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The Public Domain Review, "미국을 싸웠던 복서, 존 설리반"

2021. 5. 21. 02:03번역/비문학

미국을 싸웠던 복서, 존 설리반

 

글쓴이ㆍ크리스토퍼 클라인(Christopher Klein)

번역ㆍ오성진

 

1883년,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자 프로복싱 헤비급 챔피언 존 설리반(John L. Sullivan)은 전무했던 미국 전역 투어를 돌며 온국민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가 내건 상금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그는 그와 링 위에서 맞서 싸우면서 4라운드를 버텨내기. 크리스토퍼 클라인(Christopher Klein)은 본에세이에서 존 설리반의 굉장한 여정, 그리고 대중 언론과 철도의 발전이 그가 미국 최초의 스포츠 슈퍼스타가 되는데 과연 어떻게 기여했는지 탐구해본다.

 

원문 게시일ㆍ2014년 1월 13일

 

“존 설리반, 세계 최강의 복서", E.W. 켐블(E.W. Kemble)의 1883년 작품 --- 1883년은 설리반이 그의 미국 투어를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그림 출처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깊은 바다가 존 설리반(John L. Sullivan)의 번쩍번쩍한 술로 가득한 궁전 앞으로 다가왔다. 보스턴 사람들로 이루어진 인파가 한 번이라도 그들의 지역 영웅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머리를 꺾고 넘실대면서 만들어낸 물결은 실로 대단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국을 다스리던 헤비급 복싱 챔피언에게 떠나기 전에 인사말이라도 전하기 위해 너나할 것 없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설리반의 어둡고 날카로운 눈빛은 여기저기 터지는 플래쉬 섬광을 담아내느라 열심이었다. 그의 깊은 보조개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 뒤에 그림자가 미세하게 숨어있었지만 말끔하게 면도한 그의 턱은 화강암처럼 빛났다. 설리반의 깨끗한 피부, 가지런한 치아, 오똑한 콧대는 무지 그 어떤 복서도 무너뜨릴 수 없는 챔피언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울룩불룩한 체형 대신 필요한 근육으로 단단했던 “보스턴 스트롱 보이(Boston Strong Boy)"의 모습은 마치 산업시대가 낳은 복싱 상품과 같았으며 그의 살과 피 안에는 “파괴만을 위한 근사한 엔진"이 날뛰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1883년 9월 26일, 그의 세단 안에서 대중의 끝없는 찬양을 들이켜 마신 뒤에서야 설리반은 차에 올라 인파를 가르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기차로 갈 수 있었다. 열아홉 달 전에 헤비급 챔피언쉽을 장악한 남자는 이전에 많은 여행길에 올라봤지만 그가 이 기차를 타고 첫 발자국을 내딛고 있는 여정은 역사상 그 누구도 근처에 가본 적도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후 여덟 달 동안 설리반은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최강의 선수들을 만나면서 미국 전역을 돌게 된다. 거의 150개가 되는 무대위에서 존은 동료 복서들과 스파링을 하는 동시에 같은 시대에 최고의 쇼맨으로 알려진 P.T. 바넘 (P.T. Barnum)의 것과 대등할만한 쇼맨쉽을 내뿜기도 할 것이다. 당시 헤비급 왕좌를 지녔던 존은 자신과 함께 링위에 올라가 3분 짜리 라운드 네 개를 버텨내기만 한다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당장 1,000달러(소비자물가지수를 통해 따져보면 이는 오늘 날 24,000달러에 달하는 금액이었다)를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내걸었다. 

 

“위대한 존 L. (The Great John L.)”이 미국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전대륙에 알려진 존 설리반의 K.O. (*역주: 투어의 원래 이름은 “knocking out”이었다) 투어는 그 무모함과 컨셉에 있어서 근사한 방식으로 미국의 정신을 보여줬다. 특히나 온세상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그 어떤 허풍쟁이도 4라운드만에 존 설리반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전제는 스물네 살의 남자가 내건 조건 치고는 굉장히 대담하고 특별한 것이었다. 존 설리반은 마치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목소리로 그만의 독립 선언문을 외치는 것 같았다: “내 이름 존 설리반, 나에게 대항하는 멍청한 녀석이 그 누구라도 바로 후회할 수 있게 뭉게주겠어!”

