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The Public Domain Review, "고래잡이의 미학:난터켓 고래잡이 배에서 발견된 항해일지 속에서 숨어있던 그림들"

2021. 5. 14. 17:48번역/비문학

고래잡이의 미학:

난터켓 고래잡이 배에서 발견된 항해일지 속에서 숨어있던 그림들

 

글쓴이ㆍ제시카 보열(Jessica Boyall)

 번역ㆍ오성진

 

19세기의 고래잡이는 잔인무도했다. 그 곳엔 고래 지방기름과 피가 넘쳐났으며 안타깝게 죽어나가는 생명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고래가 나타났다!(there she blows!)” 하고 미친듯이 외쳐대는 사이, 선원들에게는 새로운 것을 창작할 시간 또한 충분했다. 제시카 보열은 본에세이에서 난터켓(Nantucket)선의 고래잡이꾼들이 남긴 항해일지와 일기를 들여다보며 그들의 그림들을 탐구해보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원문 게시일ㆍ2021년 1월 13일

 

워싱턴(Washington)호에서 발견한 일지 속 고래사냥을 묘사한 그림 -- 제임스 커핀(James G. Coffin, 1842-1844)이 보관하고 있는 중이다.

그림 출처

 

케이프 코드(Cape Cod, Massachusetts)에서 대략 30마일 정도 떨어진 섬 난터켓(Nantucket), 유럽 이주민들이 처음으로 이 곳에 정착한 건 1659년이었다. 그들은 집을 지었고, 퀘이커 예배 집회장을 지었으며 가축을 키울 만한 목장을 지은 후에야 강하고 신속하게 서서히 섬을 식민지화 하기 시작했다. 난터켓 지역엔 당시 2,500명 정도로 구성된 왐파녹(Wampanoag) 부족이 지내고 있었는데 그들의 언어로 난터켓은 “머나먼 땅" 또는 “그 누구도 원치 않는 불모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 정복을 해낸 유럽인들은 불어나는 인구수를 감당할만한 농작물을 키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난터켓이 가진 의미를 몸소 깨닫게 된다. 그들은 대안책으로 바다를 가리키게 된다. 이는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벌어진 일이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도시 행정 위원들이 동산을 올라 남쪽 해안을 가리키면서 그들은 바다로 손가락을 카리키면서 정해진 일이었다. 동산의 정상에서 그들이 본 건 다름아닌 고래였는데, 고래들은 대서양의 표면을 부수며 바깥으로 몸을 내밀고 있었으며 이를 본 그들은 “저것이 바로 우리 자식들, 손자들의 배를 달래줄 초록빛 초원이 아니면 뭐겠소!”하고 외쳤다. 

 

그들이 내뱉은 예언은 난터켓이 그 후로 이백 년 남짓한 시간동안 전세계의 고래 시장을 장악함으로써 그대로 이루어졌다. 1851년 출판된 허먼 메빌의 책 모비딕에 나온 대사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경탄을 금치 못 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다로 둘러싸인 섬, 난터켓에서 태어난 자들이 생을 위해 바다로 달려가는 데에는 어떠한 놀라움이 있는 것일까! ...(중략)... 그래서 이렇게 많은 난터켓인들이 나왔구나. 그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전사들처럼 호기롭게 바다로 나와 해상세계를 정복하고 있다. (What wonder, then, that these Nantucketers, born on a beach, should take to the sea for a livelihood! … thus have these naked Nantucketers, these sea hermits, issuing from their ant-hill in the sea, overrun and conquered the watery world like so many Alexanders)” 

 

고래잡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난터켓에서 이루어진 포경은 허먼 메빌이 그의 경험에 빗대어 써내려간 방식과는 많이 달랐다. 처음에만 해도 고래잡이는 난터켓 해안 가까이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고래의 위치를 전망할 수 있는 지점이 다 알맞은 높이를 지녀서이기도 했다. 고래 관측은 11월에서 4월 사이에 아무 때나 이루어지곤 했는데 그 이유는 알맞은 고래들이 -- 당시 그들에 따르면 잡기에 알맞은 고래라고 불린 고래들이 -- 북대서양에서 서식하는 시기를 거치고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고래들의 이주 경로는 난터켓 섬에서 몇 마일 정도만 떨어져있었다.

