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 발터 벤야민, "번역가의 진정한 역할" (1)

2021. 11. 25. 23:09번역/비문학

The Task of the Translator

번역가의 진정한 역할

 

글쓴이ㆍ발터 벤야민
번역ㆍ오성진

(표지 사진 출처 / 본문 사진 출처)

 

 

Part 1

하나의 예술, 또는 예술 형식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수용자(receiver)를 고려하는 행위를 통해 이렇다 할 만한 결실이 맺어지는 경우는 잘 없다. 특정 대중 집단, 또는 그들의 대표들을 고려해서 글을 쓸 경우, 문서가 잘못 읽힐 가능성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 ‘이상적인 수용자’라는 개념 자체를 꺼내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 예술의 감상법에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 예술은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존재를 논하지만 그 중 어떤 작품도 훗날 해당 작품을 감상할 인간을 고려하는 경우가 없다. 세상엔 독자를 위해 쓰인 시도, 소유자를 위해 그려진 그림도, 청중을 위해 작곡된 음악도 없는 것이다.

과연 원본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독자들이 번역을 해도 될까? 이 질문은 마치 번역본과 원본이 예술이란 영역 안에서 각자 얼마나 다른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것 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서, 원본을 가지고 ‘똑같은 내용’을 다시 말하는 유일한 이유처럼 보이기까지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문학 작품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독자와 무엇을 소통하려고 하는 것일까? 문학 작품은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에게 많은 것을 전달’ 해주지 않는다. 문학 작품의 본질적인 요소는 독자와의 소통이라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따위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이뤄진 번역물은 본질에 근접하지 못한 것들만 가지고 독자와 단순히 소통을 이룰 뿐이며 이것은 좋지 못한 번역물들 사이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보통 문학 작품 내에서 이렇게 ‘전달 되는’ 정보 너머에 있는 것을 두고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 또는 의뭉스러운 것, 심지어는 “시적"인 것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실력이 형편 없는 번역가라고 해도 이와 같은 요소가 문학 작품의 본질에 가깝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요소들을 번역하기 위해선 번역가가 번역가인 동시에 시인의 자질을 가지고 있을 때만 만들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러한 생각은 질 낮은 번역물들의 특성이 생겨나게 되는 원인이며, 이를 두고 우리 독자들은 무분별한 내용의 부정확한 전달이라고 부른다. 번역이 독자를 배려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다. 정말로 번역물이 독자를 위해야 한다면 같은 논리가 원문에도 적용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만약 원문이 독자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면, 어찌 번역물이라고 해서 이 대전제를 따르지 않을 수 있는가?

번역은 하나의 형식이다. 그리고 번역을 하나의 형식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장 먼저 원문을 들여다 봐야만 한다. 번역을 하기 위해 필요한 원칙들은 모두 원문, 그리고 바로 그 원문의 번역 가능성(translatability)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한 작품의 번역이 가능한지를 묻는 질문 안에는 상충되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는 “특정 작품이 이 세계에서 마주하게 될 독자 중에서 과연 그 작품을 번역하기에 적합한 번역가가 발견될 것인가?”하는 질문 이며, 두 번째 질문은 “그게 아니라면 과연 작품의 본질은 번역 될 수 있는 구조인 동시에, 번역이라는 형식을 인지하고, 그 형식을 통해 번역 되기를 바라고 있는가?”이다. 첫번째 질문은 상황에 따라 번역에 적용될 수도, 아니면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에 반해 두번째 질문은 의문의 여지 없이 무조건적으로 적용된다. 번역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자라면 후자의 질문이 지닌 독립적인 의미를 차마 알아차리지 못하고 전자와 후자의 질문이 둘 다 비슷한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착각할 것이다. 그런 얕은 생각에 반박하기 위해서라도 서로 연관 되어있는 특정 개념들은 그들의 의미, 또는 가장 중요한 상징성을 그들의 시작점이 인간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경우에만 서로 같은 의미를 유지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잊고 있던 일이더라도 그가 잊지 못할 삶 또는 순간에 대해 얘기 할 수도 있다. 만약 그가 언급하는 ‘삶이나 순간’이 잊혀지기 쉬운 전제를 지닌 유형이라고 할지라도 그 전제는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채워지지 않은 그 전제가 채워질 수 있는 곳, 바로 신이 기억하는 어떠한 장소로 이어지는 통로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언어창작물의 번역 가능성이란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길 때에도 반드시 고려 되어야 하는 것이다. 번역의 엄격한 개념을 고려해 봤을 때, 번역 가능성이 낮아보이는 원문들은 정말 어떤 방식으로든 번역해내지 못할까? 특정 출발어로 쓰여진 작품을 두고 과연 번역이 가능할 지 생각해볼 때 바로 이런 질문을 떠올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 뒤에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생각, ‘만약 번역이 하나의 형식이라면 번역 가능성은 특정 작품들에 있어서 반드시 자리잡고 있어야만 하는 본질적인 성격이겠다'라는 생각이 그만큼 타당하기 때문이다.

