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24. 19:29ㆍ번역/문학 (소설)
The Sun Also Rises
그럼에도 태양은 오른다
글쓴이 · Ernest Hemingway
번역 · 오성진
- 제4 장 -
동산을 올라 불이 켜진 광장을 지나간 택시는 어둠 속으로 계속해서 오른 뒤에 생 에티엔 뒤 몽 뒷편에 있는 어두운 거리까지 나아갔다. 그 뒤로 택시는 부드럽게 아스팔트를 따라 꽁뜨흐스꺄흑쁘 광장에 서있는 버스와 나무들을 지난 뒤, 무프타르 거리의 자갈길 위를 달렸다. 거리 양쪽엔 불이 환하게 켜진 술집들과 늦게까지 운영중인 상점들이 있었다. 떨어진 채로 앉아있던 우리는 오래된 길 위를 달리던 차가 흔들리면서 갑작스레 서로의 몸을 딱 붙이고 앉게 되었다. 브렛의 모자가 떨어졌다. 그녀의 머리는 뒤로 넘겨져 있었다. 나는 가게들에서 새어나온 불빛들로 밝혀진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다시 어둠이 찾아왔지만 고블랭 거리로 택시가 들어서면서 그녀의 얼굴을 다시 감상할 수 있었다. 고블랭 길은 군데군데 파손되어 있었던지라 거리엔 아세틸렌 불꽃을 뿜어내는 뿜어내며 도로를 수리하던 사내들이 있었던 것이다. 브렛의 얼굴은 새하얬고 길다란 불꽃들은 그녀의 긴 목선을 밝혀주고 있었다. 도로는 다시 어두워졌고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일순간 우리의 입술은 강렬하게 부딪혔지만 그녀는 이내 곧 몸을 돌리고 좌석 한쪽으로 깊게, 그녀가 나에게서 떨어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몸을 뺐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그녀가 말했다. “부탁이에요.”
“왜 그래?”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요.”
“오, 브렛.”
“정말로 이러면 안 된다는 걸 당신도 꼭 알아야 해요. 전 정말 당신이 이럴 때마다 견딜 수가 없어요, 그게 다예요. 자기, 제발 이해해줘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거야?”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절 만지면 온몸이 마비가 되는데도요?”
“그렇지만 우리 관계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해볼 수 있는게 있지 않을까?”
그녀는 자세를 고치고 허리를 피고 앉았다. 나는 그녀를 감쌌고 그녀는 내게 기대었다. 순식간에 차안 공기가 매우 평온해졌다. 그녀는 정말 그녀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기는 한 것인지 불확실하게 느껴지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럴 때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눈을 감더라도 그녀만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렇게 바라볼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실제로 그녀는 참 많은 것들을 두려워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더 시도해볼 수 있는 게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네,” 내가 말했다.
“그렇다기보단,” 그녀가 말했다. “그냥 그 지옥같은 생활을 다시 겪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서로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지내야겠어.”
“그치만, 자기, 난 당신과 만나야만 하는걸요. 당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게 전부가 아니에요.”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여태껏 항상 내 생각이 맞게 떨어졌는걸.”
“그건 내가 잘못한 게 맞아요. 하지만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잖아요?”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브렛은 내 두 눈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어딘가 다른 깊이가 있었고, 어떤 때에는 깊이가 하나도 없이 평평하게 보이기도 했다. 지금 그녀의 눈은 그 안을 헤엄칠 수 있을만큼 넓어보였다.
“내가 남들을 감정이라는 지옥에 빠뜨린 횟수만 떠올려봐도… 저도 지금 분명 그 값을 치르고 있는 게 분명해요.”
“바보같은 소리,” 내가 말했다. “게다가 그때 그 일은 단순히 웃긴 해프닝이었어. 난 그 날 생각은 하지도 않아.”
“그래요, 그 날 생각은 정말 하나도 나지 않겠죠.”
“그 얘기에 관해서는 이제 우리 둘 다 그만 하는 게 어때.”