 

1782년 어느 지도에 그려진 난터켓 섬은 수상할 정도로 고래와 많이 닮아있다.

그림 출처

 

고래가 한 번 포착되면, 노동자로 붙잡힌 왐파녹 부족민이나 난터켓의 원주민들을 포함한 여섯 명의 선원들은 사냥감을 덮치기 위해 20피트 정도되는 길이의 삼나무 배에 올라탔다. 고래를 한 번 따라잡으면 보통 보트 위 사람들이 고래를 향해 작살을 던지고 기나긴 추격 후에 지친 고래는 죽게 된다. 고래잡이꾼들은 죽어버린 거대 생명체를 항구 쪽으로 끌어온 뒤에 가죽과 기름을 떼어내고 나머지 시체를 트라이하우스(try-house, *역주: 고래의 지방을 기름으로 추출시키고 정제시키는 장소를 일컫는 말)로 이송시켰다. 트라이하우스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기름으로 사용하기 위해 고래 지방을 끓이고, 식힌 뒤에 관 안에 보관하였고 이렇게 보관한 관들은 뉴욕, 보스턴, 그리고 다양한 도시의 시장에서 살을 발라낸 고래 뼈와 함께 팔았다.

 

이러한 방식의 해안 포경법은 잔인하고, 돈이 많이 들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지속가능하지 않았다. 1730년이 되어서는 난터켓과 케이프 코드 주변 해안가에선 너무 많은 포경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로 인해 고래의 수는 심각하게 줄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시 난터켓의 고래 시장은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북대서양에서 이루어지던 네덜란드인들의 포경 횟수는 쇠퇴한데 더불어 영국과 미국에서 눈에 띄게 늘어난 기름의 수요로 인하여 1725년도에 8파운드 스털링의 값어치를 하던 고래기름 가격은 1730년대에 이르러서는 10파운드로 뛰어올랐다. 시장에서 맛본 좋은 성과를 통해 확실히 동기부여된 상인들은 돛이 하나밖에 없던 보트들을 더 낫게 개선시키고 조금 더 나은 선원들을 구성하여 사냥감을 쫓아 북쪽에 있는 더 깊은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더 깊은 바다로의 항해를 위해선 선원들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는데 이는 때때로 고래잡이꾼들이 바다에서 4년의 시간까지도 써야했음을 의미했다. 이로 인해서 글과 그림이 담긴 두 가지 종류의 기록물이 생겼고 그 첫 번째는 항해일지였다. 업무상의 이야기가 담긴 이 문서에는 배의 원래 주인들에게 넘겨주어야 할 행정/재정 상황이 적혀있어서 굉장히 지루했고 주로 선장과 1등선원이 보관하곤 했다. 두 번째는 비공식적으로 선원들이 적어내린 일기였는데 이 문서는 거의 선상의 모든 이들이 지니고 있었다. 선원들은 해상에서의 삶을 지루해하며 가끔 광적으로 돌변하기도 했지만 몇 달동안 바다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들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예술적으로 해보고 싶었던 다양한 창작활동을 해볼 시간을 즐기기도 했다.

 

그 중 하나는 스크림섄더링(scrimshandering)이었는데, 이는 바늘이나 잭나이프를 이용해 고래의 이빨 또는 바다코끼리의 엄니에서 뽑아낸 뼈나 상아에 그림을 새겨넣는 행위였다. 조각 세공품에 담겨진 그림들의 주제중엔 고래잡이를 하는 장면이나 배, 사랑하는 이들의 초상화, 심지어 프리메이슨의 엠블렘도 있었다. 

