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27. 17:55ㆍ번역/비문학
행복을 쟁취하는 방법
글쓴이ㆍ버트랜드 러셀
번역ㆍ오성진
제9 장: 눈치
한 집에 같이 사는 사람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신과 사회적으로 연결되어있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않고도 행복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다. 사회에 자리 잡고있는 각각의 집단마다 각자 공유하는 가치관이나 신념이 근본적으로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현대 사회의 고유한 특이점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종교 개혁이 이루어졌을 때부터 - 누군가는 르네상스를 시작점으로 볼 수도 있겠다 - 시작해 시간이 갈수록 그 색깔을 더 짙게 나타내고 있다. 당시 구교와 신교는 신학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실리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귀족들은 부르주아층이 받아들이지 못할만한 일들도 거침없이 수행했던 당시엔 그 외로도 당대의 종교관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유주의자들과 종교적 사유에서 벗어난 자유사상가들이 많이 등장했다. 여기에서부터 뿌리를 내린 사람들 간의 차이는 오늘날 유럽대륙을 통틀어서 사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를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간극으로 커졌으며, 이러한 차이는 당연히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삶에 관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국가에서는 이러한 류의 분열은 많은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어떠한 환경에서 예술은 추앙받는 와중에 다른 곳에서는 조금이라도 현대의 것이라고 칭할만한 예술을 두고 악마의 산물이라고 여기며, 어느 한 쪽에서는 왕국에 충성심을 다하는게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도리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다른 쪽에선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악하다고 여기기도 하고 몇몇은 이러한 주제를 둘러싼 논의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본다. 관습을 중시 여기는 사람들은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극악의 죄는 간통이라고 여기는 반면에 사실 대중의 상당수는 간통 정도는 눈감아줄만한 일이라고, 심지어 칭찬받아야 할만한 일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천주교에서 이혼이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기지만 천주교도가 아닌 사람들은 이혼을 두고 결혼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명약이라고 생각한다. 위에 나열한 예시들 말고도 현대인들간에 보이는 극적인 차이점들은 무수히도 많이 존재한다.
차이점들이 이렇게나 많이 존재하게 된 덕분에 특정 가치관을 살고 사는 사람들은 집단 A에서는 완전히 외톨이로 전락한 삶을 이어가야 할수도, 다른 집단 B에서는 차별없이 그 집단의 일원으로 환영받을 수도 있다. 불행의 상당수는, 특히나 젊은 날의 불행은, 대개 이런 원리로 발생한다. 세상의 많은 젊은이들은 허공을 떠돌고 있는 생각들을 낚아채다가 이내 곧 그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일삼을 것이며 머지않아 자신이 사는 환경에서 그가 새로이 들인 가치관이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치부된다는 사실 또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이 마치 세상을 대변해준다는 환상에 쉽게 빠져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환경 속에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자유롭게 밝히는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물론 세상의 무지함 덕분에 한 개인이 어렸을 적 거쳤을 법한 상당한 양의 정신적 고통은 다행스럽게 묻혀져버릴 때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안전망은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함께해주지 않는다. 한 번 이런 사유로 사회와 단절되면 주변에 보일듯 말듯 깔린 공격성에 대항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쏟아부어야만 할 것이며 백 중 아흔아홉의 경우엔 주변 사람들의 기대치에 맞춰주기 위해 매번 그저그런 결론을 내놓아야만 하는 고통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브론테 자매(*샬론, 에밀리, 앤 브론테는 모두 영국 출신의 작가이다)는 그들의 책을 출간하기 전까지 그들과 통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만나보질 못했다고 말한 바가 있다. 평소에도 영웅적인 면모를 지녔던 에밀리는 이렇게 답답한 환경 속에서도 안좋은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샬롯만큼은 달랐다. 그녀의 꿈은 - 글을 창작하는데 있어 그녀의 엄청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 가정교사였기 때문이다. 에밀리 브론테와 마찬가지로 블레이크 또한 워낙에 사회와 멀리 떨어져있다고 생각하며 생을 이어나가야 했지만 그는 모든 악영향을 견디면서 결국엔 장애물들을 뛰어넘을만한 능력을 쥐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겐 한 번도 자신이 틀렸다거나, 대중이 맞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그의 길을 올곧이 걸어올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의견에 관한 그의 태도는 다음 문구에 잘 담겨있다:
The only man that e'er I knew
내가 아는 사람 중에
Who did not make me almost spew
유일하게 나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지 않은 사람은
Was Fuseli: he was both Turk and Jew.
바로 터키인이자 유대인인 푸셀리였다.
And so, dear Christian friends, how do you do?
그래서 말인데, 신교를 따르는 자네들, 지금 진정으로 안녕하신가?