 

 1898년, 4월 23일 토요일에 출간된 폴리스 가젯(Police Gazette)의 1078호권에 수록된 존 설리반의 모습

그림 출처

 

K.O.투어는 9월 28일에 발티모어에서 시작했으며 커넌즈 극장(Kernan’s Theatre)은 경기를 보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온 3,500명의 팬들로 그득했다. 개최일엔 관중에 있는 사람중 그 누구도 쉽사리 설리반이 서있는 링 위로 올라가지 못 했다. 하지만 복싱계에서 빛나는 별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자들과 거대한 별자리, “위대한 존 설리반 자리"가 함께 돌아다니며 미국 모든 동네에서 싸움이라면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유명한 인물들과 대항하는 순간을 앞둔 관중석엔 “휘몰아치는 희열"같은 것이 몰아쳤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아무 적수도 나타나지 않았던 개최일은 그렇게 마무리되면서 존 설리반은 버지니아와 펜실베니아를 향해 몸을 옮겼다. (*역주: 이후로는 한국에는 익숙치 않은 지역명이 너무도 많이 등장해서 역주를 통해 ‘어디에 위치한 어떤 도시다' 같은 설명이나 도시의 원어이름을 일일이 집어넣기는 힘들 것 같단 판단이 들었습니다. 이야기와 가끔씩 들어본 주명이 있기 때문에 연결해서 어디에 위치했겠거니, 생각해주시거나 한 번 검색해서 위치를 대강 파악해보시면서 이 글을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해리스버그, 스크랜튼, 랜캐스터를 지나면서 존 설리반의 부리부리한 두 눈 위에는 그가 거칠 많은 경기장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존은 드디어 펜실베니아의 맥키스포트(McKeesport)시에서 처음으로 첫 도전자를 맞이할 수 있었다. 동네의 싸움꾼이었던 제임스 맥코이(James McCoy)는 꽤 다부진 몸을 가진 사내였다. 제임스의 가슴엔 여러 마리 뱀, 꽃, 그리고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용의 문신이 새겨져있었다. 하지만 160파운드(*역주: 73킬로그램 정도) 사나이의 위협적인 외관이 실제 그의 싸움실력으로 이어지지는 않다는 사실은 금방 밝혀졌다. 제임스가 처음에 약한 블로우를 날리며 경기는 시작됐고 이후로 챔피언이 레프트 잽 하나, 라이트 잽 하나를 뻗은 후에 경기는 순식간에 종료됐다. 이 모든 것이 벌어진건 불과 몇 초가 되지 않았다. “사람이 저렇게 강하게 때릴 수 있을거라곤 상상해본적도 없어요" 라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 제임스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세상에 몇 사람 밖에 못 하는 말을 할 자격이 있죠, 바로 제가 세계 챔피언과 맞서 싸웠다고 말이예요.” 

 

제임스가 말한 이 소감에서 바로 K.O. 투어가 어떻게 신문매체로 하여금 설리반에게, 또 복싱이라는 스포츠에게 일전에 없던 정도의 관심을 쏠리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 세계 최강의 사나이는 대중들에게 스포츠를 가져다 줬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스포츠 세계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Youngstown. Steubenville. Terre Haute.

영스타운. 스튜벤빌. 테레 호트.

 

시카고에서 관중들은 열렬히 경기장에 찾아와줬고 이로 인하여 이틀째 밤만에 경기 소득은 20,000달러에 육박했다. 미네소타주, 세인트폴(St. Paul)시에서 존 설리반은 드디어 그의 체급과 비슷한 자와 겨룰 수 있었다. 게임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존은 상대를 향해 팔을 내뻗었고 182cm, 89kg의 엔지니어 모리스 헤페이(Morris Hefey)는 “도끼에 찍힌 것 마냥 링위에 쓰러졌다.” 도전자는 다시 일어났지만 챔피언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게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30초였다. “번개맞는 기분이 도대체 뭔지 알고 싶다구요?” 라며 모리스는 게임 후에 입을 열었다. “존 설리반과 일 초만 링 위에 서보십시오.”

