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발터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2)

2021. 11. 3. 20:46번역/비문학

The Author as Producer

생산자로서의 작가

 

글쓴이ㆍ발터 벤야민
번역ㆍ오성진

 

(표지 사진 출처 / 본문 사진 출처)

 

 

Part 2

 

행동주의 신조 (Activism Credo)

 

행동주의의 목표를 가장 잘 담아낸 슬로건은 바로 ‘로고크라시(*logocracy, 말(word)를 뜻하는 그리스어 로고(logo)와 민주주의를 나타내는 데모크라시를 합쳐서 만든 합성어)’, 즉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지식인의 힘’이라는 뜻이 된다. 이를 ‘지식인의 규율’이라고 해석해도 문제 없을 것이다. 좌익 지식인들 사이에서 피어 오른 이 개념은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 부터 도블린(Alfred Döblin) 까지, 그들의 정치적 선언서들 마저 가득 채우고 있다. 이 개념이 생산 구조 안에서의 지식인들의 위치(position)를 깊게 생각하지 않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실천주의 이론가인 힐러(Kurt Hiller)는 지식인층을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특정 성격 유형’을 대변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접근법을 통해 이 ‘특정 유형’의 사람들이 특별한 계급에만 존재할 뿐만 아니라 계급간에 두루두루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이는 여러 사람들을 아우르고 있으면서 그들을 한데 모아놓을 그 어떠한 기반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힐러는 정당 지도자들에게 (정당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거부 의사를 적어낸 적이 있다. 당시 그는 거절 의사를 밝히면서도 그들에게 알아두기에 좋을만한 정보를 하나 알려주었다, 바로 그들이 자신보다 “특정 문제들에 관해 더 많은 정보를 지닐 수도 있으며 (…), 말을 더 잘할 수도 있으며 (…), 더 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와중에 그만큼 확실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고 말하며 그들이 자신보다 “생각의 빈틈이 더 많다고 한 것이다”라고 지적한 것이다. 이 말은 충분히 옳을만한 가능성이 높은 말이다. 하지만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한때 말했듯, 정작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생각들이 아니라 바로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읽어내는 것이라면 과연 힐러의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실천주의는 물질주의적 용어들을 계급의 논리로는 명명지을 수 없는 평범한 개념들, 즉 상식(common sense)으로 대체하려고 노력했다. 그 안의 지식인들의 비중을 아무리 크게 생각해도 지식인층은 사회에 존재하는 한 그룹일 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바로 이 집단의 이러한 논리 그 자체가 바로 이 집단에게 반하는 논리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어떻게 단 한 번도 실제로 혁명적이었던 적이 없었는지, 그 이유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불순하게 뭉친 집단들의 존재는 아직까지도 여러 곳에서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삼 년전에 발표된 도블린의 저서,‘깨닫고 변화하라(Wissen und Verandern)’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소책자는 한 젊은이의 - 도블린은 자신에게 걸어와 ‘오늘과 같은 시대에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요?’라고 질문을 던진 이 젊은이를 호크 씨(Herr Hocke)라고 부른다 - 물음에 대한 답변을 기술했다고 한다. 도블린은 그에게 사회주의에 동참하라고 제안한다, 단 몇가지 조건을 고려할 필요도 강조했다. 도블린에 따르면 사회주의란 “1. 자유이자, 2. 사람들간의 즉흥적인 결합이며, 3. 그 어떤 제약에도 반대하는 의지이면서, 4. 불의와 힘을 향해 분노하는 자세이고, 5. 인간성이자, 6. 참을성이고, 7. 평화#"라고 한다. 여기서 그가 표현한 사회주의가 실제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떠나서, 도블린은 바로 이렇게 사회주의를 정의하고 그를 기반으로 삼아 급진적인 노동자들의 운동과 논리에 반박한다. “그 무엇도,” 책에서 도블린은 말한다, “그 안에 애초에 없었던 것으로 자라날 수 없소. 계급간에 살인적으로 치열한 투쟁으로부터 정의가 탄생할 수는 있지만 사회주의를 통해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이오.” “친애하는 젊은이여,” - 도블린은 여기서 이 논리와 다른 논리들을 통해 호크 씨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조언을 쌓아가고 있다 - “당신이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은 당신이 앞장서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에 참여한다고 해서 꽃피울 수는 없을 것이오. 