“나도 그 일을 두고 웃은 적이 있어요, 바로 내가요, 한 번.” 그녀는 이제 더이상 나를 보고있지 않았다. “제 오빠 친구가 몽스에서 그 때 그런 일을 겪고 집으로 온 적이 있었어요. 그 때 보니 모든게 한낱 농담같이 보이더라구요. 아무래도 사람들은 뭘 잘 모르는 모양이에요, 안 그래요?”
“그래,” 내가 답했다. “모든 걸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겠지.”
나는 그 날의 기억을 거의 이겨냈다. 종종 그 사태를 두고, 원래 당한 이를 제외하고 사고나 불행은 다른 이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된다는 점까지 포함해서, 거의 모든 각도에서 생각해보았다.
“웃긴 일이야,” 내가 말했다. “그것도 상당히. 실제로 매우 재미있잖아,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거.”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의 눈동자는 다시 평평하게 보였다.
“내가 재미있다고 말한 건 그런 뜻이 아니야. 내 말은 충분히 즐길만한 요소가 많은 감정이라는거지.”
“아뇨,” 그녀가 말했다. “제 생각에 사랑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지옥이나 다름 없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를 바라본다는 거, 좋잖아.”
“아뇨.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러고 싶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저는 그래야만 해요.”
어느새 우리는 서로 처음 본 사람들처럼 앉아있었다. 오른쪽에는 몽수리 공원이 보였다. 송어들이 있는 수족관을 지닌 레스토랑은 언제든지 앉아서 공원을 구경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 그 날은 불이 전부 꺼진 채로 닫혀있었다. 운전사가 뒤를 돌아 우리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고 싶어?” 내가 물었다. 브렛은 그녀의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셀렉트에나 가죠.”
“셀렉트 바로 가주게,” 나는 기사에게 말했다. “몽파르나스 거리.” 택시는 몽루즈로 향하는 트램들을 지키고 서있는 벨포르의 사자상을 돌아 앞으로 향했다. 브렛의 두 눈은 계속해서 창밖을 향했다. 라스파이유 거리로 들어서서 몽루즈의 불빛들이 겨우 보이기 시작하자 브렛이 입을 열었다. “제가 뭘 부탁하면 화내실 건가요?”
“내가 화를 왜 내겠어.”
“바에 도착하기 전에 한 번 더 키스해주세요.”
택시가 멈추었을 때 난 차에서 나와 기사에게 차비를 지불했다. 모자를 고쳐쓰던 브렛은 차에서 내리면서 내게 그녀의 손을 맡겼다.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저 지금 어때요, 너무 이상해보이진 않아요?” 브렛은 남성용 펠트 모자를 벗고 바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바와 테이블에는 대부분 연회장에서 본 사람들로 가득차있었다.
“안녕, 자기들,” 브렛이 말했다. “난 술 한잔 좀 할게.”
“오, 브렛! 브렛!”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업으로 둔 키 작은 그리스인이 그녀에게 달려왔다. 그는 스스로를 기사라고 칭했지만 모두가 그를 지지라고 불렀다. “너가 좋아할만한 게 하나 있어.”
“안녕, 지지,” 브렛이 말했다.
“내 친구를 소개시켜줄게,” 지지가 말했다. 그의 뒤로 뚱뚱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피포폴루스 백작, 제 친구인 귀부인(*lady, 영국 왕족의 여자 후손을 가리키는 호칭) 애슐리와 인사하시죠.”
“안녕하세요?” 브렛이 말했다.
“네, 귀부인께선 파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가요?” 엘크의 이빨을 달린 시계줄을 차고 있던 미피포폴루스 백작이 물었다.
“네, 그럭저럭,” 브렛이 답했다.
“파리 정도면 괜찮은 동네죠,” 백작이 말했다. “그렇지만 귀부인이시라면 여기보단 런던에서 더 굉장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텐데요.”
“오, 그럼요,” 브렛이 말했다. “굉장하고 어마어마한 일들이 있죠.”
한편 테이블에 앉아있던 브래독스는 나를 불렀다. “반즈,” 그가 말했다, “여기 와서 술 한 잔 마셔. 너가 데려왔던 그 여자, 꽤나 시끄러운 소동에 휘말린 모양이던데.”
“무슨 소리야?”