 

McGregor. Dubuque. Clinton.

맥그레거. 더뷰크. 클린턴. 

 

데번포트의 대장장이이자 “아이오와주의 가장 강력한 사나이"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던 마이크 시한(Mike Sheehan)은 그의 가족에게 챔피언과 맞붙을 것이라고 말을 꺼냈다. 마이크의 과민한 아내는 경기전에 존 설리반을 방문해 그에게 제발 남편과 싸우지 말아달라고 구걸했다. 듣자하니 그 이유가 기가 막혔는데 그녀는 챔피언에게 “우리에겐 다섯 명의 어린 애들이 있어요, 저는 아이들의 아빠가 살인자가 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구요. 그와 싸우게 된다면 그이가 당신을 분명히 죽일거예요"라며 경고했다.

 

이를 듣고 흥미롭다고 생각하게 된 존은 링 위에 입장했다. 경기가 시작하고 존은 도전자의 코를 향해 강한 펀치를 날렸고 마이크 안에 피어오른 놀라움이 순식간에 화로 바뀌었다. 그는 존을 향해 달려들었고 챔피언은 여유롭게 로버트의 턱을 향해 강타를 날리며 그를 링 뒤쪽으로 날려보냈다. 로버트는 그제서야 충분히 혼이 났다고 생각했는지 패배를 인정했다. 존은 괜찮은 승부를 보여준 대가로 100달러를 집으로 돌아가는 로버트에게 100달러를 지불했다. 

 

Muscatine. Omaha. Topeka.

머스커틴. 오마하. 토피카.

 

위대한 챔피언의 열차가 록키 산맥을 지나 콜로라도에 발을 들이민건 크리스마스 시기였다. 이전까지는 없었던 존의 전국투어는 철도 기술의 발전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니언 퍼시픽 철도와 센트럴 퍼시픽 철도가 이어지면서 전국의 철도가 연결된지 겨우 14년이 지난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1870년과 1880년 사이에 미국 내의 철도가 이용된 거리는 50,000 마일에서 두 배에 가까운 87,000마일로 뛰었으며 특히나 서부에서는 총운행거리가 세 배보다 더 높게 뛰었다. 

 

현재는 골든스파이크의 국가 유원지로 지정된 유타주의 프로몬토리 서밋(Promontory Summit)에서 1869년에 첫 대륙횡단 열차의 완성을 축하한 자리를 찍은 사진

그림 출처

 

철도는 황금으로 도금된 미국의 산업 시대의 강력한 힘을 상징했다. “이전의 이 행성의 국가들은 달팽이처럼 기어가는 속도로 발전했지만 현대의 우리는 기차의 힘을 빌려 과거를 번개같이 지나 저 먼 앞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 라고 1880년대의 미국을 들끓게 만든 철강을 사랑했던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가 적었다. 새로 태어난 철도가 지닌 청춘의 불꽃은 존 설리반 마음속에서도 타오르며 그가 “전속력으로 달리는 살아숨쉬는 열차”처럼  살 수 있도록 부채질 했다.