당신이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투쟁을 바라보며 드는 찝찝한 마음으로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만약 당신이 그보다 더 나아가 행동을 하게 된다면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빈 공간이 생겨버리게 될 것이오. 바로 처음부터 공산주의로부터 부여받은 개인으로서의 자유,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연대, 그리고 한 인간의 주체성으로 구성된, 바로 당신이 지금 서있는 그 위치 말입니다.” 이 발췌문에서 우리는 ‘지식인’이라는 개념이 생산 구조에서 한 사람의 위치가 아니라 그 개인이 지닌 의견, 생각, 그리고 성향에 따라 결정지어진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도블린의 말에 따르면 그 젊은 남성은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안이 아닌 옆에 위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위치가 존재하기나 할까?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 이상적인 후원자로서의 자리가 과연 있겠냐는 말이다. 이런 자리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에 세워두었던 명제, 바로 ‘계급 투쟁에 있어서 지식인층의 위치란 사실 정해질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생산 구조 안에서 어디에 속하냐에 따라 정해질 수 있다'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브레히트는 ‘기능적 변화(Umfunktionierung)’라는 개념을 만들었으며, 이는 생산 수단의 자율화를 주장하며 그들이 계급 투쟁에 유용하게 쓰이기만을 바랬던 진보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생산 형식들과 도구들의 변화를 주장했다. 그는 그들에게 사회를 사회주의의 방향으로 최대한 멀리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새로운 수단이 아니라면 그들이 새로이 내놓은 생산 수단을 쉽게 전달하지 말라고 한 것이었는데, 지식인층에게 이 정도로 과감한 요구를 한 건 브레히트가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글을 내놓는 이들의 출판은”, 위 시리즈의 작가는 서문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더 이상 특정 작품들이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 연관지어서만 생각되지 않고, 오히려 특정 기관이나 현상들을 이용(변화)하려는 의지가 생겼을 시기에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주장하는 바는 파시즘에서 주장하는 ‘영혼의 정화(spiritual renewal)’와 같은 허구의 개념이 아니라 바로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만한 ‘기술의 혁신(technical innovations)’이다. 이 기술 혁신에 관한 이야기는 다시 하도록 하겠다. 여기서 나는 우선 생산에 쓰이는 기구를 단순히 전달하는 것과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내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나는 ‘새로운 객관성(New Matter-of-factness)’이라는 개념에 관한 설명을 시작으로 생산적인 도구를 - 최대한 사회주의를 위한 형태로 바꾸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 단순히 전달한다는 행위 그 자체가 얼마나 비난받아 마땅한 일인지 설명하고 싶다, 설령 그들이 내놓는 도구가 “혁명적"이라고 보일지라도 말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독일은 이 말을 뒷받침 해줄만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 십 년 동안 독일의 부르주아 측이 지녀왔던 생산 수단과 출판도 상당히 많은 ‘혁신적’인 소재들을 다룰 수 있으며 그들의 존재나 그들을 정녕 다루고 있는 계급의 출처를 밝힐 필요도 없이 그들을 대중에게 전달될 수 있음을 증명해왔다. 이는 ‘핵(hack)’류의 작가들을 - 설령 그들이 혁명적인 ‘핵’류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이야기는 같다 - 통해 그들의 도구가 전달되는 한, 모두 사실이다. 여기서 ‘핵’이란 근본적으로 사회주의를 위해 생산 수단을 발전시켜 결과적으로 생산 수단을 지배 계층으로부터 떨어뜨리려는 일련의 노력을 가볍게 여기는 작가들을 두고 내가 부르는 명칭이다. 더 나아가, 나는 소위 ‘좌익 작가들’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평생을 나날이 펼쳐지는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흥미로울만한 요소들을 집어 대중에게 유희거리를 던져주는 것 외로는 그 어떤 사회적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본다. 여기까지 말을 했으니 이제 ‘새로운 객관성(New Matter-of-factness)’이라는 개념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 개념을 통해 여러 기록물(documentary)들이 근사해졌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질문을 던질 때가 됐다. “그래서 이 기술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유용하다고 할 수 있는가?”

