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1. 14:58ㆍ번역/비문학
The Art of Loving
사랑이라는 이름의 예술
글쓴이 · Erich Fromm
번역 · 오성진
Page 22 - 38
(...)
사랑은 수동적으로 이루어지는 특정 영향 같은 개념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행하면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즉 사랑은 “그 안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직접 들어가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거시적으로 봤을 때, 사랑의 활동적인 성격은 근본적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닌, 바로 주는 데에 있다는 점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준다는 것은 어떤걸까? 쉬워 보일지도 모르는 질문이지만 사실 준다는 행위가 무엇인지,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그 안에 애매한 부분들과 복잡한 요소들이 가득하다. 무언가를 준다는 행위가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불러온 오해는 바로 “줌"으로써 무언가를 “내놓는"다거나, 줌으로써 결핍이 생기거나, 아니면 희생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받기만 하고, 착취하며, 호딩(*hoarding, 버리지 못하고 쌓아만 두는 행위를 일컫는다)하는 단계에서 아직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준다는 행위를 위와 같이 판단할 수 있다. 관계 안에서 서로의 이익과 손해를 생각하는 성격의 인물은 주는 데 인색하지 않다, 하지만 오직 준 만큼 돌려받는 것이 보장되어 있을 때 그렇다는 것이지, 그에게 있어서 보상도 없이 주는 행위란 마치 사기 행각과 같다. 비생산적인 성격으로 주로 이루어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는 행위란 무언가를 잃는 행위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렇기에 이런 성향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는 것을 껄끄러워 한다. 어떤 이들은 주는 행위를 희생이라고 여기며 일종의 신성한 행위인 것 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단지 준다는 행위를 통해 겪는 고통을 겪기 위해서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는 행위란 숭고한 희생의 쓴 맛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행위인 것이다. 그들에게,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좋다는 사회적 인식은 그들의 태도에서 오로지 즐거움을 느끼는 것보다 상실의 고통을 겪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는 지점에서만 맞닿는다. 그렇지만 생산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 주는 행위란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는 행위란 가장 강력한 효력을 지닌 표현이다. 나는 주는 행위를 통해서 나의 힘, 나의 재력, 그리고 나의 영향력을 경험한다. 영향력과 활력으로 고조된 이 경험은 나를 즐거움으로 채워준다. 주는 행위를 통해서 나는 스스로를 엄청나게 여유롭고, 베풀줄 알며, 살아있는, 곧이어 즐거운 존재로서 인식한다. 주는 행위는 받는 행위보다 더 즐겁다, 그 이유는 주는 행위를 통해 나의 자원이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내가 얼마나 살아있는지를 표현하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현상에 그대로 적용되는 이 원리의 실효성을 확인해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 중에 가장 기본적인 예시는 섹스의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섹스에 있어서 남성의 기능은 바로 주는 행위에 있다, 남성은 자신을, 그리고 그의 성기를 여성에게 준다. 오르가즘에 다다르는 순간에 남성은 그녀에게 자신의 정액을 준다. 그에게 남성으로서의 힘만 있다면 그에게 정액을 사정하는 일이란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만약 그가 사정할 수 없다면, 그에겐 힘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여성에게 있어서도 섹스의 과정은, 조금 더 복잡할 뿐, 남성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녀도 그녀 자신을 준다. 그녀는 그녀의 여성적 중앙으로 이끌어줄 문을 열어주고, 그 안에서 받는 행위를 통해 그녀는 주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방식의 주는 행위가 그녀에게 어렵다면, 그러니까 만약 그녀가 받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다면, 우리는 그녀를 보고 비인간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성에게 있어서 주는 행위는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기능에서가 아니라, 엄마로서의 사랑에서 다시금 한 번 더 발현된다. 그녀는 그녀 안에서 자라는 아이에게 자신을 주며,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함을 준다. 주지 못한다는 것은 실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물질적인 영역에 있어서 또한 준다는 행위는 자신이 부유한 사람임을 의미한다. 결국엔 가진 것이 많은 자가 부유한 자인 것이 아니라 주는 자가 부유한 자인 것이다. 무언가를 잃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 하는 호더(*위에서 말한 ‘호딩(Hoarding)을 하는 사람')는, 심리학적으로 보았을 때, 그가 얼마나 갖고 있는지를 떠나서 가난한 자이다. 누구든지간에 줄 수 있는 사람이 곧 부유한 자이다. 생존에 필수로 하는 것들 외로 모든 면에서 결핍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물질적인 것들을 주는 행위를 즐기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겪는 경험에 따르면 각각의 사람이 최소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들을 생각하는 기준은 그가 실제로 얼만큼 소유하는지에 기인하는 것 만큼 그의 성격 또한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부자들보다 가난한 자들이 더 주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수준 이상의 가난은 개인으로 하여금 도무지 주지 못하는 수준으로 빠지게 만들 것이며, 이는 그에게 있어서도 너무나 수치스러운 일일 것이다. 여기서 그가 느끼는 수치심은 가난으로 인해 피어 오른 고통에서 생긴다기 보다는, 가난으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무언가를 줌에서 오는 즐거움을 느낄 기회를 박탈당한데서 발생할 것이다.
