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12. 18:57ㆍ번역/문학 (소설)
The Sun Also Rises
그럼에도 태양은 오른다
글쓴이 · Ernest Hemingway
번역 · 오성진
- 제3 장 -
봄날의 어느 밤, 나는 로버트가 떠난 뒤에도 나폴리튼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어둑해지는 하늘, 하나둘 불이 켜지는 간판들, 붉은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뀌기를 반복하는 신호등, 지나다니는 사람들, 다그닥다그닥 소리를 내며 택시로 가득찬 거리 위를 걸어다니는 마차들, 따로, 그리고 같이 먹을 음식을 찾아 돌아다니는 매춘부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다시 내 주변으로 시선을 옮겨 아름다운 여성이 내 테이블을 지나 도로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내 시야에서 사라진 그녀 뒤로 또다른 여성을 보고 있었는데 처음 지나간 여자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한 번 더 나를 지나치던 차에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내 테이블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웨이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뭐, 마시고 싶은 거라도?” 내가 물었다.
“페르노(Pernod) 한 잔 이요.”
“당신처럼 어린 숙녀한테 너무 강할텐데.”
“어린 숙녀는 당신이겠죠. Dites garçon, un pernod. (웨이터, 페르노 한 잔.)”
“나도 페르노 한 잔.”
“무슨 일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파티라고 가시려나?”
“그럴지도. 당신은?”
“잘 모르겠어요. 이 동네에선 어떤 일이 벌어져도 신기하지 않으니까요.”
“파리를 좋아하지 않나봐?”
“좋아할리가요.”
“그러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파리에 남아있는 이유는 뭐죠?”
“다른 데라고 뭐가 다를까요.”
“충분히 행복해보이는 말투네.”
“행복은 무슨!”
페르노는 압생트와 비슷한 초록색 독주다. 물을 더해주면 우윳빛깔로 변하는데, 마시면 감초맛이 나고 기분을 얼른 흥겹게 해주기도 하지만 그만큼 빠르게 기분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우리는 앉은 자리에서 각자 페르노를 삼켰고 여자는 슬픈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이제 저녁식사 정도는 당신이 사는건가?”
그녀는 미소를 지었지만 웃음을 터뜨리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닫고 있을 때 특히 예뻐보였다. 계산을 마친 나는 그녀와 함께 거리로 나갔다. 마차 하나를 불러세웠고 마부는 거리 끝에 말을 세웠다.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마차에 올라 탄 우리는 오페라 거리로 향하고 문을 닫은 상점들을 지났는데, 창문에서 새어나온 빛은 넓고 인적 없는 거리에 붉을 밝혀주었다. 마차는 창에 많은 시계가 걸려있는 뉴욕 헤럴드 사무실을 지나갔다.
“저 많은 시계들은 다 무슨 용도예요?” 그녀가 물었다.
“미국의 시간들을 알려주는 거예요.”
“장난치지 마요.”
피라미드 가에서 방향을 꺾은 마차는 리볼리 가의 신호를 지나 튈르리로 향하는 어두운 문을 통과했다. 그녀는 내게 안겼고 나는 그녀의 어깨를 내 손으로 감싸안았다. 그녀는 키스를 바라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내 몸 위에 한 손을 올렸지만 난 이내 그녀의 손을 치웠다.
“거기엔 손을 올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무슨 문제라도…? 어디 아프기라도 하세요?”
“응.”
“모두가 아프죠. 저도 마찬가지고요.”
우리는 튈르리를 지나 밝은 거리로 나왔고 센강을 지나 세인트 페레즈 거리를 향해 올라갔다.
“아프실 때 페르노를 마시면 안 돼요.”
“그건 당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일텐데.”
“저라고 다를 건 없죠. 여자라고 당신과 다를 건 없을테니까요.”
“당신, 이름이 뭐지?”
“조젯(Georgette). 당신 이름은?”
“제이콥.”