 

더 나아가서 말해보자면, 아마 정말로 존 설리반처럼 그의 시대를 잘 이해하고 온전히 받아들인 미국인은 없었을 것이다. 미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국가였다. 미국의 인구수는 대영제국의 인구수를 곧 따라잡을 추세였으며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산업의 힘을 지닌 나라로 발전하는 선로 위에 서있었다. 온나라는 새로 들어오는 이민자들과 산업, 그리고 전화기와 전구같은 발명품으로 각자의 일상이 나날이 발전하며 요동치고 있었다.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들의 아들, 존 설리반과 1880년대의 미국은 둘 다 젊고 패기 넘쳤으며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며 자만심에 가득하기도 하였고, 예의가 없고 호전적이었다. 자고로 복서란 가장 본능에 가까운 모습으로 힘을 사용하는 이들이었으며 존 설리반은 상승세의 미국, 즉 당시 세계란 무대에서 경제적인 근육을 맘껏 휘두르는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했다. 챔피언은 미국에 사는 이들중 고된 오랜방식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적어지고 현대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는 세계사람들에게 그야말로 미국의 날 것 그 자체인 거친 남성성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신봉하던 사회다윈주의가 적자생존을 주창하고 있을 때, 미국 내에서 그 이론을 제일 잘 보여줄만한 공간은 바로 링 위 였다. 

 

설리반 몸 안에서 전설적으로 피어오르던 아일랜드인의 호전적인 영혼은 그를 그레이트 헝거(the Great Hunger, *역주: 아일랜드에서 병든 감자로 인해 1846년에서 1851년까지 많은 이들이 굶주린 채로 죽었고 160만명에 달하는 인원들이 이민을 갔으며 그들의 행선지는 주로 미국이었다)를 통해 나약해진 2세대 아일랜드인들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영국의 힘에 눌려 몇 세기 동안이나 스스로를 약하다고 여겨 왔던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새로운 고향"에 와서도 1840년에 겪었던 심각한 재난을 통해 머릿속에 새겨진 트라우마와 싸우고 있었다. 이런 그들의 눈 앞에 같은 동포 한 명이 혜성같이 등장해 세상을 향해 힘을 맘껏 발산하고, 자신감과 긍지로 가득 찬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가 발산하는 자긍심은 자신감을 잃고 위축되어있던 그의 민족에게 해독제나 다름 없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노동자들은 챔피언, 존 설리반을 그들과 같이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을 쓰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존 설리반은 K.O. 투어 도중 그들이 12, 14, 16시간씩 교대하며 근무하고 있는 일하는 외딴 곳들을 방문했다. 그 중엔 광산, 벌목장, 또 그들, 켈트족의 성한 구석이 하나 없는 손으로 직접 연결한 철도가 있었다. 

 

“설리반과 아이들"이 로키산맥의 채굴사업으로 유명한 지역들의 작업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와일드 웨스트(Wild West)의 특색있는 공기는 설리반을 따라 움직인 복싱선수들에게 즉각적으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술주정으로 인한 난동이나 싸움의 횟수는 늘어만 갔고 그에 따라 이를 대문짝만하게 알리는 신문의 수도 그 수요에 맞춰 엄청났다. 덴버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도중엔 존 설리반이 장전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더블 배럴 샷건을 가지고 놀다가 동료 선수를 죽일 뻔한 사건도 있었다. 이틀 후, 리드빌(Leadville)에선 술에 취한 존 설리반은 싸우는 도중 휘청거리는 모습을 빈번히 보여주었고 무대 뒤에선 다른 선수와 말싸움이 생겨 그를 향해 등유 램프를 휘두르기도 했다. 대영제국의 빅토리아(Victoria)시에서 그는 “짐승처럼 취한 상태"에 빠져있었으며 빅토리아 여왕을 치켜세우는 도시의 이름에 따라 그녀의 건강을 기리는 축배를 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거부했다. 그에 말에 따르면 그는 “영국 군주의 건강을 기리기 위해 술잔을 드는 아일랜드인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D.A. 사전트(Dr D.A. Sargent)의사의 연구 보고서"에 실린 설리반의 다부진 몸매를 보여주는 이 두 장의 사진은 존 설리반의 자서전, 19세기 글래디에이터의 회고록(Life and Reminiscences of a 19th Century Gladiator, 1892)에 실렸다.

그림 출처

 

존 설리반과 선수들은 1884년 초에 태평양에 들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시간을 보낸 그들은 다시 동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으며 헨젤과 그레텔의 쿠키처럼 그들이 지나간 경로는 깨진 채로 버려진 술병으로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Tucson. Tombstone. Waco.