그렇지만 준다는 행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질적인 면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본성적인 면에서 부터 기인한다. 한 개인이 다른 이에게 무엇을 줄 수 있나? 그는 바로 자신을, 즉 그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자신의 삶을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는 한 개인이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의 삶을 실질적으로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고, 자신 안에 있는 살아있는 부분, 즉 그의 즐거움, 그의 취향, 그가 이해한 세상의 진리, 그의 지식, 그의 유머, 그의 슬픔, 등등 자신 안에 살아 숨쉬는 감정들을 건네주는 것이다. 고로 이러한 방식으로 그의 삶을 건네는 행동을 통해 그는 다른 사람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며, 그 스스로도 살아있다는 느낌을 키워나가면서 다른 이로 하여금 또한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더 키우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그는 무언가를 보상으로 되돌려 받기 위해 자신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는 행동 자체가 곧 그에게 엄청난 즐거움인 것이다. 그럼에도 준다는 행동을 통해 한 개인은 타인 안에 있는 어떤 요소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 밖에 없으며, 생명으로 피어오른 이 감정이 다시 그에게 비춰지게 되는데, 이를 통해 주는 이는 자신이 준 것을 결국 그대로 되돌려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주는 행위는 타인도 주는 사람으로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며 주는 이와 수용자, 둘 다 서로를 위해 생명의 꽃을 피운 삶을 보고 함께 기뻐하게끔 만든다. 특히나 이 원리를 사랑에 적용해보자면 이 뜻은 사랑은 또다른 사랑을 생산하는 힘을 일컬으며 상대 위에 군림하려는 힘은 사랑을 생산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마르크스에 의해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상상해보아라,” 마르크스가 말했다, “한 인간다운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세상과 인간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그리고 당신은 사랑을 오로지 또다른 사랑과, 자신감은 또다른 자신감과 교환할 수 있다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만약 예술을 즐기고 싶다면 당신은 예술적으로 훈련된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신이 만약 다른 이들에게 영향력을 펼치고 싶다면 무조건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뻗어나갈만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당신이 타인과, 그리고 세상과 맺은 모든 관계는 당신의 의지가 향하는 객체에 당신만의, 진실된, 그리고 개인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다른 말로 하자면, 만약 당신의 사랑이 또다른 사랑을 생산해내지 못한다거나 살아있는 감정을 표현하는 과정에 있어서 당신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딱하게도 힘이 없는, 안타까운 감정일 뿐이다.” 하지만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 되는 원리는 사랑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선생은 자신의 학생에게서 배우며, 연기자들은 관객들에게 자극을 받고, 심리 상담사는 자신의 환자를 통해 치유를 받기도 한다 -- 그들이 서로를 단순한 물체로 여기지 않고 그들 사이에 진실된, 그리고 생산적인 연결고리를 유지한다면 말이다.
주는 형태의 사랑을 얼만큼 해낼 수 있는가가 한 개인 안에 형성된 성격에 달려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한 형태의 사랑이 가능한 개인 안에는 주로 생산적인 의지가 들어있다고 가정하는데, 이는 그 개인이 남에게 의존하는 정도, 나르시시즘으로 인해 자신에게 무한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 다른 이들을 착취, 또는 단순히 수집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과연 극복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지닌 인간적 힘을 신용하기 시작하며 그의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 속에서 온전히 그의 힘에 기대는 데에 조금씩 익숙해졌는지를 기준으로 결정되는 바이다. 위에 나열된 각각의 조건들과 얼마나 멀리 있는지에 따라 사람은 다른 이에게 자신을 주는 행위를 두려워하며, 결국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아 버린다.
