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발터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完)

2021. 11. 16. 19:45번역/비문학

The Author as Producer

생산자로서의 작가

 

글쓴이ㆍ발터 벤야민
번역ㆍ오성진

 

(표지 사진 출처 / 본문 사진 출처)

 

 

Part 3

 

서사 연극(The Epic Theater)

 

무대극이라는 생산 수단은 오랜 역사를 통해 그 가치를 증명 해왔으며 그런 무대를 기반으로 둔 비극과 오페라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후죽순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극들은 그들의 형식에 이제 다 낡아버렸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을 뿐이다.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한다, “음악인들, 작가들, 그리고 비평가들 모두, 그들의 현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경향은 - 그들은 아직 이 사실을 괄시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 그들에게 반드시 끔찍한 결과를 안겨다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단에게 소유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거꾸로 자신들이 수단을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수단을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그 수단은 그들이 믿는대로 더 이상 생산자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생산자들에게 등을 돌려 그들에게 대항하는 것으로 변해버렸다.” 극에 사용되는 정교한 기술, 극단원들에게 쓰이는 막대한 비용, 미묘한 효과들 전부 영화와 라디오가 탄생하면서 생겨난 새로이 구축된 경쟁 구도에서 생산자에 반(反)하는 요소들로 변해버렸다는 뜻이다. 이제 이런 형식의 연극은 - ‘극이란 매체가 과연 “교양” 을 지녔을지, 아니면 단순한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하는지’ 하는 문제를 떠나서 말이다 - 무엇이든지 만지는 순간 유희거리로 만들어버리는 현실에 잠식 되어버린 고위 계층의 소유물이 되어버렸으며 그 위치는 가히 절망적이다. 그렇지만 새로 나온 형식의 수단들과의 경쟁 대신 그들을 배우고, 또 이용하고자 하는, 즉 그들과 같은 장에서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자세를 갖춘 극에게도 이와 같은 원리가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서사 연극이 이와 같이 신기술과 같은 장에서 소통을 해보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서사 연극은 영화와 라디오, 즉 현대 형식이 여태껏 발전해 온 상태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논리를 따라 서사 연극을 구축하려고 한 브레히트는 우선 극의 가장 원초적인 요소들부터 살펴보았다. 그 중 극의 구조부터 가장 먼저 들여다 본 브레히트는 극에 특징 중 ‘너무 광범위한 플롯’을 없애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무대와 관중, 텍스트와 연기, 감독과 배우 사이에 존재하는 기능적인 관계를 성공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는 서사 연극의 극은 전개를 발달 시키기 보다는 상황들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시중에 나온 서사 연극에서 알아볼 수 있듯이, 서사 연극은 플롯 전개를 의도적으로 깨버림으로써 서사 연극이 그토록 강조하는 상황들에 집중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사 연극에서 종종 흐름을 끊는 데 이용되는 노래들을 떠올려보아라. 바로 이런 점에서 서사 연극은 영화와 라디오, 그리고 언론과 사진술 사이에 지난 몇 년간 상용화 되어온 개념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쉽게 말해 여기엔 몽타주 과정, 즉 특정 상황 위에 또다른 상황이 자연스레 덧붙여지는 요소가 더해졌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더 넘어가기 전에 이 몽타주라는 과정은 서사 연극에 와서야 가장 강한 색채를 띌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브레히트로 하여금 자신의 극을 ‘서사’라고 부르게끔 영감을 쥐어준 ‘흐름 끊기’는 대중이 극을 향해 가진 환상에 계속해서 도전한다. 현실에 있는 요소들을 다양한 실험들을 통해 보여주는데 그 의의가 있는 극에게 있어 대중이 지니고 있는 환상은 큰 방해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사 연극이 이러한 실험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상황들은 연극의 앞쪽이 아니라 바로 뒷부분에 가서야 비로소 공개 된다. 그 상황들은 언제나 - 어떤 형식으로든 - 우리, 관객들의 상황을 보여주며, 그들은 관중으로 하여금 평소에 느낀 바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관중이 자신들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끔 거리감을 조금 둔 채로 보여진다. 관중은 자연주의 연극을 볼 때에 느끼던 만족감이 아닌, 놀라움을 느끼며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진짜라고 여기게 된다. 결국 서사 연극은 상황들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에 씌워진 베일을 벗겨 새로이 발견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의 발견은 오롯이 ‘흐름을 끊는 형식’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여기서의 ‘흐름 끊기’는 자극적인 요소가 되어줄 뿐만 아니라 연결 기능도 가지고 있다. 전개가 진행되는 동안 그 흐름을 끊어버림으로써 청중으로 하여금 상황에 집중할 수 있게끔, 그리고 배우들로 하여금 역할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이 예시를 통해 난 브레히트가 이뤄낸 새로운 극적 요소의 발견과 제스튀스(*gestus, 소외연극 개념에 중요한 초점으로 비언어적 의사소통 수단인 신체언어를 바탕으로 한 브레히트의 연출 기법)는 단지 라디오와 필름을 활용한 환경에서 기존에 사용되고 있던 몽타주 기술을 들임으로써 보통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한 사람에게 감명을 쥐어줄 만한 일로 변형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한 가족이 있는 장면을 하나 상상해보자. 아내는 이제 막 동상을 집어다가 딸에게 던지려고 하고 있고 남편은 창문을 열어 도움을 요청하려 하고 있다. 바로 이 때, 낯선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이렇게 흐름에 균열이 생기고 낯선 이의 눈에 현장이 들어온다. 공격적으로 이글거리는 얼굴들, 열린 창문, 어질러진 가구들. 하지만 현대 사회를 살면서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보는 눈을 가진 또 다른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서사 연극 작가. 이것이야말로 서사 연극 작가의 관점인 것이다.