 

새로운 객관성(New Matter-of-factness)

 

더 명확한 설명을 위해 나는 여기서 사진의 형식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보겠다. 이 영역에서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논리는 연장해서 글쓰기의 영역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두 매체 모두 그들의 눈부신 성장의 공을 출판 기술(라디오와 사진이 들어간 신문)에게 돌릴 수 있다. 다다이즘을 떠올려보자. 다다이즘의 혁명적인 힘은 바로 예술의 진정성을 다시금 실험대 위에 올려놓았다는 점에 있다. 다다이스트들은 티켓, 스풀(spool, 카메라에서, 필름을 되감는 틀), 담배꽁초, 등등 그림과 관련된 물건들을 모아 정물화(still life)로 만들어 액자 안에 넣었다. 그렇게 완성된 정물화를 대중들에게 공개할 때의 그들은 마치 ‘봐봐, 이 그림은 시간의 벽을 폭파시키고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조각들이 일반적인 그림들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이야기하고 있잖아, 책보다 그안에 한 페이지에 묻은 살인자의 지문이 더 중요한 것 처럼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런 혁신적인 태도의 다양한 면면들이 사진술을 포토몽타주(photomontage)의 영역으로 이끌어 주었다. 간단하게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의 작품들을 떠올려보자, 그는 이 기술을 통해 책 커버를 정치적 수단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사진이 걸어온 길을 더 멀리 들여다 보자. 뭐가 보이는가? 사진은 그 이후로 보다 더 정교하고, 보다 더 현대적으로 변해왔다. 그 결과로 사진은 이제 더이상 무너져가는 아파트 건물이나 쌓여있는 배설물을 찍어도 그 의미를 변화시키지 않고선 도저히 해석할 수가 없게 되었다. 댐이나 전선 공장을 두고 ‘세상은 아름답다(the world is beautiful)’는 말 외로는 할 말이 없다는 점은 당연히 말할 필요도 없다. ‘세상은 아름답다(The World is Beautiful)’는 앨버트 랭거 파츄(Albert Renger-Patsch)의 유명한 사진집의 제목인데,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객관성’을 적용한 사진술을 가장 잘 염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기술적 완성도를 통해 심지어 불행마저 멋스럽게 다룸으로써 불행이라는 개념을 관찰자에게 하나의 희열의 대상으로 다가오게끔 성공적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새로운 객관성'에 따르면 대중들에게 봄의 계절, 영화 배우들, 외국의 경관 같은 장면들을 과거였다면 불가능한 감상법으로 현시대 유행에 맞춰 편집한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이 사진의 경제적인 기능일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 사진이란 안에서부터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현재 그대로의 현상을 유행에 맞춰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새롭게 보여주는, 정치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산에 사용되는 수단을 변화시키지 않고 전달만 할 때의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예시를 볼 수 있었다. 생산 구조에서의 수단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한 가지 장벽, 바로 지식인층의 생산이 지니고 있던 위선적인 요소를 뛰어넘기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경우에 있어선 바로 글과 사진 사이에 놓인 장벽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사진에게 마땅히 바래야 할 것은 바로 사진에 설명문(caption)을 붙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진에 이미 오랫동안 존재해온 관습들을 벗어 던지고 혁명적 유용성이 깃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요구는 만약 우리, 작가들이란 사람들이  사진의 영역을 정복한다면 더욱 강력하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도 기술적인 발전이 생산자로서의 작가가 정치적인 발전을 이뤄내기 위해 설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러한 생산 과정을 정치적으로 유용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지식인의 생산 과정에 있어서의 능력을 - 부르주아의 개념에 따르면 이는 그들의 계급 사회를 관장하고 있다 - 숙달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양쪽의 생산적인 힘을 갈라놓기 위해 생긴 장벽들을 동시에 무너뜨려야 한다. 생산자로서의 작가가 프롤레타리아 계급과의 연대감을 느낀다면 그와 동시에 이전에는 관심을 가지지도 못했던 특정 다른 생산자들과의 연대감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진가에 관한 이야기를 마쳤으니 이제는 잠시 아이슬러(Hanns Eisler)가 음악에 관해 이야기한 부분을 한 번 짚어보려고 한다. “음악의 발전 과정 - 음악이 생산되고 또 재생산되는 과정 - 속에서도 우리는 점점 더 강하게 적용되는 효율성의 고도화(rationalization)를 인지해야만 한다. (...) 축음기용 음반, 유성 영화, 그리고 쥬크박스 모두 대량 생산 가능한 형태를 통해 굉장한 수준의 음악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많은 사람들의 손에 닿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점점 효율화되는 과정을 통해 음악의 재생산은 전보다 더 적은 수의, 훨씬 더 고품격의 전문가들만이 해낼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상업 음악이 겪게 되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기술들이 탄생하면서 기존의 생산 형식이 점점 무용지물의 것으로 바뀌면서 벌어진다.” 고로 음악 시장은 그들의 형식을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할 수 있도록 바꾸는, 문화의 기능전환(Umfunktionierung)이라는 의무를 짊어졌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형식의 두 가지 조건 중 첫번째로는 음악인들과 청중들 사이의 안티테제를 없애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그 중 두번째로는 기술과 내용 사이에서 맞붙는 안티테제 또한 없앨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있다. 아이슬러는 이러한 논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오케스트라 음악을 두고 과대평가하거나 세상에서 유일하게 고귀한 형식의 예술이라고 인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글이 빠진 음악은 오로지 자본주의만을 통해 현재의 ‘중요하게끔 여겨지는 이미지’와 발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 말은 즉슨 음악 환경을 진정으로 바꿔야 하는 의무는 글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아이슬러가 세운 논리를 따르면 글은, 다른 매체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공연장을 정치적인 의미가 담긴 모임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음악과 문학 기술의 정점이 만났을 때야 비로소 이런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은 브레히트와 아이슬러가 그들의 교훈적인 공연, ‘The Measures Taken’을 통해 증명해보였다.

