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5. 14:10ㆍ번역/비문학
흑사병과 페트라크:
역병의 시대의 사랑, 우정, 죽음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
글쓴이ㆍ폴라 핀드렌(Paula Findlen)
번역ㆍ오성진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학자였던 프란체스코 페트라크(Francesco Petrarch)는 역사상 가장 위험했다고 일컬어지는 흑사병, 그러니까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2억명이란 사상자가 발생한 14세기를 살아냈다. 편지들과 더불어 그가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준 페트카르 특유의 문서들을 통해 폴라 핀드렌(Paula Findlen)은 그가 어떻게 시간을 기록하고 당대를 향한 경의를 표하며 사랑하는 사람들 중 숨을 거둔 이들을 두고 애도하는지 탐구하며 이를 통해 이 기록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줄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원문 게시일ㆍ2020년 6월 11일
코로나 바이러스가 팽배한 올해를 우리는 훗날 어떻게 돌아볼까? 이탈리아의 인도주의자이자 시인이었던 프란체스코 페트라크(Francesco Petrarch)는 자신의 길고도 흥미로웠던 인생의 말년인 1374년에 그는 자신이 살던 사회가 25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세기간 겪었던 것중 가장 강력했던 이 전염병”과 함께 살아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가 수많은 친구들과 가족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으며 세상을 떠난 인물들중 많은 이들이 전염병에 걸려서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 축복인 동시에 저주와 같았다.
그의 시대에서 가장 타고난 이야기꾼중 하나였던 페트라크는 1346년에서 1353년에 있었던 전염병, 그리고 그 병이 사라졌다 싶으면 주기적으로 다시 돌아오던 시대를 이겨낸 같은 세대의 전염병 생존자들을 대표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솜씨좋게 동시대 사람들이 겪어야만 했던 비참함을 가장 개인적이고 의미있는 방법으로 당대에 전반적으로 공유되던 고통과 상실을 잘 표현해냈다. 1348년, 전염병이 이탈리아 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페트라크의 친구 지오바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는 그의 책 데카메론(Decameron)에서 100가지 이야기를 통해 전염병이 득실거리는 도시에서 도망쳐 나온 젊은 플로렌스인들을 그려냈다. 페트라크는 몇 세기 동안 겪은 바를 적어내렸는데 그는 이 글을 통해 이러한 현상에 의해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자신의 심리에 관해 자세히 탐구했다. 흑사병은 다양한 형태로 페트라크가 사는 지역에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으며 이를 통해 페트라크는 삶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 동시에 연약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는 커다란 질문들을 지니게 되었고 언제나 그에 대한 답을 갈구했다.
“1348년은 외로운 우리에게서 희망을 앗아갔다”, 라고 페트라크는 ‘편지들' (Familiar Letters, 1361)의 제일 첫부분에서 밝힌다. ‘편지들'은 그가 친구들과 당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선별하여 출판해낸 프로젝트였다. 수많은 죽음 다음에 남은 생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경험이 페트라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변화시켰나? 그랬다면 그건 더 나은 방향으로의 변화였나? 사랑과 우정은 전염병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수 있나? 페트라크가 품고 있던 질문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에 대해 과연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를 통해 페트라크는 당시 사람들에게 여러 방면의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줬으며 묵묵히 시대상을 그려내기 위해 책임감을 고스란히 느끼며 글을 써내려 갔다.
페트라크가 한 곳에 오랜 시간 머물지 못하는 방랑자임을 모르는 자는 당시에 몇 없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고독한 시간을 보내기 시골에서 지내다가 또 도시의 삶을 누리기를 반복했고 그의 특이한 주거방식은 전염병이 퍼진 당시에도 여전했다. 이러한 노마드식 삶은 그에게 전염병이 유행병으로 진화했는지 독특한 방식으로 담아둘 수 있는 시점을 안겨주었다. 1347년 11월 말, 제노바(Genoa)에서 온 배들이 메시나(Messina)로 유행병을 안겨다준 지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에 페트라크는 제노바에 있었다. 병은 땅과 바다를 통해 빠르게 전염되었으며 -- 벼룩과 쥐도 이에 한몫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단순히 공기의 오염으로 인해 생겨난 병으로만 오인하고 있었다. 페트라크가 병의 진행방향을 파악하고 있었단 사실은 그가 1348년 4월 7일 베로나(Verona)에서 적은 편지에 선명하게 적힌 “올해의 전염병이 발생하고 난 뒤로 전세계가 무너지고 있으며 이는 해안가를 타고 퍼져가는 것 같다"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으며, 그 편지는 그의 고향인 투스카니로 돌아오라는 플로렌스에 사는 친척의 초대를 거절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었다.