 

서사 연극의 작가는 극예술을 위해 기꺼이 기존에 존재해 온 극 형식에 반대한 것이다. 그는 오랜 과거로부터 존재해 온 극 형식에 새로운 방식을 적용시켜 당시 존재한 현실에 질문을 고안해내고자 꾀한 것이다. 그가 진행한 실험의 중심엔 사람이 있었으며, 그 사람은 현대인, 즉 차가운 환경 속에 얼어붙은, 위축된 인간이었다. 이 인간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전부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이 인간에 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렇기에 그 인간은 극에서의 실험 대상인 동시에 시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사건들은 클라이막스나 도덕적 관념, 또는 화해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습관적인 영역, 바로 이성과 실천을 통해 해결된다는 점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작술에서 “행동”이라고 표현된 무언가를 인간의 가장 작은 요소들을 이용해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서사 연극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사 연극에서 사용되는 수단들, 그리고 목표하는 바는 전통적인 극에서 사용되는 것들 보다 더 현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서사 연극에서 이용되는 수단들은 관객들에게 감정을 - 분란을 조장할만한 감정은 더더욱이 아니다 - 불어넣어주기 보다는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그런 감정들을 그들이 현존하는 현실에서부터 떼어내는 데 더 관심이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그의 생각을 휘두르거나 그에게 불쾌한 감정을 쥐어주기 보다는 그 사람이 웃음을 터뜨리게끔 하는 쪽이 더 효과가 크다는 점이다. 서사 연극에서 유일하게 지나치다고 여겨지는 요소는 바로 그 안에 담긴 웃긴 요소들의 양이다.

 

중재된 연합 (A Mediated Solidarity)

 