 

에드워드 버뎃(Edward Burdett)이 극적인 고래잡이 장면을 새겨둔 이 수공예품은 난터켓 고래잡이 박물관(Nantucket Whaling Museum)에서 보관중이다. 1805년, 난터켓에서 태어난 버뎃은 17살이란 나이에 처음으로 고래잡이 배에 올라탔다. 십 년이 지난 후 갑판 선원의 직책을 맞게 된 그는 비통한 죽음을 맞게 된다. 그의 두 발이 갑판에서 튀어나오던 작살에 꽂혔고 그렇게 에드워드는 그 길로 바다에 빠져 익사했다.

그림 출처

 

선원들의 예술성은 또다른 삼차원적인 매개체 대신 종이에서 분출되기도 했다. 사상은 서로 다를지라도 선원들의 항해일지와 일기들은 주로 선상에서의 삶, 집과 멀리 떨어진 장소, 그리고 가장 많게는 고래를 묘사한 그림으로 가득했다. 난터켓 역사 연합(Nantucket Historical Association)에서는 몇백 개가 넘는 사료들을 디지털화 한 자료와 함께 원본들 또한 보관중이다. 1840년대부터 선별된 이 자료들은 난터켓 고래잡이를 특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시점을 제시해준다. 

 

선상에 직책을 맡고있던 이들은 항해일지를 실용적인 목적으로 다양하게 써왔는데 그 방법으로는 고래의 다른 종을 기록하거나 죽인 횟수나 경관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인디안 추장’(Indian Chief)호에서 발견된 토마스 블룸필드(Thomas Bloomfield)의 일지는 세세하게 그린 고래들과 각각의 고래가 포착되었던 좌표가 낱낱이 적혀있다.   

 

‘인디안 추장’호에서 발견된 항해일지(1842-1844)에 실려있던 고래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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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안 추장’(1842-1844)에 실린 또 다른 고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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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일지엔 도장 자국들도 많이 새겨져있었는데 이 도장들은 나무나 상아, 또는 뼈를 깎아 만들었었다. 서로 다른 도장들은 각각 다른 종을 상징하며 제각기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들어 고래 꼬리에 갈라진 부분을 그린 그림은 고래의 발견을 의미했으며 고래 전체가 통째로 그려졌을 경우엔 고래를 살육했다는 신호였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역주: 프랑스의 기호학자)마저 좋아할 정도의 이 시각적 어휘들은 본래 선박의 주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오로지 얼마나 많은 고래들을 발견했고 사냥했는지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필기체로 가득한 두꺼운 항해일지를 한 장 한 장 넘겨볼 바에는 이렇게 도장이 시각적 기호로 쓰인 책을 더 선호하곤 했다.

 

알라바마(Alabama)호에서 보관하고 있던 항해일지 면지에 그려진 고래도장 --- 바커 마셜(Barker B. Marshall, 1846-1850)가 보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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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인 기록들을 제외하고선 많은 일기들 안에 수록된 그림들은 주로 여행의 즐거움을 담아내고 있었고 고래 사냥은 그들이 자주 이용하던 주제중 하나였다. 심해속 고래를 사냥하는 일은 표면에 올라온 고래를 사냥하는 일과 많이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더이상 그 대상이 더이상 일전에 사냥하던 알맞은 고래가 아니라 향유고래(Sperm whale)였다는 점에서 달랐다. 향유고래는 몸에서 내뱉는 기름, 즉 체유의 질이 다른 고래들의 것보다 좋다는 이유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며 향유고래의 머리속에서 구할 수 있는 밀랍같은 질감의 귀한 액체, 경랍(spermaceti) 또한 그만의 높은 질로 유명했다.

 

항해일지에 따르면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한 번 고래가 발견되면 선원들은 선박에서 고래잡이배를 낮춰 물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조절했다. 선박은 하나 당 고래잡이배를 다섯 척까지 보유할 수 있었는데 그 위치는 좌현에 하나, 우현에 하나, 머리에 하나, 허리에 하나 그리고 가끔은 머리의 오른편에 한 척을 보관할 때도 있었다. 각각의 고래잡이 배에는 그 배를 담당하는 선장이 있었으며 노를 젓는 인원은 최대 다섯 명까지 두곤 했다.