며칠뒤에 아직 전염병이 닿지않은 파르마(Parma)로 몸을 옮긴 페트라크는 그의 친척이자 시인인 프란체스치노 데글리 알비치(Franceschino degli Albizzi)가 프랑스에서 돌아오던 도중 사보나(Savona) 지역의 리구리아(Liguria) 항구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페트라크는 친척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며 “이 역병의 해”가 견디기 힘들다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토로했다. 그는 전염병이란 것이 원래 널리 퍼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 생겨나는 죽음을 이렇게 피부에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가 죽는 모습은 상상해본 적 조차 없다.” 이렇게 친척의 죽음을 마주한 시점에 전염병은 드디어 페트라크만의 개인적인 세계 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페트라크의 삶엔 점차적으로 공포, 슬픔, 그리고 두려움이 더해졌다. 죽음은 그의 주변에 갑작스럽게 찾아오기를 반복했다. 6월엔 그의 집에 저녁을 먹기 위해 찾아온 친구가 다음 날 아침에 죽은 채로 발견되었으며 그 후로 그의 나머지 가족들도 친구의 뒤를 따라갔다. 이 경험의 이상함을 담아내기 위해 적어내린 “그에게(To Himself)”라는 시에서 페트라크는 장례식과 빈집으로 가득찬 도시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겪어내야 했던 참혹함을 도무지 상상하지 못하는 미래를 묘사했다.
페트라크는 가장 친한 친구들과 전염병이 도진 도시들로부터 도망치는 계획을 세웠다. 그렇지만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가던 도중 나타난 노상강도가 그중 두 명을 공격하고 한 명을 살인하기까지 하면서 결국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남은 생존자들이 하나같이 그들의 이상적인 계획에 있을 수 밖에 없는 문제점을 인식했기 때문일 터였다. 1348년의 7월엔 페트라크에게 가장 중요했던 후원자, 카디널 지오바니 콜로나(Cardinal Giovanni Colonna)가 전염병에 의해 죽었으며 그의 도움을 받던 아비뇽 지역의 유서 깊은 로마가의 많은 이들도 그를 뒤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페트라크는 직업을 잃었으며 그 어느 때 보다도 힘이 없었고 불안정한 상태에 다다랐다.
“친구들의 부재"는 페트라크에게 엄청난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우정은 그에게 즐거움이자 슬픔이었던 것이다. 그는 전염병으로 발생한 상실을 살아남은 자들과 죽은 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을 통해 메꿔보려 노력했으며 이들 중 가장 괜찮은 편지들을 골라 출판을 준비했다. 이메일, 휴대폰, 그리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거의 즉각적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오늘 날엔 당시 편지가 멀어진 사회적 거리를 줄이는데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쉽게 놓칠 수 있다. 페트라크가 영웅으로 섬겼던 로마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가 남긴 유명한 말처럼 "편지들은 현재의 빈 공간을 채워준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편지는 가끔씩 페트라크의 화를 부르기도 했는데 그는 친구들이 답장을 일찍하지 않을 경우엔 그들의 생존여부를 궁금해하며 많은 걱정에 휩싸여야만 했다. “어서 답장을 보내주어 이 두려움들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시오”, 1348년 9월에 페트라크는 소크라테스라는 별명을 가진 그의 가장 친한 친구(벨기에 베네딕트회 수도사였으며 성가대 활동도 겸한 러드위그 반 켐펜--Ludwig van Kempen)에게 재촉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현재 돌고 있는 유행병이나 오염된 공기의 전염성이” 또다른 예상치 못한 죽음을 야기시킬 수 있다며 걱정했다. 소통은 빠르지 않았을지 몰라도 매우 효과적인 동시에 결과적으로 서로를 안심시켜주었다.