당신은 이제 곧 결론이 내려질 이 일련의 논리들이 작가에게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 생산 구조 속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보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알아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 이 요구에 의존해야만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성찰이야말로 이 사회에 가장 필요한 작가들이자 글쓰기 영역에서 최고의 기술자들,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과의 연대감을 위한 가장 사실적인 기반을 제공해 줄 사람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나는 바로 이 잡지, 커뮨(Commune)지에 실렸던 저널에서 짧은 발췌본과 함께 이를 뒷받침 하고 싶다. 커뮨지에서는 질문지 하나를 작가들에게 돌린 적이 있었다. 그 질문은 “당신은 누구를 위해 글을 쓰십니까?” 였는데, 이 질문의 답변 중 르네 모블랑(René Maublanc)의 답변과 아라곤(Aragon)이 작성한 평을 옮겨와보겠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모블랑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로지 부르주아층을 위해 글을 쓴다. 첫째 이유는 내게 그래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는 점이다,” - 여기서 모블랑은 문법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전문적인 의무를 암시하고 있다 - “둘째 이유는 내가 부르주아 출신이며, 부르주아의 교육을 받았고, 부르주아 환경에서 자랐다는 점이 있겠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난 내가 속한 동시에 내가 가장 많이 이해하고, 알고 있는 계급과 스스로를 연결시키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부르주아 계층에게 유희거리를 던져준다던가 그들을 옹호하기 위한 글을 쓴다는 말은 아니다. 한 편으론 프롤레타리아들이 벌이는 혁명이 꼭 필요하며 중요하다는 사실을 믿고 있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반대편에 서있는 부르주아층이 더 약해진다면 이 모든 과정이 덜 잔인하고, 더 빠르고, 쉽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 18세기의 부르주아 층이 봉건제 사회에서 동맹군을 필요로 했던 것 처럼,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 계층 또한 부르주아 쪽에서 동맹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내가 바로 그 동맹군의 일부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에 아라곤은 답한다: “여기서 우리의 동료 작가는 오늘날 많은 작가들에게 던져진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모든 작가에게 문제를 맞닥뜨릴만한 용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 르네 모블랑처럼 자신의 위치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자들의 수는 굉장히 적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와 같은 작가들에게 더 큰 요구를 해야만 한다. (...) 내부에서부터 부르주아층을 약화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는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맞서 싸워야만 한다 (...) 르네 모블랑과 함께 작가 동료 중 우리의 편에 있는 사람들 중 아직 망설이는 자가 있다면 소련의 작가들의 예시를 떠올려보아라. 그들은 러시아 부르주아층에서 스스로 나와 사회주의를 건립하는 데 선구자들이 되었다.”

 

이상 아라곤의 평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시 속 소련의 작가들은 어떻게 러시아의 선구자들이 될 수 있었을까? 상당히 고통스러운 투쟁과 굉장히 난해할 수 밖에 없는 토론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글을 통해 나는 이러한 투쟁들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싶었다. 이 소련 작가들의 투쟁은 러시아 지식인층은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개념, 바로 전문인의 개념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전문가들과 프롤레타리아 간의 연대는 양쪽 모두 중간에서 만나지 않는 한, 즉 중재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새로운 객관성'을 주장하는 활동가들과 대표들이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지식인의 프롤레타리아화를 통해선 결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가 탄생할 수 없다. 왜인지 궁금한가? 그 이유는 교육적 혜택이 분명한 부르주아층의 교육을 받은 지식인은 그 교육과 연대감을 느낄 것이며, 그 교육은 다른 계층보다 더 지식인끼리의 연대의식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혁명적인 지식인은 반드시 그의 출신 계층을 배반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라던 아라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작가의 경우에 이러한 배반은 더 이상 생산적인 수단을 제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수단을 이용해 프롤레타리아 계층의 혁명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하는 위치에 안착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프롤레타리아의 곁이 아닌 안에서 활동을 이어감으로써 지식인들은 비로소 중재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며 모블랑과 그의 수많은 동료들이 자신들을 가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틀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과연 지식인의 생산수단을 사회화 시키는 데 성공할 것인가? 그는 과연 생산 구조 안의 지식인 노동자들을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에게 과연 소설, 극, 시의 문화적 기능 전환(Umfunktionierung)을 위해 내놓을만한 것이 있는가? 그가 이러한 과제들을 더 완벽하게 대처해낼수록, 그가 지닌 정치적 경향은 더 올바르게 구축될 것이며, 필연적으로 기술적 수준 또한 높아질 것이다. 동시에 작가가 스스로 생산 구조 속 자신의 위치에 대해 더욱 정확히 알수록 그는 소위 말하는 작품의 “영혼적" 수준(spiritual quality)을 핑계랍시고 물고 늘어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영혼"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파시즘의 성격을 지닌 개념들은 반드시 사라져야만 한다. 또한 파시즘을 반대하되, 자신의 “기적적인 능력"을 너무 믿는 지식인들도 사라져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혁명의 투쟁이란 자본주의와 지식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원문 출처: 자유 이용 저작물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The Author as Producer'을 번역했습니다. 원문을 구할 수 있는 링크를 여기에 남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