투스컨. 툼스톤. 와코.

 

설리반이 텍사스의 갤버스턴(Galveston)시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동안 싸웠던 참가자중 가장 상대하기 힘든 도전자를 만났다. 눈길을 사로잡았던 무명베짜기의 이름은 알 막스(Al Marx)였고 그는 텍사스에서 가장 강한 남자로 여겨졌다. 알 막스는 설리반에게 최대한 일찍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했고 둘의 악수가 끝나자마자 설리반의 턱을 향해 강한 주먹을 날렸다. 그 후로도 첫 두 라운드 동안 몇 번이나 강한 블로우를 성공시킨 텍사스의 거인은 드디어 존 설리반이 최대 적수를 만났다고 확신했다. 

 

존 설리반은 경기 전에 술과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세 번째 라운드가 시작한 후에 “카우보이 챔피언"은 진짜 챔피언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고 느꼈다. 존은 “야생의 짐승”처럼 알 막스를 노려봤다. 얼마간 상대를 노려보던 존은 “거인을 공중에서 띄울 정도로 강한 어퍼컷"을 날렸으며 이후 즉시 알의 왼쪽 턱을 향해 강한 훅을 날렸다. 알 막스는 바로 “걸음마를 갓뗀 아이처럼”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순식간에 현장엔 조명이 집중되었고  존 설리반은 있는 힘껏 그를 들어다가 경기장 밑 오케스트라를 향해 패대기 쳤다. 이 일로 인해 두 개의 의자, 바이올린 세 개, 그리고 베이스 드럼이 망가졌는데 이를 본 투어의 재무관리팀 매니저가 즉시 입장료 창구로 달려가서 부서진 드럼을 메꾸기 위한 24달러를 낚아챘다.

 

Mobile. Savannah. Chattanooga.

모빌. 사바나. 채터누가. 

 

멤피스에서 챔피언과 맞서기 위해 링 위에 들어선 인물은 벽돌공 윌리엄 플레밍(William Fleming)이었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존은 도전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존 설리반은 페인트 동작으로 상대방을 속이고 즉시 플레밍의 왼쪽 턱 밑부분을 향해 강한 한 방을 날렸고 윌리엄 플레밍은 그렇게 15분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시간, 고작 2초. 로프 위에 쓰러져있던 그의 몸은 들것에 실린 채 그의 집으로 옮겨졌다.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 눈을 뜬 그는 “설리반과 언제 싸울 수 있소"하고 물어봤으며 그는 바로 “당신은 이미 그와 싸웠습니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제가 그를 짓밟았겠군요?” 아직도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벽돌공이 되물었다.

 

1884년 5월 23일, “설리반과 아이들"은 오하이오주의 톨레도(Toledo)시에 도착했다. 발티모어에서 시작해 떠난 그들의 굉장했던 여덟 달간의 여정의 종착역에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미국의 38개의 주중에 총 26개를 지나왔고 이 중엔 물론 아리조나, 몬타나, 뉴멕시코, 유타, 워싱턴, 그리고 와이오밍도 포함되어 있었다. 존 설리반이 만취한 상태에 보여준 행패에도 불구하고 투어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으며 수많은 사건사고에도 불구하고 존 설리반과 함께 투어를 나섰던 선수들중 어느 누구도 평생 남을만한 상처를 입진 않았다. 어떤 자료에 따르면 존 설리반과 싸우기 위해 링 위로 올라간 도전자의 수는 총 서른아홉 명이었으며 존과 대적할 만한 자는 그 중 한 명도 없었다. 