“플랜더스 지역 사람 이름이네요.”
“미국에서도 자주 쓰이는 이름이야.”
“플랜더스 사람이 아니란 이야기예요?”
“미국인이야.”
“다행이네요, 플랜더스 사람들이라면 질색이거든요.”
이쯤 되어서 우리는 레스토랑에 도착했고 난 마부에게 이만 마차를 멈춰 세워 달라고 말했다. 우리는 마차 밖으로 나왔지만 조젯은 레스토랑의 외관이 불만스러운 듯 보였다. “레스토랑이라고 하기에는 그저 그렇네요.”
“허,”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포이요츠로 가는 편이 좋겠네. 당신은 마차에서 내리지 말고 더 가는 편이 어때?”
애초에 내가 그녀와 함께 마차를 탄 이유는 단지 누군가와 음식을 먹는다면 좋겠다는, 애매하게 감상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매춘부와 함께 밥을 먹은지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라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얼마나 지루할 수 있는지 완전히 잊고 있었다. 우리는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 리셉션에 앉아있던 마담 라빈을 지나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먹은 조젯은 기분이 한결 풀린듯 보였다.
“그렇게 나쁘진 않은 곳이네요,” 그녀가 말했다. “시크하진 않지만 음식이 괜찮은 것 같아요.”
“리에주(Liège)에서 먹는 것보다야 훨씬 괜찮을 거야.”
“브뤼셀을 말하시는 거겠죠.”
우리는 와인 한 병을 더 열었고 조젯은 농담을 했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못난 치아를 그대로 드러내보였고 우리는 약하게 서로의 잔을 부딪혔다. “당신 마음에 드네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아픈 게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우린 서로 잘 맞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 거예요?”
“전쟁에서 다쳤어,” 내가 말했다.
“으, 그 놈의 전쟁.”
우리는 아마 대화를 이어나가고 전쟁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나누고 결국 전쟁이란 문명 사회에 엄청난 재앙이며 애초에 그냥 없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럴 생각을 하자니 안그래도 지루했던 상황이 더 지루해질 것만 같았다. 바로 그 때 다른 방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반즈! 반즈! 제이콥 반즈!”
“친구가 부르는군,” 난 조젯에게 말을 건네며 방에서 나왔다.
옆방엔 큰 테이블에 앉아있는 브래독스를 중심으로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파티에는 로버트, 프란시스, 브래독스 여사, 그리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따가 춤추러 무도회에 같이 갈거지?” 브래독스가 물어봤다.
“무슨 무도회?”
“있잖아요, 무도회. 저희가 다시 무도회장을 부활 시킨 소식 못 들었어요?” 브래독스 부인이 거들었다.
“꼭 와야 해요, 제이크. 우리 전부 갈거예요,” 테이블 끝에 앉아있던 프란시스가 말했다. 그녀는 키가 컸고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당연하지, 이 친구도 올거야,” 브래독스가 말했다. “여기에 와서 우리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게 어때, 반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지.”
“그리고 방에 함께 있는 친구도 데려오세요,” 브래독스 부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캐나다 사람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캐나다인 특유의 밝은 사회성을 지니고 있었다.
“고마워요, 금방 다시 올게요,” 난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친구들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조젯이 물었다.
“작가들, 예술가들.”
“강을 기준으로 이쪽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죠.”
“어쩌면 너무 많을지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도 그들 중 몇몇은 많은 돈을 번다나봐요.”
“그건 두말할 필요없지.”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주문한 와인도 전부 마셨다. “가볼까,” 내가 말했다. “이제 내 친구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거야.”
조젯은 그녀의 가방을 열어 거울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몇 번 빠르게 살피고는 립스틱을 발라 입술 색깔을 다시 정리하고 그녀의 모자를 반듯이 폈다.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방안으로 들어가자 앉아있던 남성들은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약혼녀를 소개해야겠군요, 마드모아젤 조젯 르블랑 입니다,” 내가 말했다. 조젯은 그녀 특유의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고 우리는 방안을 돌아다니며 모두와 악수를 나눴다.