하지만 아쉽게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정도로 영웅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지 않다. 게다가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 환경과 동일한 가치관을 지니기 마련이다. 그들은 유년기에 세상에 널린 고정관념들을 흡수하며 본능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관습과 신념에 적응해버린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지적인 힘이나 예술적인 힘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난 소수층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회화의 흐름을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예를 들어볼까, 조금이라도 지적인 요소가 보이면 즉시 거부감부터 보이는 작은 시골동네에서 자란 한 사람이 있다고 쳐보자. 만약에 그가 어려운 책을 읽으려고 한다면 다른 소년들은 그를 시기할 것이며 그를 가르치는 교사들은 그에게 마음만 심란해질텐데 왜 그딴 책을 읽냐고 나무랄 것이다. 만약 그가 예술을 좋아한다면 그의 또래들은 그를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길 것이며 그의 주변 어른들은 그를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여길 것이다. 만약 그가 그의 주변 사람들이 잘 고르지 않는 직종의 일자리를 구하려고 한다면 - 그 일자리가 얼마나 사회에서 존중받는지를 떠나서 - 주변인들은 그에게 험난한 길을 택했다며 뭐라 할 것이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아버지가 했던 적당해 빠진 일이 그에게도 잘 어울릴 것이라고 추천할 것이다. 만약 그가 부모의 종교적 교리나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뭐라고 한다면 그와 부모 사이의 관계는 높은 가능성으로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이유들로 인해 엄청난 재능을 지니고 세상에 발을 들이민 상당수의 젊은 남녀들은 매우 불행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될 것이다. 그들 주변에 비교적 평범한 사람들에겐 청소년기만큼 즐거움과 재미있는 일들로 가득한 시기가 또 없겠지만, 그들은 뭔가 더 진중한, 주변 어른들이나 또래 친구들에게선 보이지 않는 매우 귀중한 것을 끊임없이 바라게 된다.
위와 같은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은 아마 대학교에서 그들과 생각이 맞는 영혼들을 뒤늦게 찾게 되면서 몇년 간 굉장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에게 행운이 따라준다면 그들은 대학교를 졸업하는 동시에 그들과 맞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한 영역의 일을 구하는데 성공할 수도 있다. 런던이나 뉴욕같은 대도시에 사는 지적인 사람이라면 자기모순적인 언행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나 그 어떠한 제약도 느낄 필요도 없이 쉽게 그와 생각이 맞는 사람들을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의료계나 법료계의 일처럼 그의 일이 그로 하여금 좀 더 작은 지역 - 특히나 평범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탁한 환경 - 에서 살게 만든다면, 그는 평생을 살면서 그의 진짜 취향이나 신념들을 숨겨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 필요 이상의 그럭저럭함은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대중의 칼날은 언제나 여론에 신경을 안 쓰는 쪽의 사람들보다 여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날을 세우려는 경향이 있다. 개는 자신을 경멸하는 투로 대하는 사람보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더 강하게 짖고 물기도 하는 법이며 인간 군중에도 이와 비슷한 특징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들에게 두려움을 비치는 순간, 당신은 스스로 좋은 사냥감임을 인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며 그에 반해 당신이 대중의 힐난에도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이 지닌 힘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당신을 곱게 보내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건, 너무 당연하게도, 극적인 형식의 반항이나 혁명이 아니다. 내 말은 단지 당신이 러시아의 관습을 지닌 채 켄싱턴에 살거나, 켄싱턴의 전통을 따르며 러시아에 살고 있다면, 그에 잇따르는 결과는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마저도 난 이렇게 극적인 예시 보다는 관습적인 삶에서 약간 떨어져있는 예시들을 언급하고 싶다. 적절하게 옷을 갖춰입지 못했다거나, 교회에 귀속한 삶이라던가, 학문적인 책들에서 멀어지는 것과 같은 일들 말이다.
위와 같은 행위들이 태평하고 즐거운 태도로, 그리고 반항적이기보다는 즉흥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세상에서 가장 전통적인 사회에서도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그 사회에서 '인증된 미치광이'라는 타이틀을 얻게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에겐 다른 구성원이 했다면 결코 용서받지 못말 만한 일도 허용이 될 것이다. 크게 보면 이건 특수한 종류의 친절함과 좋은 본성의 문제이다. 관례를 잘 따르는 사람들이 관행을 벗어난 행동을 보면 화를 내는 이유는 바로 자신과 다르게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평소 모습을 비판하거나 희화화하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거지와 다르게 움직이는 사람을 보더라도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성격에 친절함과 즐거움이 묻어난다면 그들은 자신이 생활하는 방식이 욕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일도 없이 그에게 편하게 대할 것이다. 그러나 군중과는 도무지 공감할 수 없을 만한 취향이나 의견을 가진 자들에게는 이렇게 질책받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거의 불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쉽게 남들과 공감을 하지 못하는 태도는 그들로 하여금 - 겉으로는 사회에 순응한 것 처럼 보이거나 날카로운 문제들을 잘 피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 사회 전반에 공격적인 태도를 지니게끔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여론의 흐름과 동떨어지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드세고, 조금 더 불편해하며, 조금 더 좋은 질의 유머는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 당신은 이 사람들이 어느 날 만약 그들의 생각이 평균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로 훌쩍 떠난다면, 지금껏 살아온 바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생활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로 매사에 진지하고, 소심하며, 힘이 빠졌던 모습에서 새로운 사회에서는 즐겁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모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면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원만하게, 자기중심적이었던 이가 더 사회적이고 외향적으로 변한 모습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환경과 도무지 짝이 안맞는다고 여기는 젊은이들은 그들이 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방향의 직종을 - 설령 그 직종이 다른 대안 보다 돈을 덜 벌게되는 옵션이라고 하더라도 - 업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상당 수의 경우, 그들 중 대다수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탓에, 그리고 가정에서 배운 편견들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 덕에 이렇게 자신과 맞는 직종을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이 그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오늘날의 심리분석학에는 젊은 사람이 그들의 주어진 환경의 것과 많은 차이를 보이는 가치관을 지녔을 때, 그 이유가 바로 심리적인 병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여기려는 흐름이 있다. 