“술집 여주인의 딸이 한 말이 문제가 됐나봐. 꽤 볼만했지. 그 여자도 아주 한성깔 하던데. 자기 카드(*yellow card, 과거 프랑스에서 매춘부임을 증명하는 노란색 카드)를 보여주면서 주인장 딸것도 보여달라고 하더라고. 난리도 그런 난리는 본 적이 없었지, 아마.”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아, 어떤 남자가 그 여자를 데리고 나갔어. 꽤 예쁘장했어. 어휘력도 엄청났고. 여기 앉아서 술이나 한 잔 해.”
“아냐,” 내가 말했다. “이제 가봐야 해. 로버트 봤어?”
“콘씨는 프란시스랑 일찍이 집에 갔어요,” 브래독스 부인이 대화에 불쑥 참여했다.
“딱하기도 하지, 아주 울상이던데,” 브래독스가 말했다.
“주제넘게 말하는거지만 저한테도 정말 그렇게 보이긴 했어요,” 브래독스 부인이 말을 더했다.
“이만 가봐야겠어,” 내가 말했다. “잘 자.”
나는 바에 앉아있던 브렛에게도 작별 인사를 건넸다. 백작이 때마침 샴페인을 한잔씩 돌리고 있었다. “저희와 와인 한잔 하지 않으시겠어요?” 그가 물었다.
“아뇨. 진심으로 고맙습니다만 이만 가봐야 합니다.”
“진짜 가는 거예요?” 브렛이 물었다.
“응,” 내가 답했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말야.”
“내일 볼 수 있는거죠?”
“사무실에 찾아오면 나를 볼 수 있을거야.”
“제가 사무실에 갈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흠, 그러면 어디서 볼 수 있을까?”
“다섯 시 쯤이면 아무데서나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 시간에 이 반대쪽 동네에서 보는 걸로 하지 그럼.”
“좋아요. 크릴론 호텔에 다섯 시까지 가있을게요.”
“정말 그 시간까지 있었으면 좋겠네,” 내가 빈정댔다.
“걱정하지 마요,” 브렛이 말했다. “여태껏 제가 실망시킨 적 없잖아요, 안 그래요?”
“마이크한테 뭐 들은 거 없어?”
“오늘 편지 한 통 보냈다던데요.”
“좋은 밤 되세요, 선생님,” 백작이 우리의 대화를 자르며 말했다.
난 바깥으로 나와 성 미셸 거리를 향해 걸으며 로통드를 지났다. 술집 안에 식탁들에는 아직도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있었고 길 건너에 있는 돔을 바라보니 그 안에 테이블들은 아예 거리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걸칠 정도로 나와있었다. 그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내게 손을 흔들었지만 난 누군지 확인하지 않고 계속 앞을 향해 걸었다.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몽파르나스 거리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라빈의 술집도 일찍 문을 닫아 라 클로즈리 데 릴라 앞에 테이블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난 조명 아래 새로이 잎이 피어오른 밤나무들 사이에 서있는 미셸 네 사령관의 동상을 지났다. 동상 바닥엔 빛깔이 많이 빠진 보라색 화관이 동상 밑동에 기댄 채 서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동상에 적힌 말을 읽어보았다. 그가 나폴레옹을 지지하던 시절부터 특정 시기까지 분명히 읽었었지만, 지금은 거기에 어떻게 적혀있었는지 전부 잊었다. 탑 부츠를 신고 밤나무들 사이에서 칼을 뽑아든 그의 모습은 근사해보였다. 내가 사는 집은 저기 건너편, 성 미셸 거리를 조금만 더 걸어내려가면 있었다.
