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버트랜드 러셀, "행복을 쟁취하는 방법: 12. 애정" (5)

2021. 8. 15. 19:28번역/비문학

행복을 쟁취하는 방법


글쓴이ㆍ버트랜드 러셀
번역ㆍ오성진

 

 

(표지 사진 출처 / 본문 영상 출처: 1 & 2 & BONUS)



제12 장: 애정


한 개인에게 있어 열정이 부족한 현상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바로 그 사람이 사랑받지 못한다는 점이며 이와 정반대로 어떤 이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경우에는 그 무엇보다 많은 열정을 생성할 수 있다. 개인이 사랑받지 못 한다고 느끼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텐데, 스스로를 몹시 지독하게 평가하는 탓에 다른 이가 자신을 좋아하는 일이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하거나; 어렸을 때 다른 아이들이 받은 사랑보다 사랑을 덜 받았거나; 아니면 그냥 단지 실제로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 그 공통적인 뿌리에는 어렸을 때 맞이한 불행으로 인해 낮게 떨어져버린 자신감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 감정으로 인해 다양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첫 번째로 그는 지나친 친절로 불쌍할 정도로 간절하게 상대방의 애정을 얻어내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베푸는 친절한 행동 뒤에 개인의 이득을 노리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이며 사람들의 기본적인 천성은 애정을 갈구하지 않는 이들에게 애정을 베푸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전략은 실패할 확률이 상당히 높다. 그렇기 때문에 친절한 행동을 통해 남들의 애정을 사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듯한 사람들의 반응들을 보면서 사람들을 향한 환멸감을 쉽게 느낀다. 그에게 애정이란 본디 자신이 임의적으로 매긴 값어치만큼 베푸는 친절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결코 떠오를리 없다.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유형 중 다른 예를 들어보자, 어떤 이는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세상에 어떻게 복수를 할지 떠올릴 수도 있다. 그는 혁명이나 전쟁을 일으키거나 딘 스위프트*(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작가, 풍자성 짙은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처럼 분노가 담긴 펜촉을 꾹꾹 눌러가며 글을 휘갈길 수도 있다. 이것은 자신이 마치 영웅이 된 것 마냥 불행에 대처하는 행위인데 여기에는 세상 전체와 맞붙는 입장에 세워져도 손색이 없을만큼 강한 캐릭터성이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인지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그 정도의 거사를 치를 수 있으며 나머지 대다수의 특색없이 지내는 그럭저럭한 사람들은 - 성별을 떠나 - 자신이 사랑을 받고있는 느낌이 들지 않는 순간마다 가끔씩 악의적인 행동과 질투심을 내비치면서 조금씩 응어리를 풀어내주어야만 하는 잔잔한 우울감에 빠져버리는데 그친다. 위와 같은 성향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극적으로 자기중심적인 경향은 그들만의 규칙인 것 처럼 보이며 애정이 부족한 현상으로 인해 한 번 자존감이 땅으로 꺼지는 걸 겪은 이들은 그 후에 혹시 상황이 나아지려고 하더라도 본능적으로 자신의 삶을 전과 비슷한 느낌으로 채워버리고 현재 마주한 새로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이와 같이 스스로를 변하지 않는 악순환의 구렁텅이에 가둬 놓는 사람들은 보통 춥고 매서운 바깥 세계를 향한 두려움으로 가득차있는 동시에 과거부터 걸어왔던 길대로만 똑같이 쭉 걸어가다보면 바깥 사회와 엮일 일도 없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있기도 하다.

