Bengal (1839) — Source
‘벵골의 아시아 사회 연구지 (1839)'에 실린 오쇼네시의 ‘전화 기술에 관련된 실험 회고록(Memoranda relative to experiments on the communication of Telegraphic Signals by induced electricity)’속 그가 그린 전화 체계(telegraph system)의 도표 --- Source
Map of the botanical garden showing the route of the telegraph, featured in O'Shaughnessy's "Memoranda relative to experiments on the communication of Telegraphic Signals by induced electricity" in Journal Of The Asiatic Society Of Bengal (1839) — Source.
해당 논문에 동시에 실린 또다른 사진에는 그가 전화 기술을 실험한 수목원의 지도가 그려져있다. — Source
It is in his work on the telegraph system — and particularly his role in rebuilding it after it was largely destroyed in the Indian Rebellion of 1857 — that we can see more clearly the dubious nexus between such scientific projects and the endeavours of colonialism, a connection made more explicit at moments of political crisis. As far as O'Shaughnessy's contribution to medicine is concerned, its correlation with colonial power is perhaps not as obvious. Yet it does contribute, even if unintentionally to the larger discourse of knowledge/power, relating to what Shiv Visvanathan and Ashis Nandy call the "industrial grid". Western medicine, through sheer claim of objectivity, marginalised traditional, and subsequently termed, "folk medicine", while at the same time deriving its legitimacy on foreign soil from references to indigenous texts and social practices, through Sanskrit and Perso-Arabic scholars and local practitioners. In this regard O'Shaughnessy was no exception. Rather than thinking only of centres (individual or institutional) of knowledge production in the colonies, we'd do better then to focus more on the complexity of networks and exchanges -- the go-betweens, as Kapil Raj calls them -- that played such a key role in the production of the colonial sciences. It is here, in light of such an approach, that the detailed notes left behind by William Brooke O'Shaughnessy prove so invaluable, offering a rare and honest glimpse into how such networks functioned.
그의 손으로 만들어낸 -- 그리고 세포이 항쟁(Indian Rebellion of 1857) 이후에 완전히 망가진 걸 다시 재건축해낸 -- 바로 이 전화시스템이야 말로 정치적으로 우위를 따지고 들며 혼란스러웠던 당시 시기 속에서 권력과 국가를 논하지 않고 서로에게 도움을 준 식민지 과학 속 인물들의 발자취를 되새겨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설령 그가 의학적으로 발산한 영향과 식민지 과학의 연결성은 조금 애매할지 모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의도의 존재여부를 떠나 크게 봤을 때에 힘과 지식의 량에 엄청난 공헌을 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고 이게 바로 시브 비스바나단(Shiv Visvanathan)과 애시즈 낸디(Ashis Nandy)가 “집요한 노력"이라고 말한 개념과 연결되는 부분일 것이다. 객관적으로 모두가 인정하길, 바로 이 시기에 서양의학이 인도에 자리잡고 있던 “민간요법"들을 줄이고 나중에는 결국 종결시켰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산스크리트, 페르시아와 아랍 학자들을 통해 인도의 논문들과 현상들을 참조하는데 도움을 받고 카나비스 인디카 연구의 신빙성을 높여갔다. 이러한 방면에서 오쇼네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식민지 현장에서 정보를 구할 수 있는 대상을 어떤 개인이나 단체로 특정짓지 않고 그는 그만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를 통해 그가 원하는 정보들을 하나씩 발굴해낼 수 있었다. 이 방식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이해해야만이 W. B. 오쇼네시가 우리에게 남긴 귀하고 진실된 자료들을 가치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Sujaan Mukherjee is a Sylff PhD researcher at the Department of English, Jadavpur University. For his PhD he is looking at the role of urban memory in the formation of Kolkata, although his academic interests include physical cultures, Modernism and feminisms. Between 2015 and 2016 Sujaan was an archival fellow with the India Foundation for the Arts, researching visual representations of Calcutta particularly in tourism documents.
수잔 무커지는 자다브푸르 대학(Jadavpur University)에서 영문학 박사과정을 거쳤다. 그의 박사학위를 위해 그는 실제 문화 그자체에 관련된 학위를 지니고 있지만 페미니즘과 콜카타(Kolkata)를 위해 현대 자료들이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연구했다. 2015년에서 2016년 사이에 수잔은 인도 예술 재단(India Foundation for the Arts)에서 자료 수집가 직책을 맡으며 캘커타(특히 관광 자료들을 다루며)를 시각적으로 대표하는 방법을 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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