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1. 21:10ㆍ번역/비문학
The Task of the Translator
번역가의 진정한 역할
글쓴이ㆍ발터 벤야민
번역ㆍ오성진
Part 3
번역가의 역할을 위와 같은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번역가에게 과연 올바른 길이란 어떤 길일지, 훨씬 더 애매하고 이해불가한 형태로 보인다. 실제로 순수 언어의 씨앗을 번역이라는 형식 안에 심어다가 온전히 클 때까지 기다리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생각해보자, 한 문서에 담긴 메세지를 재생산해내는 과정이 더이상 날카롭게 처리될 수 없는 경지에서 멈춰버린다면 이러한 끝을 전제로 하는 기반으로 세워진 땅에, 그 안에 어떤 씨앗이 있다고 한들, 커다란 구멍이 생기는 것은 시간 문제 아닌가? 이 질문을 회의적인 시선을 통해서 바라본다면, 번역에게 있어 앞으로 나아갈 길은 정말 이렇게 생겼을 뿐일 것이다. 번역을 논하는 자리에서 전통적으로 사람들 입에 자주 올라오는 개념들로는 작품에 대한 충실성(fidelity)과 저작권(license), 즉 작품의 메세지를 재생산하는 데 있어서 충분한 자유를 부여받을 권리와 각각의 단어들에 충실해야 하는 특징이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바로 예부터 이 두 가지 표현은 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싸움을 지속하고 있는 것 처럼 여겨져 왔다는 점이다. 과연 자율성이라는 명목으로 의미를 바꾸는 도중 충실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각각의 단어들을 따로 충실하게 번역한다면 결코 원문에서 전달하려던 메세지를 그대로 재생산해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문에서 특정 시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바로 이 메세지라는 것이 직접적으로 내재적인 의미와 연관되지 않으며, 그 중요성이 너무도 짙어서 내재적 의미가 각각 단어의 표면적인 의미에 속박되어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단어들 안에 감정적인 속뜻이 따로 있다고 말할 때 바로 이런 경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통사(syntax)를 정말 단어 그대로 바꾸는 일은 해당 번역의 성공률을 완전히 운에 맡긴 재생산을 해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며 이를 통해 문서는 이해 불가 상태에 놓일 직접적인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19세기의 사람들은 횔덜린이 번역한 소포클레스의 작품들을 보며 위와 같은 과도한 직역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알려져있다. 결국 충실성이라는 것이 메세지를 옮겨오는 데 있어 하나의 형식을 재생산해내는 과정에 거대한 장애물을 부여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경우에라도 문자 그대로 말을 옮기는 방식은 원본의 본래 의미를 지키기 위해 쓰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갖가지 자유를 부여받은 형편 없는 번역가들은 본문의 의미를 보존하는 일까지는 훨씬 더 능률적으로 해낼테지만 언어 그 자체와 문학에게는 훨씬 더 보다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야하는 이유는 명확하지만 정작 진정한 기능은 저 밑에 숨겨져 있는 문자 그대로의 번역은 한 번 더 조금 더 설득력 있는 주장과 함께 이해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다. 깨져버린 그릇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이기 위해서는 조각들이 이어지는 면끼리, 가장 작은 단위까지, 서로 모양이 같아야 하지만 조각의 모양만 놓고 보자면 각각의 조각이 서로 비슷하게 생기지 않더라도 문제가 없지 않은가? 번역 또한 이와 같은 원리로 원본의 메세지를 모방하는 대신, 정성스럽고 세세하게 원본의 표면적 의미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원본과 번역본 둘 다 깨진 그릇 조각들 처럼 거대한 언어의 조각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번역은 거시적으로 무언가를 단순히 전달하려는 태도나 메세지만을 그대로 전달하려는 자세에서 벗어나야만 하며, 이 과정에서는 원본이 얼마나 번역가에게 전달하려는 바를 정리하고 표현해냈는지가 가장 큰 중요성을 띈다. 