“가수 조젯 르블랑과 무슨 관련이라도 있으신가요?” 브래독스 부인이 물었다.
“Connais pas,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조젯이 답했다.
“그렇지만 이름이 같잖아요,” 브래독스 부인이 따뜻한 목소리로 끈질기게 물어봤다.
“아니요,” 조젯이 말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제 이름은 호빈이에요.”
“그렇지만 반즈씨가 당신을 마드모아젤 조젯 르블랑이라고 소개한 걸 들었는걸요. 분명히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해서 할 수 없었던 불어로 이야기 할 수 있다는 데 신이 난 브래독스 부인은 계속해서 추궁했다.
“저 사람이 한 말은 무시해도 돼요,” 조젯이 말했다.
“아, 그럼 농담이었단 말씀이시군요,” 브래독스 부인이 말했다.
“네,” 조젯이 말했다. “웃으라고 한 소리죠.”
“방금 들었어요, 헨리?” 브래독스 부인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브래독스를 불렀다. “반즈 씨가 약혼녀를 마드모아젤 르블랑이라고 소개했는데, 사실 이 분의 성은 호빈이래요.”
“물론이지, 자기. 마드모아젤 호빈,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걸.”
“오, 마드모아젤 호빈,” 이번엔 프란시스가 프랑스어로 조젯을 불렀지만, 그녀는 자신이 빠르게 뱉는 프랑스어에 브래독스 부인만큼 자부심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파리에는 오래 계셨어요? 파리는 마음에 드시나요? 파리를 좋아하실테죠, 안 그런가요?”
“저 사람은 누구죠?” 조젯이 내게 돌아서서 물었다. “제가 저 사람과 꼭 이야기를 해야 해요?”
그녀는 프란시스를 향해 앉은 몸을 다시 돌려 미소를 지었다. 조젯의 양손은 꼭 겹쳐있었고 그녀의 머리는 그녀의 긴 목 위에 올려져있었다. 그녀의 꾹 닫힌 입은 다시 이야기를 할 채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아뇨, 전 파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모든 것이 지저분하고 비싸거든요.”
“정말요? 저는 파리가 엄청 깨끗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유럽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 중 하나죠.”
“저는 더럽다고 생각해요.”
“그것 참 이상하군요! 어쩌면 파리에 오래 계시지 않아서 그런 걸수도 있어요.”
“파리엔 충분히 길게 있었어요.”
“그래도 멋진 사람들이 있잖아요. 적어도 이건 확실하죠.”
조젯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참 멋진 친구들을 두셨네요.”
살짝 취한 프란시스는 취기를 계속 누리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방 안엔 커피가 들어왔고 그와 함께 마담 라빈이 리큐르들을 들고 왔다. 커피와 리큐르를 모두 해치운 우리는 브래독스의 무도회장을 가기 위해서 모두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무도회장은 생트 쥐네비에브 거리 위에 있는 발 뮤젯(bal musette)이었다. 판테온 쿼터의 노동층은 주에 5일을 그 곳에서 춤을 췄다. 그곳은 일주일에 하룻밤 동안 무도회장이었고 월요일 밤에는 문을 닫았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문 앞에 앉아있는 경찰관과 바 뒤에 서있는 건물주의 아내, 그리고 건물주를 제외하고는 무도회장이 텅 비어있었다. 우리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건물주의 딸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안에는 길다란 벤치들이 있었고 테이블들이 방 전체에 깔려있었다. 그리고 저 끝에 춤을 추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조금 일찍 오면 좋을텐데 말이야,” 브래독스가 말했다. 주인장의 딸은 우리에게 다가와 뭘 마시고 싶냐고 물어봤다. 건물주는 댄스 플로어 옆에 있는 높은 스툴에 느즈막이 앉아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발목에 방울을 달고 있었는데 연주를 하면서 발을 움직여 방울 소리에 박자를 맞췄다. 그리고 모두가 춤을 췄다. 건물 안은 후끈거렸고 플로어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전부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 조젯이 말했다. “이렇게 땀을 흘려본 적도 오랜만이네요!”