관리실에 불이 켜져있었기에 나는 문을 두드렸고 관리인은 내게 편지를 건네줬다. 난 그녀에게 좋은 밤을 보내라고 인사를 건네고 집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내 손에는 편지 두 통과 종이들 몇 장이 쥐어져있었다. 식탁의 램프 밑에 서서 그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편지는 둘 다 미국에서 온 것이었다. 하나는 계좌 내역서였는데, 내 잔고가 총 $2432.60가 남아있다고 적혀있었다. 수표 사용 내역서를 꺼내 달의 첫날부터 사용한 네 개의 수표지에 적힌 액수를 제하자 내게 총 $1832.60의 잔고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숫자를 그대로 내역서 뒤에다가 기입해두었다. 다른 편지는 청첩장이었다. 앨로시우스 커비 씨와 그의 아내가 그들의 딸 캐서린의 결혼을 알리는 내용이었지만 난 그들의 딸도, 그녀가 결혼할 남자도 정확히 아는 바가 없었다. 마을 전체에 이 소식이 돌고 있을 게 눈에 훤했다. 그렇지 않기에는 앨로시우스란 이름이 너무도 웃겼다. 아마 그런 이름을 한 사람을 잊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좋은 세례명이었다. 그 덕에 청첩장에도 조금 특이한 느낌이 묻어났다. 마치 ‘그리스인 기사, 지지’처럼. 아니면 그 백작처럼. 백작도 웃겼다. 브렛에게도 타이틀이 있었다. 귀부인 애슐리. 얼어죽을. ‘귀부인 애슐리’는 무슨.
난 침대 옆에 놓인 램프에 불을 붙이고 가스를 끈 뒤에 창문을 활짝 열었다. 침대는 창문과 꽤 멀리 떨어져있었는데 나는 침대 옆에 앉아 창문 밖을 보았다. 바깥에서는 마켓으로 가져갈 채소들을 짊어진 전차가 차로 위를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저만큼 시끄러운 것도 없었다. 옷을 벗으면서 침대 옆에 놓인 큰 옷장에 달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프랑스에서는 이런 구조가 보통이었다. 꽤 실용적인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마음에 상처를 입힐만한 다른 수많은 방법들을 떠올려봐도 말이다. 나는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투우 소식지가 두 개 보여서 포장지를 뜯었다. 하나는 오렌지색 소식지였고 다른 하나는 노란색이었다. 둘 다 같은 소식을 담고 있기에 뭘 먼저 읽든 간에 다른 소식지의 내용까지 다 미리 알게 되어버릴 것이었다. ‘레 토릴(Le Toril)’이 둘 중 그나마 더 나은 소식지였기에 ‘레 토릴’부터 읽기로 했다. 조그마한 비평문과 투우와 관련된 상품들을 홍보하는 지면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소식지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입바람을 불어 램프불을 껐다. 이 정도까지 했으니 잘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머릿속에 스멀스멀 생각들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놈의 옛생각들. 이탈리아 놈들처럼 별 시덥지도 않은 전장의 전방으로 부상을 입고 후송되던 기억은 지금 돌아봐도 퀴퀴한 일이었다. 이탈리아 병원에서 우리는 일종의 사회를 만들려고 했었던 것 같다. 이탈리아어로 재미있는 뜻을 가진 이름까지 있었다. 밀라노에 위치해있던 그 병원의 이름은 ‘파디글리오니 퐁테’였다. 그 옆 병원의 이름은 ‘파디글리오니 존다’였다. 그곳에는 퐁테의 석상이 있었는데, 이제와서 돌이켜보니 그 석상이 퐁테였는지 존다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 당시 양쪽 부대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하던 대령이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흥미로웠던 사건으로 기억한다. 그게 아마 당시 처음으로 재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온몸에 붕대를 매고 있었는데 이미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내 상태를 알려준 모양이었다. 나를 찾아 여태껏 내 기억에 남아있을만큼 아름다운 연설을 남겼다. “그대, 외국인, 영어를 쓰는 자여,” (당시 이탈리아에는 모든 외국인이 영어를 쓰는 사람이었다.) “그대는 이 나라에 당신의 삶보다 더 고귀한 것을 바쳤소.” 이 얼마나 굉장한 연설이란 말인가! 아예 그가 한 말을 따로 출력해서 내 사무실 어딘가에 붙여두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말하면서 한번도 웃지 않았다. 아마 내 상황에 자신을 제대로 이입한 모양이었다. 대령은 내 하반신 쪽을 흘겨보며 이탈리아어로 이렇게 외쳤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한 번도 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 제대로 느낀 적이 없었던 것만 같다. 그간 나는 주변 분위기를 따라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방법만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아마 내가 처음 영국에 도착했을 때 브렛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까지도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살고 있을 터였다. 내 생각에 브렛은 그녀가 가지지 못하는 것만 골라서 원했던 것 같다. 뭐,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은가. 모든 사람들은 무슨, 얼어죽을. 이런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가톨릭 교회는 굉장한 접근법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나 저러나 그들이 말하는 바는 결국 모두 좋긴 했다. 무심코 놓치기에 그들은 꽤 괜찮은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고 말고. 언젠가 한 번 실제로 삶에 적용해보시길. 꼭 한 번 그럴 기회가 당신에게도 있길.
