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7. 16:50ㆍ번역/문학 (소설)
The Sun Also Rises
그럼에도 태양은 오른다
글쓴이 · Ernest Hemingway
번역 · 오성진
- 제2 장 -
그 해 겨울, 로버트는 자신이 쓴 소설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갔고 꽤 좋은 출판사와 계약을 성사 시켰다. 그 후로 미국에서 갖은 일들을 겪었다고 들었는데, 아마 그 와중에 프란시스가 그를 놓친 게 아닐까 싶다. 뉴욕에서 몇몇 여성들이 그를 잘 대해줬고 그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그는 딴판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로버트는 미국을 그 어떤 때보다 더 찬양하고 있었고 더이상 예전처럼 단순하거나 마냥 착하게만 굴지도 않았다. 편집자들이 그의 소설을 두고 좋은 이야기를 여러 번 해준 게 그의 머리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끼친 것이 틀림 없었다. 게다가 여럿 여성들이 실제로 그에게 잘 대해주기 위해 노력을 보이기까지 한 순간, 그가 지녀온 가치관은 통째로 흔들린 것이다. 사 년이라는 기간 동안 로버트의 생각은 오직 그의 아내에게 붙잡혀 있었다. 그리고 거의 삼 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는 프랑스 외의 지역으로는 가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가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해본 적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로버트는 대학교에서 보낸 수모스러운 시간들로부터 보상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했었고, 자신이 결혼한 상대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느낀 고통으로부터 보상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프란시스의 손아귀로 알아서 걸어들어갔다. 그는 주변환경이 변한 뒤로 아직 사랑에 빠지진 않았지만 자신이 여성들에게 선보일만한 매력을 충분히 지녔다는 점, 그리고 한 여성이 그를 보살피고 그와 함께 살고 싶어한다는 것이 엄청난 기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단순한 생각의 변화가 그를 딴판인 사람으로 만들었고 나는 더 이상 로버트와 같이 보내는 시간이 예전만큼 즐겁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뉴욕에서 연이 닿은 지인들과 함께 브릿지 게임을 하다가 위험한 상황이 와도 그가 실제로 지불할 수 있는 비용보다 더 높은 비용을 베팅하고 몇백 달러를 벌어들이는 일이 많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잦아지면서 브릿지 게임을 두고 느끼는 로버트의 자만심은 높아져만 갔고, ‘꼭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누구든지 브릿지를 통해 생활비를 벌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자주 내뱉기도 했다.
그리고 그에게 생긴 큰 변화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로버트는 W. H. 허드슨(W. H. Hudson)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냥 듣기에는 별 일 아닌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로버트는 ‘퍼플 랜드 (The Purple Land)’를 읽고 또 읽기를 반복했다. ‘퍼플 랜드'는 인생에 너무 늦은 시점에 읽기에는 거의 독약과도 같은 책이다. 그 책은 완벽한 영국 신사가 상당히 야릇한 이미지로 가득한 땅에 가서 겪게 되는 질펀한 소설이며, 그 안에 장면들은 굉장히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서른네살의 성인이 이 책이 인생에서 실제로 쓸 수 있을만한 가르침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마치 같은 나이의 남자가 프랑스의 수도원에서 어느 날 갑자기 앨저(Horatio Alger)가 쓴 책들을 들고 월 스트리트로 뛰쳐 나간 것과 별반 차이 없는 일이다. 콘은 ‘퍼플 랜드'에 적혀있는 모든 단어들을 마치 누군가의 보고서를 읽듯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물론 나도 로버트가 충분히 상식적인 사람인지라 뭐가 허구이고 뭐가 사실인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거라 짐작했지만 어느 날 내 사무실을 찾아온 로버트를 보고 그 책이 그에게 정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 로버트,” 내가 말했다. “웃기기라도 해주려고 찾아온거야?”
“제이크, 남미에 같이 갈래?” 그가 말했다.
“아니.”
“왜?”
“그냥. 한 번도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었어. 게다가 너무 비싸잖아. 어차피 남미 사람들은 파리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걸.”
“그 사람들은 진짜 남미 사람들이 아니야.”
“나는 완전히 진짜처럼 보이던데.”