“후끈거리네.”
“내 말이요!”
“모자를 벗는 건 어때.”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요.”
누군가 조젯에게 춤을 추자고 제안했고 난 바를 향해 걸어갔다. 안은 정말로 열기가 상당했지만 주인장의 아코디언 연주가 모든 것을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난 맥주 한잔을 마시면서 문틈 앞에 서서 거리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두 대의 택시가 가파른 골목에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두 대 모두 무도회장 앞에서 멈춰섰다. 저지나 셔츠를 입고 있는 젋은 남성들이 우르르 택시에서 내렸다. 문에서 새어나온 빛을 통해 그들의 손과 새로이 정돈한 곱슬기 있는 머리카락도 보였다. 문 옆에 서있던 경찰관은 나를 한 번 보고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젊은 남성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왔고, 그들이 들어오는 와중에 난 무도회장의 빛에 비친 그들의 고운 손, 곱슬머리, 하얀 얼굴이 움직이고, 미소짓고, 이야기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들과 함께 들어온 사람은 브렛이었다. 그녀는 굉장히 아름다웠고 그들과 잘 어우러졌다.
그들 중 조젯을 발견한 한 남성이 말했다. “이럴수가. 진짜 매춘부가 있잖아. 렛, 난 저 여자랑 춤을 추러 가야겠어. 내 뒤를 봐줘.”
렛이라고 불린 키가 크고 피부가 어두운 남성이 말했다. “너무 흥분하지만 마.”
금발의 곱슬머리가 답했다. “걱정 마, 자기.” 브렛은 저런 사람들과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상당히 화가 났다. 어쩐지 저들은 언제나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저들이 재미있는 눈요깃거리를 선사하며 나는 참을성을 길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저들 중 누군가를 붙잡고 때리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저 우쭐대고 뭐라도 숨기는 듯한 저 태도를 박살내고 싶었다. 그 대신 난 거리로 나와 옆에 있는 무도회장에 있는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셨다. 맥주맛이 너무 별로였기 때문에 더 맛없는 코냑 한 잔을 시켜 내 입안에 묻은 비린내를 씻어냈다. 다시 브래독스의 무도회장으로 돌아왔을 때 댄스 플로어엔 사람들이 득실거렸고 조젯은 키가 큰 금발의 어린 남성과 춤을 추고 있었다. 금발머리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두 눈을 치켜뜨며 요상한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음악이 멈추자마자 그들 중 또 다른 한 명이 조젯에게 춤을 권했다. 그녀는 그들 사이에서 신이 나서 춤을 이어나갔다. 그쯤 되어서 난 그들 모두가 번갈아가며 그녀와 춤을 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저들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난 로버트가 이미 앉아있던 테이블에 앉았다. 프란시스는 춤을 추고 있었다. 브래독스 부인은 로버트 프렌티스라는 사람을 데려와 우리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뉴욕 출생인 그는 시카고에서 오래 지냈는데, 요즘 많은 인기를 얻고 부상하고 있는 소설가이기도 했다. 그의 말투엔 약간의 영국식 억양이 묻어났다. 나는 그에게 술 한 잔을 권했다.
“감사해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전 이미 한잔 했답니다.”
“그렇다면 한 잔 더 마시면 될 문제죠.”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죠.”
우리는 건물주의 딸을 불러다가 코냑 한 잔씩을 시켰다.
“캔자스 시티에서 오셨다고 얼추 들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맞습니다.”
“파리는 마음에 드시나요?”
“네.”
“정말요?”
난 살짝 취해있었다. 그렇다고 기분 좋게 취한 것은 아니었고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취기가 올라왔다.