극도로 안정감을 느끼는 탓에 재앙 같은 상황에 빠져버리지 않는 한, 조금 더 안정적인 시선으로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은 매번 불안정하게 약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닐테지만 - 약한 사람이었다면 쉽게 굴복했을 법한 문제를 맞닥뜨릴 때에도 안정감만 있다면 그 문제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큰 구멍을 가로지르는 좁은 나무 판자 위를 걷는다고 상상해봐라, 겁을 먹은 쪽과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쪽, 과연 어떤 쪽에 사고가 날 확률이 덜할까? 인생을 이끌어가는 데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에게도 - 너무도 당연하게 - 누군가에겐 재난이라고 생각될만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럭저럭한 사람이었다면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는 그 문제를 눈앞에 두고도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상처 하나 없이 문제를 뚫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자신감으로 부터 오는 이런 유형의 이점들은 셀 수 없이 많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인생을 대할 때 충분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자세는 보통의 경우, 자신이 필요로 하는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애정을 받았을 때 생길 수 있다. 그리고 그들처럼 생각하는 습관이 바로 열정의 원천이 되어줄 수 있다는 점이 바로 내가 이 장에서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대부분 유형의 애정은 상호적으로 작용하지만, 보통의 경우 사랑을 주는 행위보다는 받았을 때야 말로 위에서 언급한 안정감을 손에 거머쥘 수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러한 효과는 애정을 받을 때 뿐만 아니라 존경을 받을 때에도 발현한다. 대중이 우러러보는 일을 업으로 사는 사람들, 예를 들어 배우, 목사, 강연자들, 정치가 같은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그들의 환호에 중독되어 간다. 자신들이 받아 마땅한 대중의 인정이나 보상을 받으면서 그들의 인생에 열정이 피어나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 그들은 불만족스러워 하는 동시에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많은 대중 사이에 퍼진 형태로 그들에게 조금씩 전달되는 애정은 다른 이들에게 적은 사람들이 조금 더 집중된 형태로 전달해주는 애정이 해줄 수 있는 일을 기꺼이 해낸다. 부모님의 사랑을 평균 이상으로 받고 있는 아이는 그들의 사랑을 그저 자연적으로 당연한 일이라고 여긴다. 그들의 사랑이 아이의 행복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는 세계에 대해서, 그의 앞에 나타나는 모험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컸을 때 그를 찾아올 더 환상적인 모험들에 대해서 떠올린다. 하지만 위와 같은 외부적인 관심사들 뒤에는 설령 그가 재난같은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그의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있다. 부모의 사랑이 배제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는 두려움과 자기 연민으로 가득찬 채, 모험적이지 못하고 단순히 그럭저럭하게 자랄 가능성이 높아서 결과적으로 세상에 나갈 때 기쁜 일이 가득한 여행을 앞두었다고 생각을 해내기 힘들 것이다. 또한 그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어린 나이에 직장을 구해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해 성찰하는데 빠져버릴 수도 있다. 아이는 그렇게 처음엔 내향적이고 멜랑꼴리한 기분을 주로 느끼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특정 유형의 철학이나 신학적 체계를 쫓아다니며 비현실적인 위안을 찾게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원체 뒤죽박죽이다. 이 곳엔 기쁨을 자아내는 일도, 그닥 기쁘지 않아 할만한 일도 들쑥날쑥 제멋대로인 순서대로 줄서있다. 이런 세상에서 확실한 패턴이나 체계를 찾아내려고 하는 욕망은 결국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며 여기서의 두려움이란 보통 광장 공포증, 또는 열린 장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유형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서재에서 이 그럭저럭한 사람은 스스로 매우 안전하다고 느낀다. 그에게 언젠가 바깥 세상이 그의 서재만큼이나 잘 정돈되어있다고 믿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에게 바깥 거리로 나가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다가올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이 살면서 더 많은 애정을 받아 왔다면, 그가 세상을 향해 가진 두려움은 줄어들 것이었을테고 그의 신념에 인공적인 이상론이 스며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종류의 애정이 위와 같이 한 개인에게 모험심을 심어주는 역할을 해낸다고 볼 수는 없겠다. 보통 애정을 받아 마땅한 쪽은 자신의 분야를 대할 때 안전보다는 - 물론 안전성을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 조금이라도 더 훌륭해지는 방법을 떠올리는 사람들, 즉 그럭저럭한 사람들 보다는 용감하고 터프할 줄 아는 이들이어야 마땅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악을 떠올리며 세상의 모든 개들은 사람을 물어 뜯으며, 세상의 모든 소는 뿔이 달린 성난 황소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그저 그런 엄마나 보호자는 아이에게 자신의 ‘그럭저럭함'을 고스란히 물려주게 될 것이고, 그 결과로 아이로 하여금 그녀 주변에 있지 않으면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과도한 소유욕을 지닌 어머니에게 자기 자식이 이렇게 느낀다는 것은 좋은 소식일 수도 있다: 그녀는 아이를 너무도 걱정한 나머지, 자식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일들을 함께 헤쳐나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크게 봤을 때, 그녀의 자식은 결과적으로 그가 애초에 조금의 사랑도 받지 못했을 경우보다 일처리를 더 못하게 되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일찍이 인생 초기에 머릿속에 자리잡은 습관들은 죽는 순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으며 위와 같은 유년기를 겪은 사람들은 사랑을 세상에서의 탈출구라고 여기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존경 받아 마땅하지 않을 때 존경 받고 싶어하며, 칭찬 받지 못할 사람임에도 칭찬 받고 싶어하게끔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 많은 남성들에게 그들의 집은 진실로부터의 피난처 역할을 해준다.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스스로의 그럭저럭함이야말로 바로 잠시나마 연인 관계를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게 하며, 또 그만큼 즐기게 해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명하지 못한 어머니에게서부터 받은 것들을 그들의 아내에게서 바라면서도 아내가 그들을 ‘몸집만 큰 어린이'라는 뉘앙스가 담긴 호칭으로 부를 경우엔 경악을 금치 못한다.