 

매공연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입장료를 벌어들였는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하지만 설리반은 몇십만 달러가 되는 금액을 챙겼을거라고 예상되고 있으며 그건 당시 대통령 체스터 아서(Chester A. Arthur)의 연봉 50,000달러를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존 설리반이 투어를 통해 벌어들인 액수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확실한 사실은 그가 대륙을 돌아다니며 얻은 팬덤의 크기는 무지막지 했다는 사실이다. “보스턴 스트롱보이"는 그의 자석같은 매력과 용감한 기개를 통해 미국에서 먹히는 카드라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미국인들은 단순히 존 설리반이 복싱하는 장면을 보고 싶어한 것이 아니라 존 설리반이라는 사람, 그 자체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티켓을 샀다. 설리반이 투어의 일련으로 세인트 루이스(St. Louis)에 들렀을 때 그가 야구팀, 세인트 루이스 브라운즈의 친선 경기에 등장해 볼품없는 시구를 다섯 번 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오천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몰려든 적도 있었다. 

 

K.O. 투어를 통해서 존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운동선수가 되었으며 당시까지 살았던 그 어떤 미국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불가능했을 일이었지만 철도와 신문의 발전은 설리반은 몇십 만명의 미국인들을 만나볼 수 있게끔 도와줬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가 되는 것과 동시에 스포츠계가 처음으로 낳은 슈퍼스타였던 그의 명성은 심지어 그가 1892년 헤비급 챔피언을 두고 싸운 경기에서 “젠틀맨 짐(“Gentleman Jim” Corbett)"에게 패배한 후에도 여전했다. 

 

1892년, “더 마스콧”(“The Mascot”) 신문에 실린 설리반과 코벳의 챔피언 벨트 쟁탈전을 그린 커리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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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매스컴"이란 요란스런 기계에 시동이 걸렸으며 존 설리반은 한 번 시동이 걸린 기계를 제대로 움직이려면 어떤 레버를 당겨야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인터뷰를 거절하는 일은 흔치 않았고 그의 인터뷰는 불티나게 팔렸다. 그의 술주정, 여성혐오적인 발언들, 지속적으로 그를 인용하는 경찰 사건 기록부 소식들 모두 매출부수의 전쟁 속에서 싸워야만 하는 대도시 뉴스사에겐 신이 내려주신 선물 같았다. 후대의 많은 후배 선수들이 그랬듯 존 설리반 또한 가끔은 이러한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가 그를 옥죄어오는 것만 같다고 느끼기도 했다. “내가 하는 짓들은 다 이상하게 부풀려진다구,” 라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난 대통령처럼 언제나 대중의 시선을 느껴야만 하는 입장이야.” 하지만 이것 만큼은 그의 얘기가 틀렸는데 그는 미합중국의 위대한 대통령보다 훨씬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존 설리반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어했다. 여성들은 지갑에 넣어다니기 위해 존 설리반의 이발사가 쓸어담은 존의 머리카락을 1달러에 사기도 했으며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나 행진할 때 트는 노래가 존 설리반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지는 경우도 꽤 많았다. “설리반과 악수한 그 손과 악수하게 해줘(Let me shake the hand that shook the hand of Sullivan)”은 당대를 대표하는 유행어였으며 존 설리반이 어디로 가든 모든 사람이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이후 설리반은 남들과 별반 다를바 없었던 그의 커리어에 가장 큰 변환점으로 K.O. 투어를 언급했다. “지금 내게 주어진 명성은 성공적인 투어가 가져다 준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은퇴 후 인터뷰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한건 K.O. 투어는 애초에 이전 시대에서는 물리적으로 실행하기 힘든 계획이었다는 것이었다. 그에겐 K.O. 투어의 성공적 마무리 말고도 시대를 잘 태어난 복도 있었던 것이다.

 

새로이 지어진 철도길은 존으로 하여금 서부 개척지에서 도시화된 지역들까지 모두에게 열렬한 반응을 얻으며 미국 역사에 큰 획을 그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어느날 밤 그는 와이오밍주의 로울린즈(Rawlins)시에 있다가도 다음 날 밤엔 300마일이나 떨어진 솔트 레이크 시티(Salt Lake City)시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존 설리반이 하룻밤 사이에 몇백 마일이나 떨어진 곳으로 여행하며 그를 실제로 마주하고 그가 링 위에서 보여주는 용맹함, 그가 지닌 카리스마를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단 사실은 팬들에게 엄청난 의미를 지닌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 설리반은 미국 전역에서 가장 많이 “실제로 목격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당연히 미국의 대통령보다 많이 노출되었으며 그에게 매료된 팬들은 바넘(Barnum)과 “버팔로 빌(Buffalo Bill)”의 팬들을 합친 것과 비슷한 수였다.