번역의 영역에 있어서도 바로 “En arche ên ho logos”(“태초에 그 단어가 존재했다”)라고 하는 말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번역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스스로를 내버릴 수 있어야 하고, 실은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단순 재생산이 아닌 조화로움 안에서 원본의 진정한 의도에 목소리를 실어주는 번역, 바로 원본이 사용했던 언어와 함께 ‘하나의 언어’를 보충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역에게 있어서, 특히나 원본이 나온 시기에는 더더욱이, ‘처음부터 이 언어로 쓰인 것만 같다’ 따위의 말은 전혀 칭찬이 되어주지 못한다. 그보다는 문자 그대로의 번역을 해내는 충실성이야말로 원본이 언어적인 보충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진정한 번역은 투명한 번역이다. 진정한 번역은 원문을 덮어버리거나 원문을 비추고 있는 빛을 가리려고 하지 않으며 순수 언어가 한 번 더 원본 위에 전보다 더 밝은 빛이 내리쬘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번역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경지의 번역은 번역가에게 있어서 문장 보다는 각각의 단어가 더 핵심적인 존재임을 증명해주는 ‘통사 구조의 문자 그대로의 번역'을 통해 다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문장을 원본의 언어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벽이라고 본다면, 이런 식의 문자 그대로의 번역은 원문의 언어가 뛰놀수 있는 놀이공원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번역 내의 충실도와 자율성은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 경향이라고 알려져 왔다. 물론 위에 적은 것과 같이 둘 중 한 쪽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 보는 해석을 통해 둘 사이에 간격을 좁혀졌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며, 오히려 이렇게 한 쪽에 강력하게 기울어진 설명은 다른 설명들을 다 멀리 떨어뜨려 버리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말마따나 본문에서 전달하려는 바를 그대로 옮기기 위해 발동하는 자율성이 진정한 번역을 위해 쓸모가 없다고 한다면, 과연 자율성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번역물은 오로지 문학 창작물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 안에 표면적으로 담긴 정보와 일치하는 경우에만 모든 소통방식을 뛰어넘는, 확실하고 궁극적인 요소를 통해서만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성공할 수 있으며, 이 요소는 원문의 번역 가능성에 따라 독자들과 상당히 가깝지만 무한한 거리를 두고 있으며, 숨겨져 있거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며, 조각이 나있거나 상당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언어와 언어 창작물에는 전달 가능한 것, 그리고 노력을 하더라도 표현하지 못하는 요소들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후자의 경우, 어떤 문맥에서 나타나냐에 따라 무언가를 상징하거나 무언가에 의해 상징 되어지곤 한다. 이와 같은 요소들은 언어의 유한한 생산물 안에 있을 경우에만 무언가를 상징하고 있을 것이며, 매순간 진화하는 언어들 속에서는 무언가에 의해 상징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진화하는 언어 속에서 모습을 나타내는(궁극적으로 진정한 의미를 생산해내기 위해) 요소야말로 순수 언어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으며, 이 핵심 요소는 스스로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 깨진 조각이나 숨겨진 형태로 - 세상에 존재하지만, 언어 창작물 안에서 자신이 상징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존재하기를 고집한다. 실제 사회에서 쓰이는 다양한 언어 속에서 궁극적인 본질, 즉 순수 언어가 단순히 언어적인 요소들과 그들의 변화에 붙잡혀있는 반면에 언어 창조물들 안에서의 순수 언어는 원문의 언어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무거운 의미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순수 언어를 이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일, 무언가를 상징하는 상태에서 자신 스스로를 드러내게끔 도와주는 일, 그리고 매순간 변화하는 언어의 흐름 속에서 본 순수 언어로서의 상태를 되찾게 해주는 일은 번역의 위대한, 그리고 유일한 능력이다. 더이상 무언가를 의미하거나 표현하지 않고 단순히 그 자체가 된 이 순수 언어는 모든 정보와 모든 메세지, 그리고 모든 의도가 마침내 그들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 언어의 층계로 올라가게 된다. 