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8. 16:53ㆍ번역/비문학
The Task of the Translator
번역가의 진정한 역할
글쓴이ㆍ발터 벤야민
번역ㆍ오성진
Part 2
번역을 통해 언어 간의 연결고리가 모습이 드러난다면, 이는 단순히 원본과 비스무리한 느낌을 가진 문서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결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단순히 유사성이란 오직 연결고리가 존재할 때에만 발현되는 특성이 아니라는 점 하나로 설명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연결고리(kinship)”는 보다 조금 더 좁은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두 개체가 만나는 첫 지점, 근원만 가지고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 모든 역사적인 문맥을 제쳐놓고 두 언어 간의 연결고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 각 언어로 쓰인 문학 작품들 또는 각 언어의 단어들이 서로 얼마나 유사한지는 여기서 마땅히 고려할만한 대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언어 간의 탈역사적인 연결고리는 언어를 하나의 총체로 보았을 때, 언어가 결국 같은 한 가지를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말하는 “같은 한 가지"라는 것은 하나의 언어만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오로지 각각의 언어가 서로의 의도들을 충족시켜주고 보완해 줌으로써 ‘하나의 순수 언어(the pure language)’에 다다랐을 때에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다. 언어의 기본 철학에 있어서 가장 근간이 되는 이론 중에 하나인 이 법칙을 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두 가지 개념 사이에 선을 그을 줄 알아야만 한다. 이 선은 바로 ‘의도’라는 것을 고려해봤을 때, 언어의 내재적 의미, 또는 진정한 의미(‘what is meant’)와, 그리고 언어의 표면적 의미(‘the way of meaning it’), 그 사이에 선명하게 존재한다. Brot(불어에서 ‘고통’을, 독어에서는 ‘빵’을 의미하는 단어)과 Pain이라는 두 단어를 보자. 두 단어는 내재적 의미가 같지만 표면적으로 보이는 의미에서 차이를 보인다. 두 단어에 있어서 단순히 보여지는, 표면적인 의미의 차이는 같은 단어가 프랑스인에게는 ‘고통'으로, 독일인에게는 아예 다른 뜻으로 전달되게끔 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 단어는 두 나라 간에 같은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호환성을 지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배제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단어의 진정한 의미라는 면을 확인해보자면 두 단어가 상징하는 바는 사실 정확하게 일치한다. 한 단어의 겉으로 보이는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서로 다른 언어권에서 대립을 겪고 있지만, 사실은 결국 둘 다 그 단어의 가장 근간에 있는 언어를 서로 보충해주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각각의 언어에 있어서 서로 다르게 보여지는 의미는 모두 한 가지 내재적 의미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지닌 연결성을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서로의 힘을 보충해준 이력이 없는 각각의 언어들은, 그 안에 담긴 내재적 의미, 즉 진정한 의미를 다른 언어들 간의 연결성을 통해 찾아내기가 힘들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 또한 결국 각각의 단어들과 문장들이 모든 표면적 의미들이 끝내 조화롭게 하나의 ‘순수 언어'로서의 모습으로 합쳐질 그 순간까지 끝없이 변화를 겪게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언어들이 정말로 훗날 그들의 역사의 끝에 메시아처럼 등장할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성장해 나간다면, 작품들과 계속해서 갱신되는 언어의 형태를 통해 정작 가장 많은 재미를 누릴 수 있는 영역은 바로 번역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과정 속에서 이토록 신성시 되는 언어의 성장을 계속해서 시험대에 올려놓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 번역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시험"이란 한 가지 언어(단어나 문장, 또는 그보다 더 긴 표현)를 두고 ‘숨겨진 내재적 의미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전까지 과연 얼마나 많이 남았나?’, 또는 ‘이 거리를 알게 됨으로써 내재적 의미는 얼마나 더 위로 올라올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질문들을 쉼없이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토록 이야기하게 된 배경에는 모든 번역의 목적은 결국 언어 간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잠시나마 좁혀주는 데 있을 뿐임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언어 간의 거리감을 좁혀줄 바로 이 일시적인 해결책 보다 더 빠르고 명확한 방식은 아직 인류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해결책은 조금 더 직접적인 노력을 통해 손에 쥐려고 할수록 오히려 더 멀어질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 와중에 종교들의 성장은 간접적으로나마 숨겨진 씨앗과도 같은 내재적 의미들을 숙성시키며 언어로 하여금 더 많은 성장을 이룰 수 있게끔 독려해왔다. 