 

수잔(Susan)호의 루벤 러셀(Reuben russell)이 보관하고 있던 항해 일지 속 “난터켓 방식의 썰매타기"라는 그림 (1841-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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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른 “난터켓식 썰매타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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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서 이루어지는 고래잡이와 마찬가지로 해저에서 벌어지는 고래사냥의 주요한 요점은 긴 밧줄에 연결된 작살로 덮치기 전에 최대한 거대한 포유류 옆에 가까이 가는데 있었다. 한 번 철제작살이 짐승의 살점 안에 박힌 뒤에는 두 가지 일이 벌어졌다. 첫 째는 고래의 급작스러운 죽음이었고 둘 째는 -- 이게 더 일반적인 결과였는데 -- 고래가 도망치는 거였고 이 때가 되어서야 바로 위 그림에서 나타난 “난터켓식 썰매타기"가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추격전 속에서 광폭해진 고래는 보트에 몸을 부딪히기도 하며 다양한 반응을 보이다 결국엔 제 풀에 지쳐 흉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곤 했다. 

 

포경의 성격중 하나인 잔혹성은 보통 항해일지나 일기 속 그림들에선 잘 표현되지 않았다. 기록 속의 그림들에서는 인간의 표정을 지닌 고래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밝은 웃음을 짓는 모습으로 잔인한 피와 상처를 대체하고 있었다. 어쩌면 잔혹하게 시행되던 고래사냥은 난터켓 사람들의 퀘이커 방식의 삶, 즉 평화주의와 비폭력을 기반으로 둔 삶과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어울릴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수잔(Susan)호의 루벤 러셀(Reuben russell)이 보관하고 있던 항해 일지 속 "즐거운" 모습의 고래들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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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사냥의 성공여부는 보통 고래가 얼마나 순종적인지에 따라 갈렸다. 운좋게도 보통 거대한 생명체는 순한 성격을 보여주었지만 가끔 몇몇 고래는 감당 못할 정도의 공격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공격적인 고래들의 대표적인 사례중 하나로는 1819년 8월 12일 난터켓에서 출항한 에섹스(Essex)호를 무너뜨린 야수였다. 선장 조지 폴라드(George Pollard)와 열여덟 명의 선원들은 2년 반을 해상에서 보낼 예정이었지만 1820년 11월 20일, 큰 사고를 당하게 된다. 이 날 선원들은 향유고래 떼를 발견한다. 고래잡이배는 탐욕스러운 출항을 시작했고 몇몇 새끼 고래들을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그 중 하나가 고래잡이배에 머리를 부딪히면서 도주를 시도했는데 이 때 바로 선원중 하나가 에섹스호의 머리맡에서 이상한 모양이 서서히 드리우는 것을 발견한다. 그 모양은 거대한 향유고래였는데 어림잡아도 85피트(25.908미터)의 길이와 80톤은 족히 되는 무게를 지녔었다.

 

에섹스호의 첫 선원, 오웬 챈스(Owen Chanse)는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도 눈 감으면 녀석이 분노에 차올라 턱주가리를 앙다물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요"라고 입을 떼며 당시의 목격담을 이어간다.

 

“내가 평소에 알던 고래의 그것보다 열 배는 더 되는 분노와 복수심에 가득한 모습이었어요. 사방팔방 물이 튀겼고 그 놈은 흰 거품을 물고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어요, 꼬리를 무식하게 휘두르면서 말이죠. 그 놈 머리가 반 정도 물밖으로 나와있었는데 그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다가와 배에 있는 힘껏 머리를 박았어요.”

 

거대한 향유고래와 대치하고 있는 에섹스호의 그림 -- 당시 선원이었던 토마스 닉커슨(Thomas Nickerson)이 훗날 고래잡이 일을 그만두고 개인적으로 그린 그림이며 그는 50년이 지난 후 에섹스 호의 몰락(The Loss of the Ship “Essex”, 1876)이란 책을 통해 그가 겪었던 고충과 해상에서의 삶을 적은 책을 출간했다.