순수 언어가 바로 이 층계에 올라온 뒤에서야 번역가는 번역의 자유성의 보다 새롭고, 고차원적인 정당성을 부여받으며 일전에 말했던 충실성의 역할이 바로 원본의 메세지에서 해방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정당성은 원본에서 전달 되려는 메세지로부터 발단되는 것이 아닌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보다 정말 번역에서의 자율성이 이 높은 층계에서 증명해내는 것은 바로 번역 안의 자유가 자신의 언어 안에서의 영향을 통해 순수 언어로의 길을 이바지한다는 점이다. 번역가의 역할은 자신의 언어 속에 위와 같은 순수 언어를 풀어줌으로써 자신의 재창작물 안에서 원문 안에 갇혀있던 언어를 구해주는 것이다. 번역가는 바로 이 순수 언어를 위해 자신의 언어 안에 존재하던 썩어 빠진 장애물들을 뚫고 나가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루터, 보스, 횔덜린, 그리고 조지는 독일어의 한계를 넓혀주었다. -- 원문과 번역본의 관계에서 중요한 존재인 원문의 메세지 중 뭐가 남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적힌 직유적 표현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탄젠트 곡선이 원에 살짝 닿는 순간, 그 지점에서부터라기 보다는 바로 그 원에 닿는 행위, 그 자체를 기점으로 계속해서 무한을 향해 쭉 나아가는 것과 같이 번역 또한 원문을 살짝 건드리기만 할 뿐, 원문의 메세지와 무한히 작은 한 지점에서 만난 뒤에서야 요동치는 언어의 흐름 속에서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충실성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길을 당차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루돌프 팬위츠(Rudolf Pannwitz)는 이러한 개념에 끈질기도록 이름을 붙이려고 한다던가 너무 많은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도 이러한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성공적으로 묘사했다. 그가 생각해낸 이론은 그의 저서인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Kultur’에 기술되어 있으며 이는 괴테의 ‘Westosticher Divan’과 함께 독일에서 출간 된 번역 이론서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팬위츠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는 번역은, 이것은 최고의 번역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모두 결점이 있는 전제로부터 시작된다. 번역가들은 독일어를 힌디어, 그리스어, 영어로 바꾸는 대신에 힌디어, 그리스어, 영어를 독일어로 바꾸고 싶어한다. 우리 나라의 번역가들은 해외 작품들에 담긴 정신보다 자국의 언어를 사용하는 데 훨씬 더 높은 경외심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번역가가 범하는 가장 기본적인 유형의 오류는 바로 자신의 언어로 하여금 해외의 언어에 흠뻑 젖을 수 있게끔 허용하는 대신에 자신의 언어가 현재 처한 위치를 그대로 고수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번역가는, 특히 자신의 언어와 상당한 거리를 지닌 언어를 번역할 때, 반드시 언어 그 자체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들을 되짚어봐야만 하며 작품과 작품이 그려내는 이미지, 그리고 작품에 담긴 톤(tone)이 하나로 뭉치는 지점까지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야만 한다. 번역가는 반드시 다른 나라의 언어 수단을 통해 자신의 언어를 더 넓고, 더 깊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조건을 통해 이러한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어떤 언어가 얼마나 많은 변화를 거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나의 방언이 다른 방언과 차이를 가지는 것 처럼 각각의 언어들 사이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없다. 하지만 각각의 언어들 사이의 차이가 정말 있는지 아닌지는 한 개인이 언어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그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번역이 이러한 형식의 본질과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는지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나타나는 본문의 ‘번역 가능성’을 통해 정해진다. 