가장 바람직한 유형의 애정은 - 거기엔 반드시 보호하려는 심리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 단순하게 정의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덤덤하게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건 내 생각인데, 불행이 닥친 이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지 않고 걱정과 불안을 담아 다가가는 일은 최대한 자제하는 쪽이 좋다고 생각한다. 남을 위해 걱정하는 일에는 고작 해봤자 우리 스스로를 걱정하는 모습 위에 얇은 막 하나가 씌워져있는 꼴일 뿐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러한 태도나 감정은 대다수의 경우에 소유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타인에게 걱정 섞인 말들을 뿌려가면서 그들을 철저히 가둬 놓을만한 감옥을 세우고 싶어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야말로 바로 남성들이 그럭저럭한 여성들을 좋아하는 이유에 해당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런 여성들을 지켜줌과 동시의 소유권을 얻게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한 개인이 얼마나 많은 배려심을 지녔는지는 바로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단단하고 모험적인 사람이라면 큰 피해 없이 상당한 양의 문제들을 견딜 수 있을 것인데에 반해 그럭저럭한 사람은 약간의 문제에도 크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우리가 받는 애정에는 이중적인 면모가 있다. 지금껏 우리는 애정을 개인이 얼마나 안정감을 지니게 되었는지와만 연관지어 왔지만 성인의 삶에서 애정은 사실 조금 더 생물학적으로 필연적인 목적이 있으며 그것은 바로 부모로서의 삶에 담겨있다. 성별을 떠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과 섹스하고 싶은 마음을 떠올리게끔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인생에 딸려오는 가장 즐거운 일 중에 하나를 놓친다는 점을 시사하기에 굉장히 지독한 불행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한번 자리잡은 결핍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삶에서의 열정을 앗아가는 동시에 내향성을 심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다수의 경우, 훗날 성인이 되어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데에는 상당 부분 어렸을 때 생긴 결점들에서 기인한다. 아마도 이건 외형보다는 성격을 보는 여성들보다는 그렇지 못한 남성들에게 더 많이 적용되는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면을 고려해보면 남성이 어떤 점에서 여성보다 열등한지 알 수 있다, 그들이 이성에게 찾고자 하는 점이 여성이 찾는 것 보다 훨씬 더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애정에 관하여 이야기했다면 지금부터는 한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있는 유형의 애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여기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삶에 열정을 들이기 위해 할 수 있는 표현 중에 아마도 가장 중요한 표현으로서의 애정이며 두번째는 바로 두려움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내가 봤을 때, 전자의 경우엔 존경받아 마땅해 보이는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며 후자는 기껏해야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당신이 햇볕 좋은 날을 잡아 아름다운 해변을 따라가는 배를 운항하고 있다고 해보자. 당신은 해변이 자아내는 광경을 경이롭게 여기며 지금 이 상황을 매우 만족하며 즐기고 있다. 여기서 느끼는 즐거움은 오로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면서 생기는 감정이며 당신 안에 자리 잡은 걱정거리들이나 고민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어나가 만약, 위와는 반대로, 배가 부서지는 바람에 당신이 배를 탈출해 수영으로 해변가까지 도달했다고 해보자. 여기서 당신은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을 터득하게 될 것이며 이 사랑은 파도에도 스스로를 지켜내야만 한다는 불안에서 비롯되며 이 유형의 사랑을 배우고 나서는 뒤에 보이는 배경이 얼마나 못났거나 아름다운지, 더이상 당신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둘 중 더 나은 유형의 애정은 바로 배를 탈출한 사람이 느낀 감정보다는 바로 안전한 배 위에 서있던 남성이 지녔던 감정일 것이다. 이 유형의 애정은 남성이 스스로를 안전한 상황에 있다고 느낄 때, 또는 그에게 다가오는 위험한 상황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며 이와 반대로 둘째 유형의 애정은 개인이 불안해할 때 발생한다. 불안정한 상황에서 피어오르는 감정은 다른 감정들 보다 조금 더 주관적이며 자기 중심적이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불안감을 안고 사랑에 돌입한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닌 선천적인 성격이나 특징들 보다는 그 사람이 자신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것들이 과연 무엇일지부터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난 이러한 유형의 애정이 인생에서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추가적으로 거의 모든 종류의 진정한 사랑에는 두 가지 유형이 복합적으로 섞여있으며 한 남자가 정말 사랑을 통해 세상을 향해 불안해 하는 증세가 가시고 다시금 자유롭게 느끼게 될 수만 있다면야, 여기에도 상당한 순기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와같은 유형의 사랑이 분명히 인생에서 특정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무시하지는 않되, 이 유형의 애정은 개인에게 있어 독과도 같은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다른 유형의 사랑보다는 덜 훌륭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저버릴 수 없다.