주는 행위 말고도 적극적인 사랑의 요소들은 모든 형태의 사랑에 전부 적용된다는 점에서 언제나 선명하게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로는 ‘보살핌(care)’, ‘책임(responsibility)’, ‘존중(respect)’, 그리고 ‘앎(knowledge)’이 있다.
아이를 향한 엄마의 사랑에서 사랑이라는 감정 안에 보살핌이라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은 가장 명확하게 두드러진다. 그녀가 만약 아이를 보살피는 데 있어서 부족하거나, 밥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 소홀하다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녀의 사랑의 진실성에 의문이 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만약 어머니가 아이를 제대로 보살피는 장면을 본 사람들은 크게 감명을 받을 것이다. 만약 한 여성이 우리에게 그녀가 꽃을 좋아한다고 말했음에도 그녀가 꽃에 물을 주기를 까먹는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향해 지녔다고 주장하는 그녀의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랑이란 생명,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의 성장을 바라보며 느끼는 적극적인 관심이다. 이러한 관심이 결핍된 사랑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이 요소는 요나서(the Book of Jonah)에 명쾌하게 기술되어있다. 신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Nineveh)로 가서 그곳의 지역민들에게 그들의 악행을 멈추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라 말씀하셨다. 요나는 니느웨의 사람들이 참회를 하고 신께서 그들이 용서하실거라는 두려움에 자신의 임무에서 도망가버린다. 요나는 규칙과 사회적 질서를 강하게 중시할 뿐, 사랑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도망가던 와중에 요나는 어느새 고래 뱃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데, 이는 사랑과 연대감이 부족한 그의 마음에서 비롯된 단절과 갇힌 상태를 상징한다. 신은 고래의 배에서부터 요나를 구원해주고 그는 니느웨로 간다. 그리고 요나가 신께서 말씀해주신대로 니느웨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달하자, 그가 두려워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 니느웨의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뉘우치고, 자신들이 벌인 악행들을 고치기 위해 힘을 쓴다. 신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니느웨 시를 파괴하지 않기로 결심하신다. 이에 ‘자비’가 아닌 ‘정의’를 바랬던 요나는 신께 상당한 분노와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후에 그는 신께서 그를 위해 키워주신 나무의 그늘막 안에서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신께서 요나의 쉼터를 제공해주는 나무를 시들게하자 마음이 상한 요나는 신에게 화가 섞인 불만을 퍼붓는다. 그러자 신께서 답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났다가 그 다음날 아침에 말라 죽은 그 박 덩굴도 측은하게 생각하였다. 하물며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12만 명이 넘고 수많은 가축도 있는 이 큰 니느웨성을 내가 불쌍히 여기는 것이 옳지 않으냐?” 요나는 신의 상징적인 답변을 옳게 받아들였다. 신은 요나에게 사랑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무언가를 위한 “노동/정성”과 “무언가를 자라게 하기 위함”이라 하시며 사랑과 노동은 결코 떨어질 수 없다고 하셨다. 어떤 이는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며, 어떤 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는 것일 뿐, 모두가 사랑과 연관되어 있는 노동을 하고 있다.
보살핌과 관심은 사랑의 한 측면, 바로 책임으로 이어진다. 오늘 날 ‘책임감’이란 주로 의무, 개인이 외부로부터 부여받은 일, 등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말로 진실된 의미로서의 책임감은 완전한 자발성을 의미하며, 다른 대상이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대한 우리의 반응 -- 표현의 여부를 떠나 -- 이다. “책임감(reponsibility)”을 지닌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언제든 “반응(response)”해줄 준비를 갖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요나는 니느웨의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마치 카인(Cain)처럼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Am I my brother’s keeper?)”라고 언제든 되물어보며 책임을 회피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인 것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관심을 가지고 반응한다. 그의 형제의 삶은 형제만의 삶이 아니라 동시의 그의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신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만큼 주변 사람들에게 책임을 느낀다. 책임감은 엄마와 아이의 예시로 보았을 때, 주로 신체적으로 필요로 하는 면들에 대한 책임감을 의미하며 성인들 간의 사랑에 있어서 책임감이란 주로 상대의 정신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을 의미한다.