끔찍한 해의 막바지에 페트라크는 전염병의 일차 공격을 버텨낸 사람들은 더 강력하게 돌아올 두 번째 공격에 맞설 준비를 해야한다고 예측했다. 이 예측은 결과적으로 잘 맞아떨어졌다. 돌아오는 해에도 페트라크는 꾸준히 전염병으로 생겨난 피해자의 수를 적었으며 격리생활과 인구의 감소로 축적된 영향들을 기록했다. 페트라크는 프랑스에서 알고 지내며 사랑했던 여인, 로라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는 시를 적었다. 그리고 그 시를 전해받은 투스카나 지역의 시인 세누치오 델 베네(Sennuccio del Bene) 또한 전염병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페트라크는 혹시나 그가 쓴 문장들이 병을 옮겨다준 건 아닌지 걱정하며 슬퍼했다. 하지만 페트라크는 또 다른 시를 써야만 했다. 초반엔 그에게 말도 안 될 만큼의 고통을 안겨다 준 집필활동은 점차적으로 그에게 살 수 있도록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삶은 잔인해졌고 주변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죽음은 그보다 더했지만 페트라크는 기도와 더불어 그에 대처할 유용한 무기로써 펜을 선택했다. 다른 이들은 그에게 자가격리나 아예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를 권유했지만 페트라크는 유행병이 감도는 시기속에서 고뇌하며 글을 적어나가는 방식으로 이겨내고 싶어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페트라크는 현저히 적어진 도시 속 사람들의 수를 봤고, 시골에선 척박해진 땅을 보았으며 “병들고 죽어가는 세상”에 씌워진 걱정과 한탄들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1349년 3월에 그는 파도바(Padua) 지역에 머물렀다. 어느날 밤, 그가 주교와 식사를 하던 도중 두 명의 수도사가 뛰어 들어와 프랑스의 어느 수도원에 전염병이 득실거린다는 뉴스를 보고했다. 수도원장은 부끄럽게도 도망쳤으며 남아있던 35명의 수도사들은 한 명을 제외해놓고서는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이렇게 페트라크는 그의 남동생이자 현재 우리에게 용기와 헌신으로 기억되는 게라르도(Gherardo)가 그 전염병으로 이루어진 홀로코스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페트라크가 1347년에 들려 그의 책, '종교적 레저에 관하여'(On Religious Leisure)를 집필해낸 미윤-레-몽트리유(Méounes-lès-Montrieux)의 은신처는 아직도 존재한다. 그 곳에서 페트라크는 게라르도에게 형제애를 담아 집안에 전염병을 이겨낸 영웅이 있단 사실을 공표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부쳤다.
1350년의 10월, 페트라크는 플로렌스로 거처를 옮겼고 이 곳에서 처음으로 그의 절친한 친구 보카치오(Boccaccio)를 만나게 된다. 이 시기 즈음의 플로렌스시는 더이상 유행병의 중심에 있지 않았지만 병이 남기고 간 여파는 갓베인 상처처럼 여전히 짙게 남아있었다. 당시 보카치오는 그의 저서 ‘데카메론’의 초고를 작성중이었다. 페트라크와 보카치오, 두 작가가 전염병 시대에 대해 어떻게 글을 적을지 상의를 한 부분이 기록으로 남아있진 않지만 적어도 우리는 일 년 차이로 죽음을 맞이한 둘 사이에 오간 우정이 깃든 기간동안 보카치오는 페트라크의 산문과 시들을 쉼없이 섭취했으며 그의 노트북에 길다란 문단들을 그대로 옮겨 인용했단 사실을 알 수 있다. 보카치오가 1348년이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지 그의 시점에서 적어내리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는 바로 페트라크가 전염병에 관해 적어내린 초반작들 덕분이었다.