가장 좋은 유형의 애정은 한 개인이 과거의 불행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가 아니라 바로 새로운 행복을 찾아 나설 때 생성된다. 가장 좋은 사랑은 바로 서로의 삶을 서로에게 양보하는 데에서부터 비롯되며 각자 즐겁게 서로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또 주는 것을 노력없이 해내는 경우에 있는 것이다.

사랑엔 - 결코 흔치 않은 경우지만 - 또다른 경우도 있는데, 이건 바로 한 사람이 상대방의 활력을 뺏어먹으며 상대방이 주는 사랑은 모조리 갉아 먹지만 그 대가로 상대방에게 그 어떤 마음도 주지 않는 경우이다. 상당히 활력 넘치는 사람들 중 몇몇은 바로 이 유형에 이렇게 피를 빨아먹는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타겟으로 삼아 에너지를 뺏어먹으며 나날이 흥미로운 사람으로 성장하는 사이, 그들의 상대방들은 날이 갈수록 고유의 힘과 색채를 잃어가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타인을 단순히 그들의 이익을 위해 소비해버리며 절대 스스로 남에게 무언가 제공해줄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 잠시동안이나마 - 그들이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근본적으로 사랑을 느끼고 있지 않음은 물론이고 그 대신 오로지 그들의 활동, 그것도 사람과 연관되지 않은 자신의 관심사를 즐기면서 느끼는 자극에만 온 관심을 쏟고 있다. 이러한 성향은 그들이 선천적으로 지닌 결점들로부터 생겨나지만 자세한 진단을 내리거나 이렇다 할만한 해결 방안을 떠올리기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이러한 성향의 뿌리는 보통 강한 성취욕과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어린 시절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결론을 내렸을 때, 어느 한쪽으로만 편중된 결론을 내려버린 경우가 대다수일 것이다.