“두말할 필요가 있나,” 내가 말했다. “네.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오, 화내시는 모습이 인상깊군요,” 그가 말했다. “저에게도 그런 면이 있다면 좋겠네요.”
난 자리에서 일어나 댄싱 플로어 쪽으로 걸어갔다. 브래독스 부인은 나를 따라왔다. “로버트에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그녀가 말했다. “아시겠다시피 아직 어린 사람이에요.”
“화낸 적은 없소만,” 내가 말했다. “그냥 조금만 더 이야기했다가는 밀려오는 구토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약혼녀께서 상당히 성공적인 밤을 보내고 계시네요,” 브래독스 여사가 조젯이 키가 크고 그을린 피부를 지닌 렛이라는 남자의 팔 안에서 춤을 추고 있는 댄스 플로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내가 말했다.
“어쩌면…” 브래독스 부인이 말했다.
이번엔 로버트가 올라왔다. “제이크, 이리 와,” 그가 말했다, “술 한 잔 하자.” 우리는 바를 향해 걸어갔다. “뭐가 문제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 보이는데?”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여기있는 모든 게 내 머리를 아프게 할 뿐이야.”
브렛 또한 바를 향해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신사분들.”
“브렛,” 내가 말했다. “아직도 취하지 않았다니, 왠일이야?”
“이제 더이상 취할만큼 마시지 않을거예요. 브랜디 하나랑 토닉 워터 한 잔만 주세요.”
그녀는 잔을 들고 자리에 서있었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는 로버트를 살펴보았다. 그는 마치 약속의 땅을 마주하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 로버트는 훨씬 어렸지만, 그에겐 이글거리는 욕망이 담긴 표정과 뭔가를 바라는 듯한 느낌이 새겨져있었다.
브렛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녀는 슬립오버 스웨터와 트위드 치마를 입고 있었고 그녀의 머릿결은 마치 남자아이의 것 처럼 뒤로 넘겨져있었다. 그녀는 마치 경주하는 요트처럼 타고난 곡선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곡선은 그녀가 입고있는 양털 재질의 저지를 뚫고서도 쉽게 드러났다.
“브렛, 꽤 근사한 사람들과 왔던데,” 내가 말했다.
“정말로 그렇지 않나요? 당신의 파트너는요? 어디서 구하셨어요?”
“나폴리튼.”
“근사한 밤을 보내셨나요?”
“물론이지,” 내가 말했다.
브렛은 웃음을 터뜨렸다. “제이크, 거짓말 할 필요 없어요. 저런 여자와 함께 다니는 것은 저희 모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라구요. 저기 프란시스랑 조를 좀 보세요.”
이 말에 로버트는 웃었다.
“거래 제한은 이럴 때 쓰는 말 아닐까요?” 브렛은 이렇게 말하고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하나도 안 취한 모양이네,” 내가 말했다.
“맞아요. 그렇게 보이지 않나요? 게다가 오늘 저와 함께 온 사람들과 같이 다니다보면 완전히 안전한 상황 속에서 술을 마실 수도 있어요.”
음악이 다시 울리자 로버트가 말했다. “브렛 아가씨, 저와 함께 춤을 추지 않으시겠어요?”
브렛은 그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전 이미 제이콥(Jacob)과 춤을 추기로 이미 약속한걸요,” 그녀는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실제로 내뱉으니 당신의 성경 이름도 정말 웃기네요, 제이크(Jake).”
“그러면 다음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건 어때요?” 로버트가 물었다.
“저희는 이만 가볼 예정이에요,” 브렛이 말했다. “몽마르트르에서 데이트를 약속했거든요.”
나는 브렛과 춤을 추며 브렛 어깨 너머로 여전히 바에 기대어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로버트를 보았다.
“벌써 또 한 명 생긴 모양인데,”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말도 마요. 딱하기도 하지. 정말 방금까지 저 사람 마음 같은 건 하나도 모르고 있었어요.”