버질(Virgil)의 작품중 시에나의 페인터 시몬 마티니(Simone Martini)의 아름다운 표지가 그려진 판본이 있다. 페트라크는 그 판본을 무척이나 아꼈는데 1351년경 그는 그가 사랑했으며 전염병에 의해 죽게 된 이들의 이름을 이 판본의 페이지들 위에다가 새겨넣기 시작했다. 그가 적은 수많은 시의 주제였던 그의 사랑 로라가 죽은 3년 전 1348년 부터 그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페트라크는 그의 글실력을 통해 로라가 그의 글 속에 오래동안 살 수 있게끔 해주고 싶어했으며 버질의 작품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언제나 그녀가 남아있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했다. 버질의 책 맨앞장에는 그가 적어놓은 잊을 수 없을 글귀가 있다: “나는 이 비극적인 상실로 인해 얻게 된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적기로 결심했다.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옮겨적는 과정은 시원섭섭하면서도 눈을 감아도 아련하게 남아있는 장면들을 꺼내는 것만 같다.” 그는 그의 영혼을 일으키고 시간의 흐름을 대하는 의식을 깨워줬던 이 순간의 고통을 잊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보카치오는 페트라크의 친구들중 과연 '로라'라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시상을 위해 떠올린 상상의 산물인지 의문을 가진 쪽에 속했지만 그래도 페트라크가 로라를 잃은 해를 두고 그의 인생에 있어 큰 변환점으로 여기는 것을 절대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페트라크가 소장한 버질 판본은 현재 이탈리아의 암브로시안 도서관(The Ambrosian Library)에서 소장중이다. 이 작품에 적혀있는 또다른 문구중에는 그의 24살 아들, 지오바니(Giovanni)가 1361년 7월 10일에 밀란에서 맞게 된 죽음을 추모하는 글이 눈에 띈다. “도시 위에 어느 날 뚝 하고 떨어진 파괴적인 전염병이 퍼지며 그간 온갖 악에 면역을 지녔던 이가 떠나갔다.” 유행병의 1차 공격은 페트라크가 1353년부터 살고있던 밀란을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1359년부터 1363년까지 진행된 2차공격은 더 흉폭한 형태로 발전했다. 페트라크는 당시 파두아(*역주: 이탈리아 동북부의 도시)로 떠났지만 그의 아들은 고집스럽게 밀란에 남겠다고 했었다.
그의 아들의 죽음이 있고난 1361년에 페트라크는 다시 한 번 펜을 쥐었다. 그는 그의 작품 ‘과거의 편지들’ (Letters of Old Age, 1361)을 집필하며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로 엮인 두 번째 작품을 만들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주로 그의 플로렌스인 친구 프란체스코 넬리에게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그 해에 별명이 소크라테스였던 그의 친구가 맞이한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소크라테스는 로라의 죽음을 페트라크에게 처음으로 전달해준 인물이며 페트라크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그의 버질 판본과 가슴 속 깊이 새겨넣었다. 그의 작품 ‘과거의 편지들'에서 그는 “나는 이 시대의 1348년이 나에게서 수많은 이들을 앗아갔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지금, 이 세기의 61년째 해에 꾸준히 많은 이들을 보내줘야만 했던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나?”라고 적었다. 페트라크는 유행병의 2차 공격이 첫 번째보다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며 실제로 유행병은 밀란과 다른 많은 도시들을 초토화시켰다. 그는 더이상 슬퍼하는 내용보다는 비극적인 운명에 맞서싸우는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했다.
유행병이 두 번째로 들이닥친 이 시기 동안 페트라크는 점성술사들이 당대 유행병이 어떻게 재발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진전해나갈 것인지 예측해낸 결과를 두고 혹독하게 비평했다. 그는 점성술가들이 소위 당연히 이뤄질 결과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을 보며 이건 단순한 우연에 불과할 뿐이라며 지적했다. “왜 별 것도 아닌 예언들을 진실로 위장하는 것인가?” 하고 그는 점성술이란 단순히 천문학의 극히 부분에 달하는 지식을 악용하는 것일 뿐이라며 그의 점성술을 믿는 친구들과 사람들에게 꾸짖었다.
전염병이 도심을 휘감고 돌 때 의사 친구가 그에게 마조레 호수로 피신해서 좋은 공기를 들이마시라고 부추겼지만 페트라크는 전염병에 승복하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는 도시에 남아있으면서 주어진 시간의 대부분을 파두아와 베니스에서 보냈다. 전염병이 베니스에 도달했을 때 그의 친구들은 다시 한 번 페트라크에게 달리 생각해보라며 애원했지만 페트라크는 “하나의 죽음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은 다른 죽음으로 뛰어드는 행위일 뿐이요"라며 말할 뿐이었다. 보카치오가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서로 알고지낸 친구, 넬리의 죽음을 이야기 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결국 페트라크는 그가 넬리에게 보낸 편지가 꾿 닫힌 채 그대로 돌아온 것을 보고 이를 알게 되었다.