 

1889년, 미시시피주의 리치버그(Richburg)시에서 이루어진 설리반과 제이크 킬레인(Jake Kilrain)의 싸움 장면 -- 역사상 권투장갑 없이 이루어진 마지막 경기였으며 미국에서 처음으로 미디어를 통해 전국민의 주목을 이끈 경기였다.

그림 출처

 

단지 그를 직접 목격한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미디어의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특성이었다. 당시 큰 도시 기저에 숨어있던 독립 언론사들은 미국 전역의 문화를 통째로 흔들고 있던 것이다. 당대 언론계 큰 손이었던 조셈 퓰리처(Joseph Pulitzer)와 찰스 다나(Charles A. Dana)같은 이들은 내셔널 폴리스 가젯(The National Police Gazette)과 같은 타블로이드 신문(Tabloids, *각주: 원래 신문의 절반 사이즈이며 흥미 위주의 짤막한 기사에 유명인의 사진을 크게 싣는 것이 특징이다)이 스포츠 뉴스를 얼마나 잘 담아내는지 주목했으며 그들을 따라 스포츠 뉴스 편집자를 고용하고 그들만의 스포츠 섹션을 실어다가 신문을 발행했다. 

 

설리반이 방문한 대도시엔 열 개 정도가 넘는 수의 일간지를 지원하고 있었으며 새로이 떠오르는 신문들 덕분에 설리반의 경기는 그가 꽂아내린 펀치 하나하나 상세히 전달될 수 있었으며 또한 그가 링 밖에서 한 만행들도 마찬가지로 미국내 전역에 퍼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 위에 몇만 병에 잉크를 매일같이 뿌린 덕에 존의 인기는 나날이 커져가기만 했다. 

 

K.O. 투어에 쏠린 매스컴의 관심과 팬들의 환호는 미래를 조금이나마 예상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어줬다. 교통과 매스컴이 미국을 더 뭉치게 하고 대중매체 또한 발전하면서 현대 스포츠의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그들은 존 설리반 안에서 그들이 떠받들 첫 번째 신을 발견한 것이다.

 

 

 

 

크리스토퍼 클라인(Christopher Klein)은 ‘스트롱보이: 미국의 첫 번째 운동계 슈퍼스타, 존 설리반의 삶(Strong Boy: The Life and Times of John L. Sullivan, America’s First Sports Hero, 2013, Lyons Press)’의 작가이다. 그의 글은 히스토리닷컴(History.com)과 보스턴 글로브(the Boston Globe)에 자주 등장하며 그는 ‘보스턴 하버 아일랜즈’(the Boston Harbor Islands, 2008)와 ‘스포츠 광팬을 위한 보스턴 가이드(The Die-Hard Sports Fan’s Guide to Boston, 2009)를 출간 하기도 했다. 그의 글을 더 많이 보기 위해선 다음 링크를 통해 그의 웹사이트를 방문할 수 있다:  

www.christopherklein.com

 

Home - Christopher Klein

What drove an Irish American army to attack Canada five times after the end of the Civil War? Was this some whiskey-fueled daydream or a serious military operation? How did this band of revolutionaries change history forever? Order the Book! David Rumsey M

christopherklein.com

 

 

원문 출처 : https://publicdomainreview.org/essay/john-l-sullivan-fights-america/

 

John L. Sullivan Fights America

In 1883, the Irish-American heavy-weight boxing champion John L. Sullivan embarked on an unprecedented coast-to-coast tour of the United States offering a prize to any person who could endure four rounds with him in the ring. Christopher Klein tells of thi

publicdomainreview.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