특정 작품들에게 번역 가능성이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번역 가능성이 번역이 되는 작품의 수준, 그 자체에 중요한 요소로 나타난다기 보다는 오히려 본문이 번역 가능할 수 있는 특수한 요소를 타고난 채로 숨 쉬고 있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그 어떤 번역물도, 그 결과가 얼마나 좋은지를 떠나서, 원문보다 더 많은 역량을 펼칠 수는 없을 거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번역본은 원문을 번역해낸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문서보다도 원문과 가까운 관계성을 지닌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번 이야기를 마친 뒤에 원문은 사실 이러한 관계성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번역이 원문과 지니는 관계성이 둘도 없이 가까워질 수 있다. 우리는 자칫 이러한 관계가 자연스럽다고만 생각할 수 있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관계가 띄고 있는 진정한 중요성 또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삶에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일들이 보여지는 현상과 그 현상이 과연 정말 중요한지 묻는 질문이 서로 연관되어있는 것 처럼, 번역은 원문에서부터 비롯되지만 원문 그 자체를 본따온다기 보다 원문이 발생한 시점 이후(afterlife)의 원문에서 온다고 보는 편이 더 맞다. 번역은 어쩔 수 없이 원문이 나온 시점 이후에 이루어진다는 점, 그리고 세계 문학에서 중요한 작품들은 정작 작품이 나왔을 바로 그 당시에는 그에 걸맞는 번역가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작품들의 번역물은 작품이 나온 시대 그 이후의 시간(시대)을 일정 부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출판되었을 당시의 예술 작품, 그리고 그 이후 시대에서의 예술 작품은 비유의 개념과는 완전히 떨어진 객관성을 통해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그 어떤 편견된 생각으로 가득찬 시대에도 당대 사회의 틀에서 벗어난 이가 글을 쓴다. 하지만 이는 페히너(Fechner)가 한 때 말했던 것과 같이 영적인 것에 기대려 하는 약한 셉터(*sceptor,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들고 다니는 지팡이나 막대) 밑에서 왕권을 키우는 문제라거나 반대로 그 의미를 감각과 같은 동물성, 즉 고장난 시계처럼 인생의 성격을 오직 가끔씩만 우연하게 깨우쳐 줄 뿐인 것에 기반을 두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존재가 온전한 의미를 다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배경 안에 묻히지 않고 그만의 역사를 지닌 모든 것들이 각각의 존재로서 인정을 받아야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한 존재의 영역은 반드시 그 존재의 특징이나 성격 보다는, 역사의 흐름 안에 그 존재가 어떤 위치에 서있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며 그와 다르게 영혼과 감각처럼 보잘것없는 요소들로 결정되기에는 특히나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철학자의 역할은 자연에 있는 모든 존재를 두고, 그들을 품을 정도로 거대한 역사라는 존재를 통해서 이해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미 발표된 지 시간이 지나 역사 속에서의 위치가 명확한 예술 작품이 현시대에 나온 작품보다 이해하기에 훨씬 더 쉽지 않은가? 위대한 예술 작품들의 역사는 이전부터 그들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던 사고 방식과 같은 모델이 몰락하고 있는 사태, 예술가로서 당시를 살면서 그들이 깨달은 점들, 그리고 다가오는 후세들이 누릴 이후의 시대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을만한 그들의 생각들을 담아내고 있다. 이 마지막 부분이 작품 안에서 모습을 보일 때, 바로 그 때 예술 작품은 유명작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단순히 주제를 전달해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 진정한 번역은 하나의 작품이, 그 작품이 살아남는 과정에서, 바로 이 유명세를 겪는 시기가 찾아왔을 때 드디어 나설 수 있는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형편 없는 번역가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번역가들이 이와 같은 작품들의 존속에 도움을 주는 양은 작품들이 번역가들에게 기여하는 바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 그들의 번역을 통해 원문들은 가장 최근까지도 계속해서 개조 되어 온, 그리고 가장 완성된 모습으로 새로이 탄생하게 되다.