책임감은 쉽게 지배욕과 소유욕으로 몰락할 수 있지만, 이러한 몰락을 막기 위해 바로 사랑의 세 번째 요소, 존중이 존재한다. 존중이란 결코 두려움이나 찬양심이 아니다. 존중(respect)이란, 단어의 어원(respicere, “바라보다”, “되로 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을 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개인을 그 사람 자체로 바라봐주며 그 사람 고유의 개인성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다른 이가 성장하며 그 사람 자체로서의 모습을 최대한 드러낼 수 있도록 관심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로 존중이란 바로 관계에서 착취가 부재된 상태를 의미한다. 나는 사랑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장하고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을 위해, 그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풀어가기를 바라며, 이 과정이 그 사람 외의 타인을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땐, 그 혹은 그녀와 하나임을 느끼지만, 내가 필요로 하는, 또는 원하는 모습이 아닌 상대방 자체의 모습으로 함께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독립을 성취한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존중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만약 내가 목발 없이도 설 수 있다면, 나는 타인을 착취하거나 소유하지 않아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존중은 오로지 자유가 전제로 깔려있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l'amour est enfant de la liberte”라고 하는 옛샹송의 가사처럼 사랑은 자유의 아이이기 때문에 지배욕과 소유욕에서 태어난 더러운 그것과는 수준을 달리 한다.
한 개인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알지 못하고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앎이 없는 관계에서는 보살핌과 책임감 같은 요소들도 결국 보잘 것 없는 것들이 될 뿐이다. 앎에는 많은 층계가 존재한다. 사랑에서의 ‘앎'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과 같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앎은 오로지 나 스스로에게만 관심을 주는 상태를 벗어나 다른 사람을, 그 사람만의 환경 속에서 바라볼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면, 나는 어떤 이가 격정적으로 표현을 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화가 났다는 사실 정도야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그 사람을 조금 더 깊게 알았더라면, 그 사람이 지금 걱정을 하고, 초조해하고, 외로워하며,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난 그가 표출하고 있는 화보다 그 안에 더 깊은 곳에 자리잡은 감정을 인지하게 될 것이며 그를 화가 난 사람으로 보기 보다는 초조하고 창피해하며,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으로 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는 앎에는 한 가지 더, 또다른 근본적인 요소가 속해있다. 개인이 홀로 갇혀져 있는 감옥을 벗어나 다른 사람과 섞이고자 하려는 기본적인 욕구는 또다른 인간의 특정 욕구, 바로 “인간의 비밀(본질)"을 알고자 하려는 욕구와 연결되어 있다. 삶이란 단순히 생물학적인 면만 두고 보아도 충분히 근사한 기적이지만 인간의 본질, 즉 한 사람의 가장 인간적인 면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또 그 사람의 주변 사람들이 감히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의 비밀이다. 우리는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만 우리가 갖은 노력을 다해도 자신을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모두 한 가지 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존재, 또는 다른 이들의 존재에 대해서 더 깊이 탐구할수록 앎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는 되려 우리에게서 더 멀리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 영혼의 비밀,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드는 가장 근원적인 본질적 요소를 계속해서 알고 싶어하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실, 매우 절박한 방안이긴 하지만,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만한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 위에 완전히 군림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다고 느끼고, 생각하는대로 타인을 바꿀 정도의 힘으로 군림함으로써 타자를 일개 “것"으로, 그것도 우리의 것, 우리의 소유로 만드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가장 궁극적인 수준에는 극한의 사디즘, 즉 타자를 고통스럽게 하고자 하려는 욕망과 능력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를 통해 타인은 고통을 받고 자신의 고통 속에서 자신이 지닌 비밀을 저버리도록 강요 받는다. 이런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한 사람의 비밀(그의 것이자 곧 우리의 비밀이기도 한 본질)을 갈구하는 행위는 그 잔혹성과 파괴의 깊이와 강도가 계속해서 점점 더 강해질 수 밖에 없다. 아이작 바벨은 이러한 원리를 상당히 잘 정리한 바가 있다. 그는 러시아 적백내전 당시 함께했던 동료 장교가 그의 전상관의 죽음을 신고하면서 했던 말을 인용했다: “총알은 -- 이렇게 한 번 정리해보겠다 -- 총알은 사람을 없앨 뿐이다…. 총을 쏜다고 해서 사람 안에 있는 영혼을 건들거나 나오게 유도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이 전쟁에서 맡은 역할을 관두지 않는다, 심지어 한 번은 한 시간 동안 적들의 시체 위를 걸어다녀야만 한 적도 있었다. 난 삶이란 과연 무엇일지, 이렇게 살아온 삶의 끝엔 정녕 무엇이 있을지 정말로 알아내고 싶다.”