 

그럼 이 밴티지 포인트(vantage point) 위에서 다시 이전에 이야기한 문학 형식을 재수렴하는 과정으로 되돌아보자. 당신은 이제 사진술과 음악, 그리고 그 외로도 떠오르는 것들은 완전히 녹아 새로운 형식의 틀 안으로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또한 삶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상황들을 문자화하는 방식만이 오롯이 위와 같은 ‘재구성 과정’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현재 계급 투쟁의 상황만이 바로 그 대립이 처음 형성되었던 순간의 온도를 알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난 일전에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사진술의 한 유형 중 다른 이의 빈곤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사진술을 소개한 바가 있다. ‘새로운 객관성'을 하나의 문학 운동이라고 본다면,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새로운 객관성'은 다른 이들의 빈곤과의 투쟁을 일개 상품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보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운동의 정치적인 의미를 따져보자면, 이러한 활동이 부르주아층에서 나타나는 한, 혁명적인 정신들은 별 어려움 없이 대도시에서 이루어지는 캬바레(cabaret) 장사, 즉, 세상에서 관심을 떼어놓을 수 있는 유희 거리들로 전락했다고도 볼 수 있다. 정치적 투쟁이란 소재를 이용함으로써 투쟁을 단순한 유희의 대상으로, 생산 수단을 단순한 소비 대상으로 바꿔주는 것이 바로 이 ‘새로운 객관성' 문학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통찰력 있는 한 비평가는 에릭 카스트너의 예시를 들며 이와 같은 현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급진적인 좌익 지식인층들은 실제 노동자들이 일으키는 운동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오히려 부르주아층이 무너지는 과정 중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며, 이들은 자신을 봉건주의적 층위에 동화하고 카이저 제국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부루주아지 데카당스의 주변부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프롤레타리아의 탈을 쓴 카스트너(Erich Kästner), 메링(Mehring), 투콜스키와 같은 급진적 언론인들은 이와 같이 썩어버린 부르주아층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관점에서, 그들의 기능은 실질적인 영향을 펼칠 수 있는 당을 만드는 데 있다기 보다는 일종의 사조직(clique)을 만드는 데 있으며, 문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들은 후세에게 본보기가 되어줄 법한 하나의 도장(道場, school)을 짓는다기 보다는 일시적인 유행을 만들 뿐이며,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그들을 생산자로 보기 보다는 일종의 대리인(agent)일 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빈곤을 자랑스레 여기저기 보이며, 끝이 없는 공허함을 통해 만찬을 내놓는 핵이나 대리인일 뿐이라는 말이다. 이렇게도 불편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위치만큼이나 편안한 자리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 “급진적 좌익 지식인들"은 위에서 한 번 말했듯이 그들의 빈곤을 소재로 이용해 근사한 쇼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시대 작가들에게 가장 육중하게 다가와야 마땅한 임무, 바로 그 스스로 얼마나 가난한지, 그리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려면 또 얼마나 더 가난해져야 하는지 인지해내는 일을 가볍게 무시해버릴 수 있다. 당연히 소련 공화국들은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묘사한 방식처럼 시인들을 추방시키지 않을 것이다 - 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맨 처음에 플라톤의 국가론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 허나 소련 국가는 시인에게 시인으로 하여금 ‘창의적인 성향의 가짜 부자들'이라고 이미 오랜 기간 동안 잘못된 형식으로 발각된 이들의 성격을 담은 작품을 내놓지 못하게 제약을 걸어둘 것이다. 