서로의 이익을 위하기 보다는 둘이 공통적으로 이익이라고 생각할만한 영역을 새로 만들고 계속해서 그 영역을 늘리는 것만이 진정 상호적으로 연결된 애정의 올바른 예시인 동시에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에고로 만들어진 철벽에 둘러싸여 살게 된 사람은 이러한 환경을 자아내지 못하기에 - 그가 일적으로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를 떠나서 - 궁극적으로 인생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근사한 경험을 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애정이 결핍된 열정은 전반적으로 봤을 때 인류를 향한 증오나 화와 같은 감정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을 것이며 이 감정은 어린 시절에, 또는 뒤늦게 부조리를 느끼게 된 순간들에, 아니면 피해 망상광들로 변하게 될 수 있을만한 특정한 사유에서부터 시작되었을 수 있다. 사람에게 있어 강력한 에고는 - 세상을 정녕 즐기기 위한다면 - 꼭, 반드시 벗어나야만 하는 감옥이다. 사랑은 받는 것만으로 부족할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서 받은 애정은 되돌려주거나 다른 이에게 다시 베풀어야만 하며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 두 가지가 공존하는 상황에서만이 애정의 긍정적인 역할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된다.

두 사람간의 상호적인 애정의 길을 막는 장애물은 -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 언제나 사악하며 세상에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사람들은 사라져야 마땅한 두려움을 인식하는데 능하지 못하며 이 억압적인 세상에서 고통만 낳고 있는 두려움 대신에 애정을 주고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도덕성과 세상의 상식이라는 지독한 이름으로 모든 이의 마음에 조심성이 뿌리내리고, 그로 인해 정작 애정이 있어야만 비로소 생기는 모험심이나 진정한 친절은 죽어나간다. 많은 사람들이 열중 아홉은 행복감과 세상을 향한 넓은 시야를 손에 넣기 위해 꼭 필요해할만한 요소를 인생의 이른 시기에 놓쳐버리기 때문에 위와 같은 현상들은 거기에 더불어 인간들 사이에 그저그러함과 화를 자아내게 된다. 이러한 면을 고려하여 비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성간의 관계에 진정한 사랑이 돋보이는 경우는 매우 적으며 심지어 관계의 근본적인 배경에 공격성이 숨어있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 남자건 여자건, 각자 자신을 들춰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각자 외로운 감정을 지키려고 한다. 고로 사람들은 세상과 조금씩 더 멀어지게 되며, 그렇게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경험에는 그 어떤 근원적으로 의미있는 가치도 있다고 보기 힘들다. 이러한 현상을 멈추게하기 위해서 섣불리 움직였다간 아마도 더 가치가 있거나 심오한 애정이 피어오르는 상황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절대적으로 피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난 진정한 가치를 지닌 관계는 바로 자신을 숨기려 드는 마음이 없고 각자의 모든 성향이나 성격이 하나로 합쳐져 둘만의 새로운 성격을 만들어 낼 때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꼭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조심성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그 중에 사랑을 다룰 때 가지는 조심성은 진정한 행복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녀석임을 우리가 잊어선 안된다.

+BONUS

 

원문 출처: 자유 이용 저작물인 버트랜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The Conquest of Happiness'의 서문과 목차를 번역했습니다. 원문을 구할 수 있는 링크를 여기에 남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