번역은 예술과 다르게 결과물의 영속성을 취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번역이 목표하는 바가 모든 언어 창작물을 가장 궁극의 층계로 인도하고자 한다는 점에는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번역 안에서 원문은 보다 더 높고 보다 더 순결한, 태초의 모습에 더욱 가까운 언어의 층계로 올라갈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렇게 한 번 올라가게 된 자리에 영원히 있을 수 있을리는 만무하며 작품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한 번 올라간만큼 수준이 상승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번역은 상당히 놀라운 자세로 작품이 그 곳, 즉 여태껏 한 번도 문이 열리지 않았던, 모든 언어들이 한 구간에서 만나 가장 최초의 모습에서 재회하는 장소로 향할 수 있게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준다. 원문은 절대 혼자서 그 영역에 도달할 수 없지만 번역을 한 번 거친다면, 원문 안에 이와 같은 영역에 존재할 수 있을만한, 단순한 주제의식을 넘어선, 조금 더 내재적인 요소가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핵심 요소는 한 번역물은 다시 한 번 또 다른 도착어로의 번역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특징을 통해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한 개인이 아무리 원문에 담긴 주제 의식을 최대한 많이 모아다가 번역에 힘을 쓰더라도, 이 중심 요소를 발견하고 문서 상으로 옮기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를 것이다. 왜냐하면 내용과 언어 사이의 관계는 원문과 번역본 안에서 각각 상당한 차이를 지닌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원문 안에서는 내용과 언어가 마치 과육과 과일 껍질처럼 확실한 합을 보여주는 데 반해서 번역에서 쓰이는 언어는 여러 번 정성스레 매듭 지은 황실의 로브처럼 원문의 내용을 감싼다. 왜냐하면 번역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원문의 언어보다 더 진화된 형태의 언어일 것이기 때문에 더 거대하고 멀어진 형태로 원문의 내용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이러한 거리감으로 인해 온전한 번역에 어려움이 생기는 동시에 오히려 번역을 불필요한 수준의 상태로 끌어당기기도 한다. 왜냐하면 언어사의 특정 단계에서 발단한 작품을 번역한 그 어떤 번역본이라도, ‘내용(content)’이라는 특정 영역만 들여다 봤을 때, 다른 모든 언어로의 번역이 가능하다는 점 또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의 조금 더 본질적인 요소를 따져봤을 때에는 사후의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원문을 조금 더 고층의 언어계로 옮겨줄 수 있다. 원문은 오로지 다른 시간적 배경에서만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할 수 있다. 위에서 등장한 “아이러니(ironic)"라는 단어를 통해 낭만주의자들(Romantics)이 떠오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낭만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문학 작품의 안을 더 잘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 즉 번역을 통해 가장 구체화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유형의 통찰력을 지닌 이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이 이런 방식으로 번역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보다 온신경을 비평(criticism), 즉 하나의 문학 작품이 세상에 나온 뒤에 이어지는 시간 속에 중요한 또다른 요소에 쏟아 부었다. 낭만주의자들은 번역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완전히 등한시 했지만 그들이 남긴 위대한 번역들은 그들이 여기는 본질적인 요소가 정녕 무엇인지, 그리고 번역이라는 문학적 형식에 대한 긍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시인이라고 꼭 이러한 특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단서는 세상에 많이 존재하며, 더 나아가서 말해보자면 오히려 시인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이러한 특성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문학의 역사 조차도 위대한 시인들은 실력있는 번역가들이며 그렇지 못한 시인들은 그저 그런 번역가에 미쳤다는 전통적인 생각에 굳이 동의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마틴 루터(Martin Luther), 요한 보스(Johann Heinrich Voss),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Schlegel)과 같은 저명한 작가들은 글을 창작하는 일 보다는 번역가로서 더 중요한 자취를 남겼으며, 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과 스테판 조지(Stefan George) 같은 이들 또한 단순히 시인들로 단정짓기 전에 그들이 번역가로서 이루어낸 업적을 봐야만 한다. 그럼에도 번역이 그 자체로 하나의 형식인 것과 마찬가지로 번역가의 역할 또한 예술가의 그것과 완전히 차별화된 개념으로 여겨져야만 한다.