그러한 형식이 새롭게 개혁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일은 파시즘의 특권과도 같은데, 그렇게 되면 구멍난 생각들이 만들어낸 위험한 형식을 내버려두는 꼴과 같으며 이는 군터 그룬델(Günther Gründel)은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담은 책, ‘젊은 세대의 임무(Mission of the Young Generation)’의 일부에서도 언급된다: “이런 현상… 아니면 질병과도 같은 상황은 우리 시대의 윌헴 마이스터(Wilhelm Meister)나 그린 하인릭(Griine Heinrich)이 아직도 나타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의 생산 공정의 상태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되짚어 본 작가에게 이러한 작품들을 기대하거나 바라는 마음은 절대 생길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가의 작품은 절대 꾸준히 발전해나가는 제품에 그치지 않고 언제나 그들을 생산해내는 생산 수단과의 연결고리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식적인 작가의 생산품들은, 작품의 성격을 떠나, 반드시 연결 기능(organizing function)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며 그들이 지닌 연결 기능은 오로지 프로파간다의 용도로만 쓰이는 데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작품이 지닌 정치적인 경향 하나만으로는 사람들간의 연결을 이뤄낼 수 없다. 위대한 리히텐베르크(Lichtenberg)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지닌 특정 의견들은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의견들로 하여금 그가 어떤 사람이 되냐는 것이다.” 물론 한 개인이 지닌 의견들이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설사 그것이 최고의 의견이라도 만약 그 의견을 지닌 사람을 통해서 그 의견이 유용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형태의 정치적 경향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제시하는 개념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일종의 태도를 내놓지 않는 한 틀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작가라면 이러한 태도를 제시할 수 있으며, 그 역할은 바로 그의 글쓰기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정치적 경향은 한 작품의 연결 기능의 필요 조건이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결코 충분 조건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경향은 작가에게서 조금 더 가르치고자 하며, 기준을 제시해줄만한 자세를 요한다. 특히나 오늘날은 그 어느때보다 더욱 이러한 자세가 요구될 필요가 있다. 다른 작가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줄만한 요소가 없는 작가는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도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첫째로 중요한 건 생산 구조의 이러한 모범적인 성격을 통해 다른 생산자들로 하여금 생산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이러한 방향을 지닌 작가들이 다른 생산자들에게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조금 더 나은 수단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단은 더 많은 소비자들을 생산 과정으로 참여할 수 있게끔 이끌수록 더 좋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다른 말로 하자면 관중이나 독자들을 그들과 함께 일하는 동료들로 만들 수 있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우리는 벌써 이미 이러한 모델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관한 얘기는 여기에서 짧게 밖에 못할 것이다. 이 모델은 바로 브레히트의 서사 연극(epic theater)이다.

 

원문 출처: 자유 이용 저작물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The Author as Producer'을 번역했습니다. 원문을 구할 수 있는 링크를 여기에 남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