위와 같은 유형의 앎으로 가는 길은 아이들에게서 꽤나 두드러진 형태로 발견할 수 있다. 아이는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분해하고 부순다. 아니면 나비의 본질을 억지로 알아내기 위해서 나비의 날개를 잔인하게 뜯어내기도 한다. 잔혹성은 그보다 더 깊은 것으로 부터 실행 동기를 부여 받을 수 있다: 바로 다른 존재들의, 그리고 그들의 삶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마음 말이다.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또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적극적으로 다른 이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행위이며, 이는 타인과 ‘하나(*이 책에서 작가가 말하는 ‘하나(union / one)’는 모두가 ‘같은’ 상태가 아니라 각자의 모습을 지킨 채 ‘한 공간'에 있음을 의미한다)’가 되려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된다. 하나로 결합하려는 행동을 통해 나는 당신을, 또 나를, 그리고 모든 이들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에게 허용된 방법, 융화의 경험만을 통해서 앎의 영역으로 갈 수 있으며 이는 개인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생각으로만 형성된 지식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다. 사디즘은 본질을 알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사디즘을 통해 나는 되려 이전보다 더 진실에서 멀어진 상태로 향하게 된다. 사랑이야말로 앎으로 향하는 유일한 방식이며,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융합은 내가 구하고자 하는 답변을 내려줄 수 있다. 사랑을 함으로써, 나를 줌으로써, 그리고 다른 이를 파악하려고 애를 쓰면서, 나는 나 자신을 찾고, 나 자신을 발견하고, 우리를 발견하며, 인간을 발견한다.
우리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아폴로 신탁의 표어(motto)인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에도 잘 나타나 있으며 이는 모든 심리학의 가장 굵은 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을 앎으로써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욕망은 단순히 일상적인 지식이나 생각으로만 이루어진 지식으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우리는 현재 각자 자신에 관해 알고있는 바보다 천 배를 더 많이 알게 되더라도 결국 그 가장 안쪽에 존재하는 영역까지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에게 수수께끼이듯이 우리 스스로에게도 수수께끼로 존재한다. 완전한 앎으로 향하는 길은 사랑을 행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 사랑의 행위는 생각과 문자들을 초월한다. 이는 융합의 경험으로 용감하게 뛰어드는 일이다. 물론 생각 속 지식, 즉 우리 심리 안에 존재하는 앎 또한 사랑을 행함으로써 완전한 앎으로 향하는 길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점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각자의 현실을 보기 위해서는 환상, 그리고 내가 타인과 나 자신을 두고 비이성적으로 꾸며낸 틀을 뛰어넘고 나 자신과 타인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어야만 한다. 내가 사람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을 때만이 난 인간의 궁극적인 본질을 깨닫게 될 수 있다, 바로 사랑을 행함으로써 말이다.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의 문제는 신을 알려고 하는 도중에 발생하는 종교적인 문제와 평행선상에 있다. 전통적으로 서양의 신학은 신을 개인들의 생각만으로 파악하고, 신에 관해 정돈된 이론을 설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내 생각으로만 신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착각하기 쉬웠던 것이다. 일신교 -- 이 개념에 대해서는 후에 더 기술해놓겠다 -- 에서 발전한 형태인 미스티시즘(*mysticism, 신비주의)의 목표는 생각으로 신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내려놓고 다른 이들과 하나로 융합을 하는 경험을 통해 신에 대한 ‘지식’을 대체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과 - 또는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신과 - 융합하는 경험은 결코 비이성적인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말한 바와 같이 위와 같은 경험은 이성적인 사고에서 발단 되었으며, 이성적인 사고에서 뿌리내린 행동 중 가장 용감하고, 가장 극한까지 간 뒤에 나타난 결과이다. 융합의 경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지식의 근본적인 한계에 초점을 두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결코 인간과 우주의 본질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인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을 통해서라면 어쩌면 본질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따르는 것이다. 심리학의 과학적인 면은 그만의 한계점들을 지니고 있고, 미스티시즘에서 비롯된 논리적인 결론 또한 한계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심리학의 가장 궁극적인 결론은 사랑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보살핌, 책임감, 존중, 그리고 앎은 서로 상호의존적인 관계망을 구축하고 있다. 이 요소들은 전부 성숙한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성격들인데, 여기서 ‘성숙한 사람'이란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전시키고 자신이 정직하게 한 일을 통해 성취한 것만 바라는 사람이자, 자신이 무한한 힘과 정신을 지녔다고 착각하는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난 사람인 동시에 진정 생산적인 활동으로만 길러질 수 있는 내재적인 힘을 기반으로 부끄러울 줄 아는 힘을 가꾼 인간을 의미한다.