전염병은 1363년 여름에 더 악독한 모습으로 플로렌스를 되찾아왔다. 새로운 긴장감이 고조된 지역에서 페트라크는 언제쯤 유행병이 끝날지 점치며 살아남은 자들을 속여대는 점성술사들을 두고 더욱 거세게 비판했다. 그들이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마다 대중은 긴장과 편안함 사이에서 춤춰야만 했다. “우리는 온우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낱낱이 알지 못 한다.” 페트라크는 9월에 보카치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처럼 말하며 성을 냈다. “하지만 그들은 시건방지고 덜떨어진 방식으로 진실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곤 하지.” 유행병은 “메마른 정신과 귀에게" 달콤한 말들을 속삭여주는 점성술사에게는 수익을 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찬스였다. 페트라크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아무 논거가 없이 병의 방향성을 두고 점치는 점성술가들의 말에 대항하는 자였다. 그들은 헛된 희망과 확신을 시장에 팔았으며 페트라크는 별을 보며 역병의 향후를 점치는 것보다는 좀 더 나은 기술과 논리가 갖춰진 연구 결과를 원했다.
그렇다면 페트라크는 의술은 어떻게 여겼을까? 그는 너무 많은 확신과 권위를 쥔 의사들을 두고 회의적이었던 걸로도 유명했다.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이 의사들도 지식의 도약을 위해선 자신의 무지를 가장 경계해야된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바로 페트라크였다. 무지야말로 “역병같다"고 한 그는 무지에 대항하는 백신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박멸되어야 하며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치유라는 예술적 행위를 향한 무한한 존경심을 표하면서도 그가 “역병같은 무능함"이라고 일컬었던 대상들에겐 주저하지 않고 날카로운 비판을 날렸다. 전염병은 단순히 의학의 실패를 증명해낼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안정감을 취하지도 못 하게 하였다.
페트라크는 그의 나이대에 유명한 의사들과 친구 관계를 맺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에게 해준 의사 친구들의 조언을 두고 페트라크는 꾸준히 싸웠다. “내 두 눈으로 젊고 건강한 의사들이 병에 들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이 와중에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희망을 줘야 한다는 건가?” 1370년, 플로렌스의 의사 토마소 델 가보(Tommaso del Garbo)이 맞은 죽음을 바라본 페트라크는 파두아의 유명한 의사이자 발명가인 지오바니 돈디(Giovanni Dondi)에게 쓴 편지에서 이러한 감정을 분출했다. 유행병이 처음으로 휩쓸고 간 자리를 지켜본 델 가보는 플로렌스에 위치한 그의 동료들을 위해 전염병에 관해 가장 중요했던 논문 중 하나를 집필했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이 병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의사들도 모두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학문은 그들이나 그들의 가족에게 운명보다 더 긴 삶을 가져다주진 못 했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의사들이 알려준 몇 가지 양식을 수행하며 페트라크는 계속해서 생존했다. 그가 부분적으로라도 의사들의 말을 들어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옴과 같은 피부병 때문이었는데 그는 이를 두고 역병과 같이 “빠르게 죽음으로 인도해주는 병"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녔다고 말했다. “언급하기도 꺼림칙할정도로 피부병은 정말이지, 길고도 험난하다.” 그는 의학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질거라 믿진 않았지만 의학 수행자들의 필수요소인 배움과 경험, 그리고 보살핌과 성찰을 높이 샀다. 의학보단 믿음을 통해 다른 이들을 보살폈던 그의 형제 게라르도처럼, 동시에 남들에게 안심을 팔며 속여가던 점성술사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있던 솔직하고 우수한 의사들은 그에게 있어서 역병의 시대에 존재하던 영웅들이었다.
1363년 12월, 베니스에서 쓴 그의 글을 보면 페트라크가 역병의 활발함이 어느 정도 줄어들었단 점을 감지했단 사실을 알 수 있다. 죽은 이들을 제대로 묻어주거나 추모해줄 수도 없는 도시에서 페트라크는 점점 더 선명한 기록을 해낼 수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공개적으로 도시 곳곳에서 발생하는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그는 어느 정도 역병과 사는 법을 터득해가는 것 처럼 보였다.