번역가의 역할 중에는 도착어로의 특정 의도를 발견해냄으로써 그 언어를 통해서도 원문의 메아리를 재현해내는 일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번역가의 역할이 시인이 맡은 역할과 차별성을 가지는 지점이고, 이는 후자의 의도는 작품에 사용되는 언어, 또는 그 총체성 대신에 오직 언어의 특정 문맥적인 면들만 겨냥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차이다. 일반 문학 작품과는 다르게 번역은 언어라는 숲 한중간에 위치해 있지 않고 오히려 숲밖에 서서 그 숲의 언덕을 바라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번역은 원문 안에 들어가는 일 없이 바깥에서 내부를 들여다보며, 메아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위치, 즉 한 작품의 반향을 다른 작품(번역본)에서 찾을 수 있게 해줄만한 과녁을 찾아서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의 추구하는 바가 문학 작품의 그것과 다를 뿐만 아니라 - 언어 자체만 두고 봤을 때 하나의 작품을 다른 도착어로의 작품으로 이어질 수 있게끔 만드는 것 부터 둘의 성질은 크게 다르다 - 그와 동시에 둘은 질적으로도 전반적인 차이점을 지니게 된다. 시인이 추구하는 바는 즉흥적이며, 본능에 가깝고, 표면적인 데 치중하는 반면에 번역가의 목적은 보다 더 궁극적이고 파생적이며, 원개념에 더 많은 초점을 두고 있다. 번역가를 정말로 성장시키는 것은 바로 많은 언어들을 한 곳으로 모아 하나의 진정한 언어를 구축하고자 하는 위대한 모티프이다. 번역가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이 진정한 언어 안에서는 개별적인 문장들, 문학 작품, 그리고 비평적 생각들이 절대 소통하지 않겠지만 각자 번역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안에서 언어들 자체적으로는 그들의 표면적 의미들끼리 상호보충 해나가면서 한 자리에 합쳐진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모든 생각이 추구하는 궁극의 비밀들로 가득한, 더이상 합해지는 과정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진실의 언어’라는 게 정말로 있다면, 이 ‘진실의 언어(the language of truth)'라는 것은 참으로 ‘진실된 언어(the true language)'일 것이다. 그리고 철학자가 추구할 만한 완벽한 경지에 다다른 이 언어는 번역이라는 형식 안에 응집된 채로 숨겨져있다. 철학엔 뮤즈가 따로 없으며, 이는 번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이 두 가지 영역이 문화와 상관 없다고 주장하는 감상적이길 좋아하는 예술가들의 말들은 죄다 틀렸다. 왜냐하면 번역에서만 모습을 나타내는 바로 그 언어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위대한 철학자가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어들의 불완전함은 바로 그들의 다양성에서 비롯된다. 최상의 언어는 넘치지 않는다. 진정한 생각은 필요 없는 미사여구나 한낱 속삭임도 없이 이뤄지는 글쓰기이며 불사의 단어는 언제나 소리 없이 존재한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많은 표현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 번만 입 밖으로 내뱉으면 바로 ‘사실'로써의 모습을 완벽하게 갖출 단어들을 말하지 않도록 한정 짓는다.” (“Les langues imparfaites en cela que plusieurs, manque la suprême : penser étant écrire sans accessoires, ni chuchotement mais tacite encore l’immortelle parole, la diversité, sur terre, des idiomes empêche personne de proférer les mots qui, sinon se trouveraient, par une frappe unique, elle-même matériellement la vérité.”) 만약 어느 이가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가 여기서 지적하는 바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번역의 형식이 - 그 안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기본 요소들과 함께 - 시적인 세계와 이론의 세계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는 점을 이해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번역물은 시나 이론, 어느 한 쪽 보다도 특색이 뒤떨어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에 둘보다 덜한 중요성을 지닌다는 말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원문 출처: 자유 이용 저작물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The Task of the Translator'을 번역했습니다. 원문을 구할 수 있는 링크를 여기에 남기겠습니다.
'번역 > 비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066: The Public Domain Review, "더 남쪽으로: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에드거 앨런 포와 아서 고든 핌의 대칭적 관계" (0) | 2021.12.23 |
---|---|
#063: 발터 벤야민, "번역가의 진정한 역할" (完) (0) | 2021.12.01 |
#061: 발터 벤야민, "번역가의 진정한 역할" (1) (0) | 2021.11.25 |
#060: 발터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完) (0) | 2021.11.16 |
#059: 발터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2) (0) | 2021.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