내게는 열차를 통해 보내야하는 이번주의 원고가 쌓여있었고, 아직 그 중 반밖에 끝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무슨 소문이라도 듣고 온거야?” 내가 물었다.
“아니.”
“그러면 너 주변에 그 귀하디 귀한 인맥들 중에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는거야?”
“없어. 제이크, 들어봐. 만약 내가 너와 나, 우리 둘의 여행 비용을 전부 지불한다고 하면 어때. 그 때는 나와 함께 남미로 가주겠어?”
“왜 나랑 가고 싶은거야?”
“너는 스페인어를 할 수 있잖아. 그리고 우리 둘이 가면 훨씬 더 재미있는 여행이 될 거야.”
“미안하지만 사양할게,” 내가 말했다, “난 우리 동네가 충분히 좋아, 그리고 어차피 여름에 스페인에 가기로 돼있어.”
“살면서 한 번쯤은 그런 여행길에 올라보는 게 소원이었어,” 로버트는 이렇게 말하고 의자에 풀썩 앉았다. “그런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너무 늙어버릴까봐 걱정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말했다. “넌 어디든 갈 수 있잖아. 그 많은 돈은 묵혀뒀다 뭐하게.”
“나도 알아. 그런데 도무지 뭐라도 시작을 할 수 없는걸.”
“조급해 하지 마,” 내가 말했다. “생각보다 별 거 아니야. 외국이라고 해봤자 결국 영화에 나오는 그대로일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로버트가 안쓰러웠다. 로버트의 상황은 많이 안 좋은 듯 보였다.
“시간이 엄청난 속도로 흘러가고 있는데 나는 내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마다 돌아버릴 것만 같아.”
“세상에 투우사들 말고 주어진 인생을 전부 사는 사람은 없어.”
“그렇지만 난 투우사들에게 관심이 없는걸. 그건 비정상적인 삶이나 마찬가지잖아. 난 남미에 있는 나라로 가고 싶어, 함께 가면 근사한 여행이 될거야.”
“영국령 동아프리카에 가서 사냥해보는 건 어때?”
“아냐, 그건 별로일 것 같아.”
“거기에 간다면 나도 함께 할게.”
“아냐, 그건 내게 별로 흥미롭지 않은걸.”
“그건 너가 아프리카에 대해서 적힌 책을 한 번도 안 읽어봐서 그런 걸꺼야. 다음에 어디 한 번 아름답고 빛나는 흑인 왕비들과 여러 번의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가 담긴 책을 한 번 읽어봐.”
“남미에 가고 싶어.”
로버트에겐 유대인 특유의, 딱딱하고 고집스러운 기운이 있었다.
“일단 아래층으로 가서 같이 한 잔 하는 건 어때.”
“일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아니야,” 내가 말했다.
우리는 일층에 있는 술집으로 내려갔다. 내가 일을 하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바로 이 카페야말로 친구들과의 자리를 끝내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잔을 마시고 난 뒤에 “재밌었어, 난 이제 그만 돌아가서 오늘 하루 동안 쌓인 열기를 좀 풀어야겠는걸,” 하고 말하면 모든 게 정리되었다.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이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말할 만한 근사한 대사 한두 개 정도 가지고 있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덕목이었다.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가장 지켜야 할 태도는 바로 매순간 어떻게서든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도록 신경쓰는 것이니 말이다. 어쨌든, 로버트와 나는 아래층에 있는 바로 내려가 위스키와 음료수 한 잔씩을 마셨다.
로버트는 벽에 진열된 병들을 둘러보았다. “여기 괜찮네,” 그가 말했다.
“다양한 술이 있지,” 나도 동의했다.
“제이크, 있잖아,” 그가 내쪽으로 몸을 한껏 기울이며 말했다. “그… 삶이 그냥 우리를 스쳐지나갈 뿐, 우리가 그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 없어? 벌써 살 날의 반을 살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냔 말이야.”
“뭐, 가끔가다 한 번씩 그런 생각 하지.”
“삼십오 년 정도 더 지나면 우리 모두 죽어있을 거라는 것도 알아?”
“개같은 소리 좀 하지 마, 로버트,” 내가 말했다. “제발.”
“진심이야.”
“그런 걱정은 해본 적이 없어,” 내가 말했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걸.”