1366년경, 페트라크는 ‘레메디즈 포 포춘 페어 앤 파울’ (Remedies for Fortune Fair and Foul, 1366)을 통해 그가 얻어낸 결론을 밝혔다. “나는 역병에 치를 떤다"하고 이 “모든 곳에 존재하는 위험"을 대변하는 목소리인 ‘두려움’(Fear)이 말한다. 그는 풍자적으로 "역병에 걸려 아직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할 때 죽는 것이 나중에 혼자 죽게 되는 것 보다야 훨씬 낫다"고 말했다. 그리고 생존자들에 관해서 페트라크는,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행운의 가치만큼의 삶을 살고 있지 않는지 언급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좋은 이들은 떠나야만 했던 와중에 “독기에 차고 비인간적인 정도가 지나쳐서 유행병마저도 생명을 앗아갈 수 없는 이들"은 살아남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페트라크를 제외하고서도 당시의 거의 모든 이중 역병이 정의를 구현했다고 하는 이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인 1367년, 페트라크는 그가 수도원 속 도서관에서 키케로의 편지들을 즐겁게 읽기도 했으며 수년전에 로라의 죽음을 처음으로 듣게 된 도시, 베로나(Verona)로 돌아갔다. 도시는 역병의 2차 공격으로 많은 피해를 받은걸로 보였지만 그래도 점차적으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트라크는 베로나를 떠나 그가 오고간 도시들중 그 어느 곳도 1348년 이전보다 더 번창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중세시대 이탈리아의 공동체는 유라시아 지역을 관통하는 상업 중심구였지만 역병이 돌고난 이후부터는 더이상 예전과 같은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그는 단순 전염병 뿐만이 아닌 복합적인 이유들을 통해 그의 세계가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지 되돌아봐야만 했다. 전쟁, 정치, 경제의 하락세, 아쉬운 환경의 교회, 지진, 지독하게 추운 겨울, 그리고 전반적으로 부재했던 법률 또한 비판받아야 할 이유들로 손꼽았다. 그는 시장 경제의 침체, 또 그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을 관찰했으며 그 문제들이 개인적인 범위를 넘어설만한 엄청난 규모를 지녔단 점을 깨달았다. 1348년에 역병이 발발한 뒤로 20년을 되새긴 편지 속에서 그는 말한다. “나로서는 인도인들과 중국인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집트와 시리아를 포함한 아시아 국가 중 후진국들은 현재 우리의 경제와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페트라크는 “유행병"이란 단어야 말로 그 유행의 시기가 지났단 점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 대신, 그는 “세상을 황폐화 시키기 위해 전세계를 덮친 역병"이란 표현이 비로소 새롭고 한 번도 돌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역병은 “그 어디에서도 자취를 감추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역병은 스무살짜리 골칫덩어리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위와같이 깨달은 바를 정리해 제노아(Genoa)의 대주교였던,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친구중에 하나인 구이도 셋트(Guido Sette)에게 편지를 부쳤지만 그 편지가 제노아에 도착하기도 전에 셋트는 이미 죽어있는 상태였다. 다시 한 번 페트라크의 펜은 인생의 주기중 또다른 장의 막을 알리고 있었던 것이다.
1371년의 봄에서 여름동안, 역병은 베니스 공화국으로 돌아왔다. 이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페트라크는 이후에 받은 초대들을 모조리 거절했다. 도시가 “넓고 포악한 상어의 입”과 같은 역병을 통해 다시금 위험해졌는지 깨달은 그는 “건강의 염려가 없이 듬직한” 장소를 찾아냈다. 당시 그는 은퇴를 하고 그림같이 아름다운 알쿠아(Arquà)의 동네(현재 알쿠아 페트라카(Arquà Petrarca)라고 알려진 이 동네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극성인 베네토시와 멀지 않다)내에 그가 지은 집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다가오는 전쟁의 위협 속에서도 그는 꿋꿋하게 집에 남아있으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그의 시 모음집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 작업은 로라와의 기억을 추억하기 위해서라고 공표되었지만 아마 동시에 그간 그가 바라봐야만 했던 죽음들과 그걸 이겨낸 시간을 기리기 위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원생활을 이어나가던 페트라크는 이탈리아로부터 끊임없이 안 좋은 소식을 전달받았다. 둘 사이의 우정이 얼마나 끈끈한지 이야기를 나눈 편지를 주고 받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의 또다른 친구이자 교황 특사였던 필립 데 카바솔(Philippe de Cabassoles)는 세상을 떠났다. 페트라크는 다시 한 번 버질 판본위에 이렇게 잃은 사람들을 기록했다. 1372년 10월, 그는 그의 의사 친구 돈디(Dondi)에게 “가족 내에 든 죽음과 병”을 위로하는 편지를 부쳤다.