그림 출처

 

성난 고래는 에섹스호에 두 번이나 들이박았고 그 결과로 배는 해상에서 남미의 서쪽으로 이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으로 함몰시켰다. 선원들은 세 척의 통통배에 올라타 겨우 시간내에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여덟 명의 선원들은 다른 일곱 명을 먹어서 생존해야만 했고 누가 죽고 누가 살지는 제비뽑기를 통해 결정했다. 

 

오웬 챈스의 목소리로 들려준 에섹스호의 참담한 이야기는 훗날 허먼 멜빌이 미국에 남긴 역작, <모비딕>의 절정부분이 쓰이는데 큰 영감을 주었다. 모비딕은 반(反)영웅(anti-hero) 아합 선장(Capt. Ahab)을 앞세워 그가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딕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보여준다. 삼 일동안 이루어진 사냥은 결국 모비딕이 소설상의 포경선, 피콰드(Pecuod)호를 쓰러뜨리면서 끝이 나고 소설은 그  후로 이스마엘(Ishmael),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자 생존자가 바다에 떠있는 모습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수잔 비더 (Susan C. Austine Veeder)가 소유했던 포경 일기의 표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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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항해가 어둡기만 한 건 또 아니었다. 어떤 항해는 가끔씩 여자도 배에 타고 세계를 여행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수잔 비더(Susan C. Austin Veeder)는 처음으로 남편을 따라 출항하게 된 여인들 중 한명이었다. 그녀를 바다로 이끈건 아마 여행을 동경하는 마음이 가장 컸을 것이다. 다음 여정에선 남편이 선장직을 내려놓고도 그녀는 폴리네시아 여인과 눈이 맞아 함께 출항하고 그 길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1848년 9월에 출항해 1853년 3월에 난터켓으로 돌아온 나우티콘(Nauticon)호에서 보낸 수잔의 여정은 그녀를 대서양을 지나, 케이프 혼(Cape Horn)을 둘러, 타히티, 오아후(Oahu) 섬(*역주: Hawaii 제도의 4개 주요 섬의 하나), 칠레에 위치한 항구들과 대서양 최북단에 있는 북극의 폭스 섬(Fox Islands)까지도 구경시켜주었다. 그녀의 일기는 간결한 문체와 비효율적인 언어를 사용하긴 하지만서도, 그녀가 다녀온 장소들을 멋지게 표현한 그림들로 가득했으며 그녀는 새로운 곳을 방문할 때마다 매순간 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증명해낸다.

 

수잔 비더 (Susan C. Austine Veeder)의 포경 일기에서 발췌한 두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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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괴롭히는 배멀미와 썩은 고래살의 악취로 그득한 수잔의 여행기는 분명 전반적으로 행복하기만 했던 여정은 아니었다. 나우티콘호에서 생활한지 몇 달이 되었을 때, 그녀가 “돼지처럼 자란다고” 표현한  “9파운드 정도 되는 썩 괜찮은 딸”을 낳았다. 아이가 태어난지 14개월이 지났을 때 수잔은 타히티에 들려 아이의 잇몸을 봐줄 의사를 만났다. 수잔의 말에 따르면 의사는 아이의 잇몸에 하얀 가루를 발랐으며 아이는 명백히 의사가 바른 독에 의해 죽었다. 이후 수잔은 바로 난터켓으로 돌아가진 않았지만 그녀의 상실에 의해 많이 위축된 모습을 일기에 담아냈다.