“글쎄,” 내가 말했다. “내가 보기엔 당신도 이렇게 한 명씩 늘려가는 걸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
“바보같은 얘기 마세요.”
“그치만 정말 그렇게 보이는 걸.”
“오, 제이크. 설령 제가 정말 그렇다고 하더라도 뭐가 변하나요?”
“그럴 건 없지,” 내가 말했다. 우리는 아코디언에 맞추어 춤을 추었고 누군가 반조를 켜고 있었다. 회장은 열기가 가득했고 난 행복했다. 우리는 또다른 젊은이와 춤을 추고 있는 조젯 곁을 스치듯 지나갔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여자를 데려온 거예요?”
“몰라, 그냥 데려왔어.”
“어쩜, 로맨틱도 하셔라.”
“아니, 지루했을 뿐이야.”
“지금도요?”
“아니, 지금은 아니지.”
“여기서 나가죠. 저 여자도 오늘밤 보살펴줄 사람이 분명 있어 보이는데요.”
“여기서 정말 나가고 싶어?”
“진심으로 그러고 싶지 않았으면 물어보지도 않았을거예요.”
우리는 댄스 플로어에서 내려왔고 나는 벽에 걸린 행거에서 내 코트를 찾아 걸쳐 입었다. 브렛은 바 옆에 서있었고 로버트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바에 멈춰서서 사람들에게 봉투 하나를 달라고 말했고 주인장이 내게 봉투를 찾아주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오십 프랑짜리 지폐를 꺼내 봉투에 넣고 닫은 다음, 사장에게 넘겨주었다.
“만약 저랑 같이 온 여자가 저를 찾는다면 이걸 건네주실 수 있나요?” 내가 말했다. “만약 저 남성들 중 한 명과 나간다면 제가 다시 돈을 돌려주세요.”
“잘 알았습니다, 므시외,” 주인장이 말했다. “지금 가시는 거예요? 이렇게나 일찍?”
“네,” 내가 말했다.
우리는 문밖으로 나갔다. 여태 로버트와 대화를 나누던 브렛은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내 팔에 팔짱을 꼈다. “좋은 밤 보내, 로버트.” 내가 말했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택시를 찾아 서성였다.
“방금 맡긴 50프랑은 돌려받지 못할 거예요,” 브렛이 말했다.
“아, 그건 나도 알지.”
“택시가 안 잡히네요.”
“판테온까지 걸어갔다가 거기에서 택시를 잡아도 될 것 같은데.”
“옆에 있는 술집에서 술 한 잔 마시면서 기다려보는 게 더 낫겠어요.”
“길 건너는 게 그 정도로 귀찮은가 봐.”
“꼭 건너지 않아도 되는 거라면 건너기 싫은걸요.”
우리는 옆에 있던 바에 들어가 웨이터에게 택시를 구해오라고 말했다.
“자,” 내가 말했다, “드디어 저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졌어.”
우리는 카운터에 기대고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봤다. 웨이터가 들어와 택시를 잡았다고 알려줬다. 브렛은 내 손을 꽉 쥐었다. 나는 웨이터에게 1프랑을 쥐어주고 브렛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가달라고 말할까?” 내가 물었다.
“그냥 드라이브 해달라고 해주세요.”
난 운전수에게 몽수리 공원으로 가달라고 말하고 택시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브렛은 눈을 감은 채 좌석 구석에 기대고 누웠다. 나는 안으로 들어와 그녀 옆에 앉았다. 택시는 한 번 덜컹, 하고는 다시 길을 나섰다.
“오, 자기. 그동안 얼마나 고달팠는지...” 브렛이 말했다.
*원문 출처: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The Sun Also Rises'를 번역했습니다. 이 작품은 올해, 2022년 1월 1일에 들어서 자유 이용 저작물로 등록되었으며 책을 볼 수 있는 링크는 여기에 남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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