이처럼 번역이란 한 작품이 살아낸 이후의 시간에서 그토록 특별하고 신성한 형식으로 부활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 과정은 굉장히 특별하고 위대한 목적성과 함께 진행 된다. 하나의 존재(작품)와 목적성의 관계는 - 이는 겉으로는 굉장히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이 보일 수 있지만 실로 지식인의 생각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다 - 각각의 목적성이 한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궁극적인 목적성이 작품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발현되지 않고 그보다 더 큰 영역에서 발견될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존재가 (그 존재 자체의 목적성까지 포함한) 목적성을 지닌 채 두각을 나타내는 현상은 결국 그들이 존재했던 시간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표현되는 방식의 본질에 있어서, 그리고 그들의 중요성이 어떻게 비춰지는 데까지 이어진다. 결국 번역이란 궁극적으로 하나의 진리와 언어가 지닌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하는 관계성까지 보여주는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다. 번역은 이토록 숨어있는 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거나 구축할 수는 없지만 가장 초기, 배아 상태의 형식을 통해 그 관계를 재현 해낼 수는 있다. 이런 식으로 무언가의 태초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특정 의의를 재현해내는 과정은 본질적으로 너무도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비언어적인 세계에서 이와 비슷한 유형의 현상을 볼 확률은 상당히 작다. 번역은 비유와 상징들을 이용해서 강력하게, 즉 선제적이고 중심에 가까운 방식으로 원문이 전달하려는 바를 제시하는 방식 보다 다른 방식들을 이용하여 원문의 의의를 독자로 하여금 떠올리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언어끼리 형성한 관계 안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연결고리(kinship)는 상당히 독특한 방식의 융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특별한 연결고리는 언어들끼리 서로 떨어져있는 객체가 아니라 가장 태초에 같은 지점(a priori)에서부터 시작해 인류의 모든 역사에서 벗어나 그들이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를 두고 깊은 관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굳건하다.

이러한 설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몇 번의 작은 이탈이 벌어지고 이 논리의 방향은 번역의 전통적인 의미와 다시금 합세 하는 것 처럼 보인다. 만약 언어들 간의 연결고리가 번역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원문의 형식과 의의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여기서 짚고 가야 할 것은, 이러한 논리는 번역의 정확성의 본질을 규명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에 번역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인지를 밝히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외형적으로만 비스무리하게 생긴 두 문학 작품 보다 바로 번역에 의해 언어 간의 연결고리는 훨씬 더 깊고, 명확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원문과 번역문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비평을 통해 원본을 모방하는 과정이 완벽한 번역문으로 이어질 수 없을 것이라는 불가능성을 증명하려고 할 때에 담긴 의도와 비슷한 의도를 가지고 철저한 탐구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방하는 과정을 의심하는 경우에서 중요한 문제는 의식을 통해 진품을 본따는 작업을 하는 데에 진정한 객관성은 없냐는 것이며, 원문과 번역문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려는 경우에는 번역가가 아무리 원본과 같은 번역본을 위해 궁극의 노력을 해내더라도, 모방을 통해서는 성공적인 번역이란 있을 수 없는지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원본은 자신의 후생(後生, afterlife)동안 - 이 “후생"이라는 표현은 정말로 어떤 존재가 나타난 시점 이후에 개조되고 변화되지 않았다면 적용할 수 없는 표현이다 - 변화를 겪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의미가 고정 된 단어들 조차 시간이 지나며 점차 변화 한다. 작가가 글을 쓰는 스타일에 담긴 확연히 드러나는 의중은 시간과 함께 그 색깔이 바랠 수도 있지만, 이는 결국 작품 안에 본질적으로 담긴 의의가 마침내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줄 것이다. 한 때 신선하게 들렸던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 케케묵은 이야기로 변해있을 수도 있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야기 또한 시간이 지나 ‘왕년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이러한 변화와 마찬가지로 변화하는 의미, 둘의 본질을 작품이 발표 된 당시의 전반적인 배경에서가 아니라 후세에 한 개인의 시점에서 파악하려는 행위는 한 가지 존재가 발생하게 된 가장 근원적인 원인과 그 본질을 혼동하는 것과 같다. 더 나아가 이는 생각의 힘을 고집스레 이용해서 역사의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가장 강력한 요소 중 하나를 부정하려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만약 번역을 하는 이가 작가가 생애 마지막으로 내놓은 굉장한 글을 ‘쿠데그라스’(*coup de grâce, ‘결정적 한 방'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와 같은 번역물로 만들어낼만한 노력을 했다고 한들, 위의 죽어버린 번역의 논리를 되살리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대가 지나면서 위대한 문학 작품의 의미와 중요성이 완전한 변화를 겪는 만큼, 번역가의 모국어 또한 이와 같은 변화를 겪게 되기 때문이다. 시인의 단어들은 그의 언어 안에서 숨쉬고 있다고 하더라도 번역본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번역이라 할만한 번역물도 결국엔 본언어의 발전에 기여하게 될 운명을 지니고 있으며 언젠가 또 새로운 번역과 함께 몰락하게 될 것이다. 고로 우리는 번역이 두 개의 죽어버린 언어들을 동일시 하는 작업이라는 허튼 이론에서 멀리 떨어져야 함과 동시에 번역은 언어가 계속해서 커져가는 과정과 새로이 개선될 때마다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과정을 관찰해야만 하는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원문 출처: 자유 이용 저작물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The Task of the Translator'을 번역했습니다. 원문을 구할 수 있는 링크를 여기에 남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