여태껏 나는 사랑을 두고 인간의 단절성을 극복하는 요소로서 융화를 갈망하는 마음을 채워주는 요소를 의미한다고 이야기 해왔다. 하지만 위에 언급된 만국공통적인 문제, 인간들이 존재론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끼는 일체감은 보다 더 세부적이고 생물학적인 특성으로 이어진다. 바로 남성과 여성이라는 극과 극 사이의 융화를 바라는 마음 말이다. 양극화된 두 성별은 태초에 남성과 여성은 하나였고, 반으로 잘려 각 남성이 자신의 잃어버린 여성과 재결합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 헤맨다고 하는 이야기가 담긴 신화에서 가장 잘 표현되어있다. (양성간의 태초의 일체를 두고 같은 생각은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성경의 이야기에서도 잘 표현되어있다. 물론 두 이야기 전부 당대 강력했던 남성중심사회의 영향을 받아 마치 남성이 여성의 위에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 신화의 의미는 보이는 것과 같이 간단하다. 성별의 양극화는 남성들로부터 하여금 특별한 방식의 융화, 즉 이성과의 융화를 갈망하도록 만든다. 남녀 간의 양극화라는 개념은 각 남성과 여성 안에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남녀가 각각 생리학적으로 다르게 지니고 있는 호르몬들을 지니고 있듯이 그들은 심리학적인 면에서 보면 모두 양성적인 면도 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 안에 받으면서 주기도 하는, 물리적이면서 실체가 없기도 한 면에서 이 모든 문제를 항상 느끼는 것이다. 남녀는 자신과 다른 극에 있는 이성을 통해 일체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 극은 모든 유형의 창의력(creativity)에 기반이 되어준다.
또한 남녀 간에 존재하는 상극은 상호적으로 창조(create)해내는 데의 기반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는 정자와 난자의 결합이 하나의 아이를 만드는 사실에서 생물학적으로 너무도 명백하다. 하지만 순수하게 심리학적 면만 들여다보아도 이야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남녀 간에 사랑을 통해 각자 새로 태어나는 경험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바로 이 극과 극 사이에 이루어지는 결합을 달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사랑을 하지 못하는 다른 이성애자들이 느끼는 단절감, 실패에서 비롯된 고통을 매순간 느끼게 된다.)
남녀 간의 양극에서 비롯된 원리는 자연에도 존재하는데, 동식물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극성이 아니더라도 두 가지 근원적인 기능, 주고 받는 사이에 존재하는 극성에서도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땅과 비, 강과 바다, 밤과 낮, 어둠과 빛, 물체와 영혼에서도 나타난다. 이 생각은 무슬림교의 위대한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루미(Rumi)에 의해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Never, in sooth, does the lover seek without being sought by his beloved.
사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에게 갈망받지 않고서는 누군가를 갈망할 수 있을리가 없다.
When the lightning of love has shot into this heart, know that there is love in that heart.
벼락과도 같은 사랑이 사람의 심장을 찌르고 들어왔을 때, 그 마음 안에는 사랑이 있음을 알라.
When love of God waxes in thy heart, beyond any doubt God hath love for thee.
신의 사랑이 당신의 마음을 보살펴 줄 때, 신은 그 어떤 의심이나 편견없이 그대를 사랑한다.
No sound of clapping comes from one hand without the other hand.
이 세상에 한 손으로만 만들 수 있는 박수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Divine Wisdom is destiny and decree made us lovers of one another.
신성한 지혜는 운명이자 법령으로써 우리를 서로 사랑하는 존재들로 만들어주었다.
Because of that fore-ordainment every part of the world is paired with its mate.
신께서 내려주신 이 법령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이들은 각각의 짝이 있는 것이다.
In the view of the wise, Heaven is man and Earth woman : Earth fosters what Heaven lets fall.
현명한 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천국은 남성이고 지구는 여성이다 : 지구는 천국에서 내려준 것을 돌봐준다.