절친한 친구 보카치오의 작품, ‘데카메론’을 발간된지 20년이나 지난 1373년에 읽게 되었는지 그 정확한 연유는 밝히지 않았다. 그는 집문앞에 어느 날 책이 놓여있었다고 말했지만 그 때까지 작품의 존재를 몰랐다고 하는 그의 말은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페트라크는 데카메론을 정독하기보단 훑어만 봤다고 밝히며 말했다. “책이 너무 두껍고 군중을 위한 책인 동시에 산문이기 때문에 나는 솔직히 이 책을 다 읽지 못 했다.” 그의 세대에 한 획을 그은 이 책을 두고 페트라크가 남긴 이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두 위대한 작가 사이에서 오간 농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보카치오의 책 속엔 윤리적으로 부족한 면이 있는 외설스러운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보카치오가 얼마나 책의 주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느껴졌기에 별로 방해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책의 주제는 탐욕, 성욕, 무지, 교회와 나라의 붕괴와 같은 인간들의 실패들이 어떤 식으로 역병에 물든 세계를 품어주었는지에 관해 말했다. 페트라크는 특히나 책의 서문을 극찬했는데 “유행병이 득실거리던” 당시 플로렌스의 상황을 선명하게 그려낸 보카치오의 표현들이 완벽했다고 말했다. 그는 보카치오의 마지막 이야기가 세상에 더 널리 알려줄 수 있도록 작품을 투스칸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해줌으로써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만한 극찬을 행동으로 옮겼다. “당신의 이야기를 나의 언어로 말했습니다.” 이 일은 1348년부터 페트라크, 그 혼자서도 다양한 감정이 담긴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들을 집필하고 엮어오면서 똑같이 해오던 일이기도 했다.
1374년, 페트라크가 젊은 시절 공부했던 볼로냐(Bologna)에 역병이 돌아왔을 때, 그는 그의 친구 피에트로 다 모글리오(Pietro da Moglio)에게 그 곳을 도망쳐나와 그와 함께 알쿠아에서 살자고 제안했다. 현재까지도 유명한 수사학 교수인 피에트로는 페트라크가 과거에 한 말을 인용해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페트라크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이들이 도망치고 겁에 질려있는 와중에 당신은 둘 다 아니군요. 대단해요, 실로 멋지십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을 두고 어떤 방법으로든 도망치려고 하는 것만큼 멍청한 행동이 어디있으며 인간이란 존재는 두려움을 통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을까요? 어디로 도망가든 번쩍하고 나타나는 상대를 피하기 위해 도망치는 일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페트라크는 그의 친구가 알쿠아의 -- 물론 영원한 피난처로 생각하지는 않기를 바랬겠지만 -- “썩 괜찮은 공기"를 같이 마시며 즐기기를 바랬다. 당시만 해도 역병이 오염된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페트라크는 편지에서 공기야말로 “위험하고 불안정한 요소를 지닌 원소"라고 일컬었다.
1374년 7월, 페트라크는 사망했다. 그의 사인은 역병이 아니라 그의 말년을 꾸준히 괴롭혔던 잔병들이었다. 그는 그의 의사 친구 돈디에게 “자신을 기억할 수 있는 반지”를 살 수 있도록 50 황금 플로린(*역주:2실링(지금의 10펜스에 해당)짜리 옛날 영국 동전)을 주었고 보카치오에겐 “겨울용 코트와 밤에도 계속해서 그의 연구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50 플로린을 남겨주었다. 보카치오는 그의 친구보다 일 년이 조금 넘게 더 살고 1375년의 12월에 사망하는데 그의 사인 또한 역병이 아닌 심장이나 간의 부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내용과 형식 양쪽 모두에 있어서 페트라크의 글은 15세기와 16세기의 이탈리아 문학, 역사, 철학과 전반적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많은 영향을 기여했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고대유물이 그의 시대에서 쥐고있는 중요성에 대해서 그만의 문체로 잘 표현해낸 페트라크를 “르네상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할 정도이다. 14세기 이후로 존재한 여느 전염병이 나돌던 시기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활개치고있는 오늘날은 특히나 그가 남겨준 기록들, 편지, 대화록, 시집의 의미가 더 특별히 와닿는다. 요몇 달간 페트라크를 돌아보며 나는 우리가 다시금 역병이 세상 곳곳을 연결시키고있는 2020년을 어떻게 기억할지 고민해보았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가족과 친구들도 분명 바이러스로 인해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그보다 이 순간이 만들어낸 더 큰 변화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 이야기는 누가 적어내려가게 될까?