 

모두에게 수잔이 겪어야만 했던 만큼의 안타까운 서사가 주어진 건 아니었지만 가족을 상실한 아픔은 난터켓 고래잡이꾼들의 기록속에 너무도 많이 등장하는 주제중 하나였다. 리차드 깁스 주니어(Richard C. Gibbs Junior)가 그의 아버지가 선장직을 맡았던 난터켓(Nantucket)호에서 쓴 일지를 보면 청소년기에 모두가 느꼈을법한 걱정거리들이 적혀있다. 리차드가 어머니 아미라(Almira)와 아버지 리차드 깁스 시니어(Richard C. Gibbs Senior)를 따라 1855년 6월에 출항한 난터켓호에 올라섰을 당시 나이는 13살이었다. 그의 일지에는 리차드는 아버지의 기대치에 맞는 삶을 살지 못 할까봐, 일지를 작성해야 하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 할까봐 겁먹은 모습을 보이고 스스로 발전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여실히 나타나있다. 이러한 감정들은 일지의 표지 뒤에 있는 면지에 나타나있는데 이 장엔 어린 리차드가 짙은 검은 글씨로 “HOPE(희망)”이나 주홍글씨로 적어내린 “BLOOD(핏빛)”와 함께 그가 그린 닻, 배, 그리고 고래를 그린 스케치가 있다. 

 

리차드 깁스 주니어(Richard C. Gibbs Jr.)가 난터켓호에서 책임진 항해일지상 면지에 끄적인 낙서들 

그림 출처

 

리차드는 그와 그의 가족의 삶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두고 계속해서 한탄했다. 그 문제점으로는 주기적으로 고래를 잡는데 실패한다는 점과 그로 인해 생활비를 계속해서 만들어낼 여건이 안 된다는 점이 있었다. 1840년이 되어서 세계에서 포획된 고래의 수가 급증하면서 더이상 고래 시장은 적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게 되어버렸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펜실베니아의 유전에서 흐르는 석유와 그 석유에서 나오는 등유의 수요가 급증하던 추세가 겹치면서 북미쪽 고래 시장은 막심한 손해를 보게 되었다. 1846년의 벌어진 대화재사건(The Great Fire, *역주: 난터켓에서 발생한 대화재)과 미국 남북 전쟁과 같은 1870년대부터 발생한 여러 사건들까지 생겨난 후에 난터켓은 역사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경제적으로 그 어떤 지역 사업도 고래 시장이 차지하던 자리를 메꿀 수는 없었기에 1840년부터 1870년 사이, 난터켓의 인구수는 10,000명에서 4,000명에 가까운 수로 추락한다. 난터켓의 좋은 날은 이제 고래등에 탄 채로 물 건너 간 것이다.  

 

그렇게 단단하게만 보이던 난터켓 섬의 고래잡이에도 맹점이 있단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 누구도 고래잡이가 누린 황금기를 잊지 못 할것이다. 당시 기록은 고래잡이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이 작성해온 기록들과 일기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기록상의 그림들은 난터켓 사람들의 특별한 삶과 창의력을 낱낱이 보여주는 민속적인 예술의 형태를 취했으며 “기름진 운”이 다 새어나가기 전의 당대 상황을 잘 묘사했다.

 

 

 

제시카 보열(Jessica Boyall)은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연구가이자 작가이다. 그녀는 현재 그녀가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미술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에서 연구가로 복무했던 경력과 영화와 텔레비전의 역사를 꿰고있는 전문성을 살려 런던 대학교 (the Department of Media Arts at Royal Holloway, University of London)에서 박사학위 수여 후보중 한 명으로 등록되었다. 그녀는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며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런던에 위치한 디자인 미술관(the Design Museum)에서 카탈로그를 편집하고 런던 미술관(Museum of London)에선 전시 큐레이션을, 미술과 문학에 대한 글을 아트유케이(ARTUK)와 가디언(The Guardian)과 같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발표했다.

 

영어 원문 출처: https://publicdomainreview.org/essay/the-art-of-whaling

 

The Art of Whaling: Illustrations from the Logbooks of Nantucket Whaleships

The 19th-century whale hunt was a brutal business, awash with blubber, blood, and the cruel destruction of life. But between the frantic calls of “there she blows!”, there was plenty of time for creation too. Jessica Boyall explores the rich vein of 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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