나는 드러누운 채로 내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피어오르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더이상 생각을 감당할 수 없게될 쯤에 브렛을 떠올렸더니 나머지 모든 잡생각들이 사라지면서 머릿속은 부드러운 파도가 치는 바다처럼 고요해졌다. 그리고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자 점차 조금씩 기분이 나아졌고 난 침대에 누워 커다란 전차들이 창문 저편을 지나 저멀리까지 달려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마저도 지난 후에는 잠에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난 잠에서 깼다. 집밖에서 무슨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리를 들어보니 그 중 내가 아는 목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다. 난 드레싱 가운을 걸쳐입고 현관으로 내려갔다. 경비가 아래층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경비원은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얼핏 내 이름이 들리는 것 같아 아래층에 무슨 일이냐고 큰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몽슈 반즈 님이신가요?” 경비가 답했다.
“예, 저입니다만.”
“지금 이 이상한 여자가 온동네 사람들을 다 깨우고 있어요. 이렇게 야심한 밤에 이런 짓을 하다니! 여자 말로는 당신을 꼭 봐야한다네요. 우선 주무시고 있다고 말은 해봤습니다만…”
그 후에 브렛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몸이 덜깼는데도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챌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몰랐다. 그녀가 내 주소를 외우고 있을리가 없었다.
“위로 보내주시겠어요?”
브렛은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꽤 취한 모양이었다. “나도 참 바보같지,” 그녀가 말했다. “이렇게 시끄럽게 일을 벌이다니 말이에요. 설마 주무시고 계시던 건 아니죠?”
“이 시간에 내가 안 자고 뭘 하겠어?”
“그건 저도 잘 모르죠. 몇시예요?”
난 시계를 바라봤다. 네시 반이 넘은 시간이었다. “몇 시인지 아예 몰랐어요,” 브렛이 말했다. “앉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너무 뭐라하지 마요, 자기. 방금까지 백작과 있다가 오는 길이에요. 그 사람이 저를 여기에 데려다줬어요.”
“그 사람은 어때?” 나는 브랜디랑 소다수, 그리고 잔 두 개를 준비했다.
“조금만 따라줘요,” 브렛이 말했다. “저를 취하게 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백작이요? 괜찮은 사람이에요. 우리같은 부류예요.”
“그 사람, 정말 백작이야?”
“제가 보기엔 그래요. 적어도 뭐, 그냥 그렇지 않을까… 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사람들에 대해서 엄청 잘 알아요. 어쩜 그렇게 많이 아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미국에서 과자 가게를 여러 개 운영하나봐요. ‘체인’이라나?”
그녀는 잔에 있는 술을 홀짝였다.
“적어도 지금 기억으로는 분명히 체인이라고 말했던 것 같아요. 대충 그 비슷한 표현을 했어요. 체인처럼 전부 하나로 묶는거죠. 그 개념에 대해서 조금 말해줬는데 굉장히 흥미로웠죠. 그래도 확실히 우리과예요, 그 사람. 그건 장담하죠. 같은 유형의 사람들끼리는 언제든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니까요.”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거 오늘 밤 미안해서 어쩌죠? 기분이 많이 상한 거 아니죠? 지금 백작은 밖에서 지지의 쓸데없는 소리나 들어주고 있어요.”
“그럼 지지도 정말 기사 작위가 있는거야?”
“뭐, 그렇게 신기할 일도 아니죠. 그리스인들이 원래 그렇잖아요. 그림도 못그리는 화가 기사라니. 저는 차라리 백작이 더 나은 것 같아요.”
“백작이랑 어디를 다닌거야?”
“오, 많은 곳을 들렸어요. 이제서야 저를 여기에 데려다 줬죠. 제게 만 달러를 쥐어주면서 비아리츠에 함께 가자고 하더군요. 일만 달러가 파운드로는 얼마죠?”