원문에 쓰인 언어의 수준과 특색이 떨어질수록, 그 텍스트가 ‘단순 정보’의 글, 즉 번역에게 있어 결실을 맺기 힘든 영역에 그칠 가능성이 높아지며, ‘좋은 번역'이 될 확률이 낮아지면서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반면에 원문의 수준이 높을수록 번역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아주 잠깐만 닿는다고 하더라도 번역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와 같은 원리를 가진 잣대는 오직 원문에게만 들이밀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번역이 번역 불가능 상태로 진입하게 되는 현상은 그 안에 내재된 특수한 문제점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얼마나 번역과 떨어졌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횔덜린은 그의 번역, 특히나 그가 번역한 소포클레스의 두 가지 비극을 통해 위와 같은 논리와 번역에 있어서 중요한 다른 방면들의 정당성 또한 뒷받침해준다. 그의 번역물 안에서 나타나는 언어 간의 조화는 너무도 굉장해서 마치 바람이 에올리언 하프(*aeolian harp, 바람과 닿으면 저절로 소리를 내는 하프)에 닿은 것 처럼 언어와 원본의 메세지가 닿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횔덜린의 번역은 그 자체로 번역이라는 형식의 일종의 프로토타입처럼 여겨져왔으며, 한 가지 모델에 프로토타입이 자리잡은 위치와 같이 횔덜린의 번역본들은 특정 문서들을 가장 완벽하게 번역한 세상에 다양한 번역본들에게도 비슷한 존재로 존재한다. 이와 같은 관계는 핀다로스(*Pindar,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서정시인)의 『파티아 송가 제3 번(Third Pythian Ode)』를 두고 번역한 횔덜린의 번역본과 루돌프 보차르트(Rudolph Borchardt)의 번역본의 비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횔덜린의 번역은 모든 번역본 안에 처음부터 존재하는 상당한 위협과 마주쳤으며, 이 위협으로 인해 바로 번역으로 인해 점차적으로 커지고 변화를 거치는 언어의 대문이 언젠가 번역가가 그 안에 빠져 묵살된 채로 문이 잠길 수도 있다. 횔덜린이 번역한 소포클레스의 작품들은 그의 마지막 번역물이었는데, 그 번역본 안에서 의미는 언어의 끝도 없는 바닥으로 내려가 자취를 감출 때 까지 심연과 심연 사이를 돌아다니는 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이러한 흐름에도 분명 끝이 있다. 이는 그 안의 의미가 더이상 언어의 흐름, 계시(revelation)의 흐름을 구분 짓는 분수계(watershed)로써의 역할을 하지 않는 성경(Holy Writ)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조금의 타협도 없이 문서를 그대로 충실하게 번역한 부분이 진실된 언어 안에서, 그리고 진실 그 자체, 또는 교리 안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글은 더 이상의 단계가 없을, 가장 높은 번역 가능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면 이러한 번역은 더 이상 원문의 목적을 위해 쓰이지 않으며, 오히려 언어 그 자체에 기여를 해준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 번역가는 번역을 해나가는 도중에 한계를 두지 않은 자신감을 필요로 하며, 그를 통해 원문 안에서 언어와 계시가 아무런 마찰 없이 통합된 것 처럼 번역은 마치 행간에 존재하는 내용을 표현하듯이 자유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원문에 있는 문자 그대로의 번역을 해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모든 위대한 글들은 행 사이사이에 그들만의 번역될 수 있을만한 내용들을 남겨놓았으며, 이는 세상 모든 신성한 문서들에게 적용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를 행간마다 옮겨놓은 문서야 말로 세상 모든 번역의 진정한 포로토타입, 또는 이상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은 1921년에 쓰였으며, 찰스 보들레어(Charles Baudelaire)지에 출간되었습니다. 발터 벤야민이 독일어로 작성된 이 글은 1923년, 해리 존(Harry Zohn)이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원문 출처: 자유 이용 저작물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The Task of the Translator'을 번역했습니다. 원문을 구할 수 있는 링크를 여기에 남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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