When Earth lacks heat, Heaven sends it; when she has lost her freshness and moisture, Heaven restores it. Heaven goes on his rounds, like a husband foraging for the wife's sake;
지구에 열이 부족하다면 천국은 그 열을 보내주며, 그녀가 신선함과 수분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천국이 금세 부족함을 채워준다. 천국은 아내를 위해 먹이를 찾아다니는 남편처럼 맡은 바를 열심히 해낸다.
And Earth is busy with housewiferies: she attends to births and suckling that which she bears.
그리고 지구는 가정에 있는 아내가 할만한 일들로 바쁘다: 그녀는 생명을 낳고 보살펴준다.
Regard Earth and Heaven as endowed with intelligence, since they do the work of intelligent beings.
지구와 천국을 각각 지능이 높은 생명체로 보아라, 그들이 지능이 높은 생명체들이 할만한 일들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Unless these twain taste pleasure from one another, why are they creeping together like sweethearts?
이 둘이 각자로부터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 둘이 이렇게 연인처럼 다정하게 뒹굴 수 있다는 말인가?
Without the Earth, how should flower and tree blossom? What, then, would Heaven's water and heat produce?
지구가 없이 꽃과 나무는 어떻게 피어오를 수 있는가? 그리고 지구가 없다면 천국의 물과 열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As God put desire in man and woman to the end that the world should be preserved by their union,
신께서 남녀 각자에게 그들의 결합으로 세계가 보존된다는 욕망을 불어넣어주셨음에,
So hath He implanted in every part of existence the desire for another part.
그는 온세상에 모든 존재에 각자 다른 짝을 찾도록 욕망을 불어넣어주신 것과 다름이 없다.
Day and Night are enemies outwardly; yet both serve one purpose,
낮과 밤은 겉으로 보면 서로 적대감을 지닌 존재들로 보일 수 있지만 각자 서로의 존재를 보완해준다,
Each in love with the other for the sake of perfecting their mutual work,
각각은 상호보완적인 업무를 맡은 상대와 사랑에 빠졌으며,
Without Night, the nature of Man would receive no income, so there would be nothing for Day to spend.
밤이 없이는 인간이 수입을 얻을 수 있는 방도가 없을테고, 그렇게 낮이 쓸 수 있을만한 자산은 하나도 없게 되고 말 것이다.
남녀 간의 극을 다루는 문제는 사랑과 섹스의 주제로 뻗어나갈 수 있다. 나는 일전에 사랑을 단순히 성적 욕구의 표현, 또는 승화라고 말한 프로이트의 오류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사랑을 이런 식으로 볼 줄만 알았지, 거꾸로 성적 욕구야말로 사랑과 통합을 갈구하는 마음의 한 가지 표현 방식임을 알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가 범한 오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심리학적 물질주의와 연결해서 그는 성적 욕구를 두고 고통스러운 신체에서 안정을 위해 화학적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해석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성적 욕구의 목표는 이 고통스러운 긴장의 끈에서 벗어나기 위함이고 성적 만족감은 이 긴장감을 떼어놓는 데 성공하면서 얻게 된다. 성적 욕구가 배고픔과 갈증처럼 생명체 안에 부족한 점이 생겼을 때 발현한다는 점을 놓고 본다면 이러한 관점은 어느 정도 맞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관점으로 본다면 성적 욕구는 가려움과 다를 바 없고, 성적 충족감은 가려운 부분을 긁고 느끼는 만족감과 같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히려 자위 행위야말로 진정으로 이상적인 성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그의 논리가 이러한 오류로 이어질 때 까지 프로이트가 역설적으로 잊고 있던 요소는 바로 성생활의 심리-생물학적인 면, 남성과 여성의 극성, 그리고 이 극성을 결합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려는 욕망이다. 그가 범한 이 특정 오류는 프로이트가 지닌 극단적인 남성중심적인 사상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며, 그러한 사상을 통해 성생활은 오로지 남성적 성격을 띄고 있다는 판단과 함께 여성적 성격의 특성을 잊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성 이론(Theory of Sex)에 적어내린 세 가지 대전제에서 나타낸다. 그는 리비도(libido)는 보통 “남성적인 경향이 있다"고 말했으며, 이는 그 리비도를 지닌 자의 성별을 떠나서 똑같이 적용된다고 말했다. 이와 비슷한 생각은 프로이트가 논리적으로 정리한 이론, 바로 ‘어린 소년은 여성을 거세된 남자로 인식하며 여성 스스로도 자신이 잃어버린 남성 성기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애쓴다'고 말했다는 점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렇지만 여성은 거세된 남성이 아니며 여성의 성적 취향이란 특별히 여성적인 것이지, 결코 “남성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 않다.