“거의 이천 정도.”
“많기도 하네요. 근데 전 못 간다고 했어요. 그 사람은 정말 신사답게 제안했죠. 저는 비아리츠에는 제가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말하면서 거절했어요.”
브렛은 웃음을 터뜨렸다.
“술을 너무 천천히 드시는 거 같은데,” 그녀가 말했다. 내 브랜디와 소다수를 한번 홀짝이기만 했던 터였던 나는 크게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니까 훨씬 낫네요. 재밌어요,” 브렛이 말했다. “그 다음에 그가 함께 칸에 가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칸에도 제가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말했죠. 그 다음엔 몽테 카를로를 얘기해서 거기에도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얘기해줬어요. 백작이 또 다른 제안을 하기 전에 저는 전국 방방곡곡에 제가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일러줬어요. 틀린 말도 아니죠. 그 다음엔 백작한테 그냥 저를 여기에 데려다달라고 말했어요.”
그녀는 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테이블에 올려둔 손으로 잔을 들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 사람한테 저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이것도 틀린 말이 아니죠.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백작도 충분히 이해했어요. 내일 밤 저희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어요, 같이 가실래요?”
“가지 않을 이유도 없지.”
“이제 저는 가봐야겠어요.”
“왜?”
“그냥 당신 얼굴이 보고 싶어서 들른거예요. 제가 멍청했죠. 옷 입고 저랑 같이 내려갈래요? 거리 위쪽에 백작이 차를 준비시켜놨어요.”
“백작이?”
“네, 백작이 여기 있어요. 운전수는 아예 정복을 차려입고 있죠. 저와 함께 드라이브를 즐기다가 부와에서 함께 아침 식사를 하자고 했어요. 차 안에는 과자가 잔뜩 담긴 바구니들도 있어요. 모두 젤리즈에서 구한 과자더라구요. 멈 샴페인도 열몇 병 있었어요. 구미가 조금 당기지 않으세요?”
“아침에 일을 하러 가봐야 해,” 내가 말했다. “게다가 지금 당신의 술기운을 따라잡기에는 지금 너무 피곤해서 별 재미도 볼 수 없을거야.”
“애처럼 굴지 마요.”
“못간다니까.”
“알겠어요. 백작한테 뭐라고 말이라도 전해줄까요?”
“그러면 좋지. 아무런 안부인사라도 전해줘.”
“잘 자요, 자기.”
“너무 감상적으로 굴지는 말자고.”
“정말 못 당하겠네요.”
우리는 밤인사로 살짝 입을 맞췄고 브렛은 몸을 떨었다. “이제 가봐야 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잘 자요, 자기.”
“꼭 가지 않아도 되잖아.”
“가봐야만 해요.”
우리는 계단을 내려가 한 번 더 입을 맞췄고 경비를 부르자 경비는 그녀의 사무실에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창문을 통해 거리 저편에 서있는 커다란 리무진으로 걸어가고 있는 브렛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차에 올라타자 리무진은 바로 출발했다. 나는 다시 뒤로 돌아섰다. 테이블 위에는 빈 잔 하나와 브랜디와 소다수로 반 정도 차있는 잔 하나가 놓여있었다. 난 두 잔을 들고 부엌에 가서 내용물을 싱크대에 전부 부어버렸다. 나는 다이닝룸에 가스를 끄고 침대에 앉아 슬리퍼를 벗어 던진 뒤에 그대로 뒤로 뻗어버렸다. 지금 이 울고 싶은 기분은 전부 브렛이 불피운 감정이었다. 난 마지막으로 그녀를 봤던, 거리 저쪽으로 걸어가 차에 올라타던 그녀의 뒷모습을 한 번 더 떠올려보고는 다시금 개같은 기분을 들이켰다. 해가 떠있는 동안 만사에 별일 아닌 양 남자답게 버티고 서있는 건 너무나도 쉬웠지만 밤에는 좀처럼 그게 잘 안 됐다.
*원문 출처: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The Sun Also Rises'를 번역했습니다. 이 작품은 올해, 2022년 1월 1일에 들어서 자유 이용 저작물로 등록되었으며 책을 볼 수 있는 링크는 여기에 남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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