14세기 이탈리아야 말로 유행병이 그들의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낱낱이 기록해둔 최초의 사회이다. 그에 비해서 투키디데스(Thucydides, *역주: c 460-c 400 B.C.: 그리스의 역사가)가 기록해둔 기원전 430년의 아테네 역병은 단 하나의 문단이 남아있을 뿐이다. 페트라크는 후세의 독자들에게 당대 사람들이 “무엇”을 겪었는지 뿐만 아니라 “어떻게" 겪어냈는지도 상세하게 알려준다. 그에겐 당시 사회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필요했는지 판단할 수 있는 통찰력이 있었으며 그가 배우게 된 사실들이나 다른 이들이 이 경험을 통해 느끼게 된 바를 끄집어내서 후대인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자료를 성공적으로 엮어냈다. 나는 우리가 오늘날을 어떻게 기록하고, 또 후대 사람들은 오늘날을 어떻게 되돌아보게 될 지 궁금해졌다. 우리가 지닌 아카이브는, 그 광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인정해야겠지만, 과연 페트라크의 편지들이 해낸만큼 현재 우리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를 잘 담아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물론 어떤 면에선 오늘날 우리가 더 나은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사람들은 과거 페트라크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보다 병에 대한 면역력이 높다. 이는 더 나은 식단, 더 청결한 환경, 그리고 의료기술의 발전의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코로나와의 경험은 우리가 얼마나 늘상 위험과 함께하고 있던 사실에 대해 무지했는지 깨우쳐준다. 코로나는 특정 장소, 가족, 친구집단과 사회들을 공격했으며 피해를 받은 이들을 위해 주야장천 일을 하고 계시는 의료진들 또한 끊임없이 공격중이다. 우리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우후죽순 발생하는 상실들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배워야 할 것이며 바이러스가 우리 모두에게 각각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또한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피해를 미리부터 대비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를 페트라크가 봤더라면 아직 역병을 대처하는 자세가 원시적인데 그쳐있다고 바라볼 것이다.
페트라크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 정도로 친했던 많은 인물들은 몇 차례나 그 끝을 모르게끔 몰아치는 역병에 의해 죽게 되었다. 당시 페트라크의 머리속에는 사람들의 죽음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의식적으로 생각한 바가 담겨져있었지만 요즘 대부분 사람들-- 모두라고는 못하지만 왠만한 건강을 지키면서도 폭력의 위험으로부터 멀리 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그렇게 정리된 의견이나 사실이 자리잡고있지 않는다. 페트라크는 그의 출중한 글쓰기 실력을 살려 당시 경험의 핵심들을 낱낱이 적어냈다. 병이 나돌며 그는 사랑과 우정의 진정한 가치를 더욱 진중하게 생각하게 되었으며 모든 것이 망가지면서 그는 더 깊고 진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으며 그가 글을 통해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한 죽은 자들은 죽지 않았다. 그는 그의 친구 보카치오보다 훨씬 더 개인적이고 인상적인 방식으로 무차별적으로 그의 친구와 가족을 죽인 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어냈다. 만약 그가 에이즈가 무참히 나돌던 시기에 살았더라면 그는 왜 당시 세대가 영화, 미술, 시, 또 소설등을 통해 그들이 느꼈던 분노와 고통을 표출하려고 했었는지, 또 왜 죽은 자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노력했는지 정확하게 이해해주었을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일 차 공격으로 인해 남은 잔해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그의 메세지는 도덕적 회복성을 선물해준다. 페트라크는 한 번도 모든 것들이 자동적으로 괜찮아 질거라고 위로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공중에 떠다니는 병이 쉽사리 사라질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예상치 못한 문제들을 직면하면서 독창적이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600년 보다 더 많은 시간을 지난 오늘까지도 그가 남긴 말들은 여전히 새로운 독자들을 물색하고있다.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며 각기 다른 걱정들로 한가득인 우리에게 페트라크의 목소리는 후세인들에게 우리 시대의 병에 맞서 보다 창의적이고 강해지라는 과제를 남겨주었다.
폴라 핀드렌(Paula Findlen)은 스탠포드 대학에서 이탈리아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직을 맡고 있는 동시에 수프즈 센터(Suppes Center)에서 과학기술의 역사와 철학 분야를 담당하는 책임자직을 수행하고 있다.
원문 출처: publicdomainreview.org/essay/petrarchs-pla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