이성 간에 서로를 성적으로 이끄는 감정들이 단지 묵혀있는 긴장감을 풀기 위한 마음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지극히 부분적인 사실일 뿐, 사실 궁극적으로는 이성과의 결합을 위해 있는 것이다. 에로스적인 유혹이 성적인 유혹을 통해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남성적인 성격은 집어 넣고, 보호해주고, 활동적이며, 규율과 모험심으로 둘러싸여 있다면 여성성은 생산적으로 받아주고, 보호해주고, 현실적이며, 참아주고, 모성적인 데 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성별에 따라 그 정도를 달리할 뿐, 모든 개인 안에 각각의 특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한 남성이 감정적으로 아이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바람에 그의 남성성이 약해진 경우는 상당히 많은데, 그는 이 결핍을 보상받기 위해 섹스를 할 때 그의 ‘남성으로서의 역할'을 우악스럽게 내세울 것이다. 결과는 돈 후안(*Don Juan, 14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의 서사시)처럼 자신의 남성성을 너무 우려한 나머지 섹스를 하는 와중에 자신의 남성성을 과하게 증명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남성성이 마비된 현상이 더 극으로 나타날 때에는 사디즘(힘을 사용하게 되는 경지)이 도착된 형태로 그를 집어삼킨 뒤일 것이다. 만약 여성성이 도착되거나 약해졌다면, 이는 마조히즘이나 소유욕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프로이트는 여태껏 성을 과도하게 중시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아왔으며 이 비판적 의식은 프로이트의 이론의 요소들이 사회에 평범하게 생각하던 사람들로부터 공격성과 비판을 불러일으키면서 그 크기를 부풀려갔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기운을 금세 감지하고 그가 설립한 성 이론을 최대한 바꾸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그가 살던 시대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은 시대를 너무도 앞서 나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느낌의 성향을 띄우고 있었다. 하지만 1900년 경의 시대상이 50년 뒤에 시대상하고 일치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는 법이다. 성을 둘러싼 풍습은 그 사이에 너무도 변해서 현재는 더 이상 프로이트의 이론이 서부의 중산층 사람들에게 획기적이라거나 놀랍게 다가오지 않을 뿐더러 오늘날 전통적인 분석가들 중 아직도 프로이트의 성 이론을 감싸고 나서면서 스스로를 용감하다거나 급진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모두들 그들을 꽤나 한심하게 바라볼 것이다. 더 말하자면 그들이 옳다고 믿고 있는 심리분석학은 죄다 순응주의적이며 현대 사회에 비판적인 생각으로 이어질만한 심리학적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데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
내가 프로이트를 비판하면서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그가 성만을 너무 강조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성을 충분히 깊게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양성 간에 상호적으로 이루어지는 욕망을 발견하는 데 처음으로 관심을 기울였고, 그의 철학적 전제들과 이를 결합하여 생리학적으로 그가 본 현상을 설명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들이 지닌 의미는 크다. 심리분석학이 더 깊은 발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프로이트가 통찰한 바들을 심리학적 시점에서 생물학적, 그리고 존재학적 분야로까지 넓혀서 생각함으로써 프로이트의 개념을 더 올바르고 깊은 단계까지 끌고 오는 것이 필수적이다.
(...)
원문 출처: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The Art of Loving'을 번역했습니다. 이 작품은 자유 이용 저작물이 아닙니다.
옮긴이의 말: 학교 도서관에서 눈에 띄길래 빌려봤는데 마침 좋은 얘기가 담겨져 있어서 번역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물론 조금 전 시대에 쓰인 글이라 남녀를 구분하고, 모든 대명사가 "he"라거나(물론 미국에서 "man"은 1. 남자, 2. 사람 이라는 뜻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걱정 되기도 했습니다), 형식적으로 너무도 반복되는 구조('주장, 반복, 또 반복, 인용구' 구조의 반복)로 글이 쓰여 있어서 조마조마 했지만 겉에 보이는 내용 말고도 그 안에 분명히 지금 저에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해서 애초에 맡기로 한 부분을 전부 번역하고 퇴고해보았습니다. 재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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