“이미 고민거리로 넘쳐나던 시기가 몇 차례나 있었어. 이제 더이상 이상한 고민에 빠져 살 생각은 없어.”
“그건 알겠어. 그렇지만 우선 난 남미로 가고 싶어.”
“있잖아, 로버트,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간다고 변하는 건 하나도 없어. 이건 내가 이미 그 절차를 밟아봤기 때문에 말해줄 수 있는거야. 절대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서 너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그런 의도로 떠나는 여행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넌 한 번도 남미에 가본 적이 없잖아.”
“남미, 남미, 남미! 너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지닌 채로 남미에 간다면 모든게 똑같을거야. 여기도 좋은 동네잖아. 파리에서의 삶을 제대로 살아보기를 시작해보는 건 어때?”
“파리라면 질렸어, 라틴 쿼터(Quartier Latin)도 마찬가지고.”
“그럼 쿼터에서 떨어져서 지내 봐. 혼자서 다른 구역들을 돌아다녀 보기도 하고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지 봐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 하룻밤 내내 걸었던 적이 있었는데 경찰이 날 멈춰 세우고 내 신분증을 물어본 것 빼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밤에 돌아다니는 동네가 예쁘지는 않았어?”
“파리는 내게 별 감흥이 없어.”
이 정도면 대충 상황이 그려질거라 생각한다. 나는 로버트가 딱했지만 그를 위해서 내가 취할 수 있을만한 방안이 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상황만 봐서도 알겠지만 지금 로버트 안에는 이미 남미가 뭐든지 해결해 줄 수 있을거라는 고집, 그리고 파리가 싫다는 고집까지 두 가지 단단한 고집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생각은 그가 읽은 책에서 영감을 받은게 틀림없었는데, 아마 두번째 생각 또한 책을 통해 생겼을 것이라는 게 내 결론이었다.
“그래, 오늘 재밌었어,” 내가 말했다, “난 이제 그만 돌아가서 오늘 하루 동안 쌓인 열기를 좀 풀어야겠는걸.”
“정말로 가야만 해?”
“그럼, 난 오늘 하루 동안 쌓인 열기를 풀어야 되거든.”
“혹시 같이 올라가서 너 사무실에 앉아있어도 돼?”
“그럼, 올라와.”
로버트는 건너편 방에 앉아 신문을 읽었고, 편집자, 출판 담당자, 그리고 나는 두 시간 동안 열심히 일을 했다. 일이 끝마친 뒤 나는 우편 양식을 기입한 뒤에 큰 마닐라 봉투에 원고지들을 담아 꼬마를 불러다가 파리 생 라자르 역(Gare St. Lazare)에다가 가져가라고 말했다. 건너편 방으로 넘어가 보니 로버트는 큰 의자 품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곤히 잠든 그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사무실을 잠구고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난 할 수 없어,” 로버트는 이렇게 말하면서 머리를 조금 더 그의 팔 안쪽으로 들이밀었다. “난 할 수 없어. 그 어떤 걸 갖다줘도 난 하지 못할거야.”
“로버트,” 나는 로버트의 어깨를 흔들었고, 로버트는 나를 올려다보더니 안심했다는 듯이 웃으며 눈을 깜빡였다.
“방금 나 잠자면서 말도 했어?”
“뭔가 말하긴 했지, 근데 정확히 알아 먹을 순 없었어.”
“꿈을 꿨는데 그 내용이 최악이었어.”
“시끄러운 타이프 라이터 소리가 울리는데도 용케 잠에 들었네?”
“그러게. 어젯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그랬나 봐.”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
“말하는 게 문제였지,” 로버트가 답했다.
로버트의 잠 못드는 밤을 상상하는 일은 쉬웠다. 내게는 친구들의 잠자리를 상상하는, 요상한 습관이 있었다. 우리는 내가 일하는 건물에서 나와 아페리티프(*apéritif, 식사전에 식욕을 돋구기위해 마시는 알코올성 음료)를 마시면서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해 나폴리튼 카페(Café Napolitain)에 들렀다.
*원문 출처: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The Sun Also Rises'를 번역했습니다. 이 작품은 올해, 2022년 1월 1일에 들어서 자유 이용 저작물로 등록되었으며 책을 볼 수 있는 링크는 여기에 남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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