내가 봤을 땐 이것만큼 어처구니 없는 결론도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진화론이 허구의 산물이라고 여기는 부모 밑에서 자란 젊은이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가 그의 부모와 공감하지 못하게 되는데 필요한 것은 약간의 지능 뿐이다. 자신의 주변 환경과 동떨어진다고 느끼는 것은 물론 불행이지만 그래도 모든 걸 다 포기하고 피해야만 할 불행은 절대 되지 못한다. 주어진 환경이 멍청하고, 편견으로 가득하고, 또 사악하다면 오히려 그 환경과 멀어지면서 벌어들이는 이득이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은 거의 모든 환경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갈릴레오와 케플러는 소위 ‘위험한 생각들 dangerous thoughts’(일본에서는 이렇게 불린다)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요즘 시대의 쓸만한 두뇌를 지닌 많은 젊은이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여론의 힘이 너무도 커져서 이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꺼내놓지도 못할 만큼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은 결코 사회에 좋은 징조가 아니다. 이럴 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은 여론이 지닌 공격성을 어떻게 하면 가장 무능하고 약하게 만들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찾는데 있다.
현대 사회에 있어 이 문제에 가장 중요한 지점은 바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만약 어린 사람이 한 번에 자신과 맞는 일자리와 환경에 진입한다면 그는 대중의 잣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겠지만 만약 그가 아직 어리고 그의 능력들을 시험해 볼 기회도 못 얻었다면 그 주변에는 자신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영역에 대해 언급하며; 그를 멋대로 판단하고; 이렇게나 어린 사람이 자신들과 자신들이 살아온 세상보다 더 나은, 또는 새로운 정보를 지닐 수 있다는 의견에도 화를 낼 준비가 단단히 되어있는 사람들로 그득할 것이다. 어찌어찌 이만치 흉폭한 시선에서 벗어난 많은 이들은 굉장히 힘든 싸움을 거쳐야만 했을테고 오랜 기간 동안 남들의 시선에 억압 되어있던 바람에 원하는 지점에 끝끝내 도착했다한들, 그 때가 되어선 그들에게 아무 힘도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 세상엔 ‘천재들은 알아서 그들의 길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라거나 ‘젊은이들의 능력을 판단하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 피해를 야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편견이 퍼져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러한 편견이 맞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런 식의 발상은 마치 ‘살인은 그칠 것이다'라는 가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우리가 현시점에서 알고있는 살인 사건들은 당연히 모두 밝혀졌지만, 세상에 얼마나 더 많은 살인이 벌어지고 있을지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이와 같은 원리로 우리는 수많은 천재들이 많은 역경을 이겨낸 감동 스토리들은 많이들 들어봤지만 어린 시절 둘러싸여야만 했던 주변 환경에 못이겨 결국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추가적으로 이것은 천재성에 관해서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필요로 하는 재능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북돋우는 데에만 좀 더 힘을 쓰자는 이야기도 아니며 사회가 계속해서 갉아먹는 그들의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아끼자라는 취지에서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이 모든 이유들로 인해 젊은이들의 삶은 조금 더 편안해져도 된다고, 아니, 조금 더 편안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든 사회 구성원들이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사회가 옳은 반면에 그 반대는 딱히 좋은 사회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양쪽 상황에 있어서 어차피 중요한 건 나이든 사람들의 인생이 아닌, 바로 젊은이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만약 젊은 사람이 배우자를 잃은 부모의 재혼을 막아서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의 삶을 결정지으려는 부모와 다를 바 없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겠다. 나이를 떠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살지 선택할 수 있는 재량권이 생긴 다음부터는 자신의 선택과 실수에 모든 책임과 권리를 동시에 부여받게 된다. 나이든 사람들의 강요대로 중요한 문제를 선택하게 된 젊은이는 큰 실수를 범한 것이다. 예를 들어볼까, 만약 당신이 무대에 올라 연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해보자. 당신의 부모는 그 꿈을 - 비도덕적이라는 이유에서, 또는 사회적으로 열등한 직종이라는 이유에서 - 결코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견디기 힘든 부담감과 짐을 상기시켜 줄 것이며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집에서 내쫓을 것이라고 협박할 수도, 몇 년 내로 분명히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라고 말할 수도, 당신과 같은 꿈을 지녔던 젊은이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안좋은 결과를 맞이해야 했었는지 늘어놓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이 당신을 보고 무대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가 사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당신에게 연기를 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없을 수도 있으며 당신 목소리가 연기하기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정말 그렇다 할지라도, 당신은 곧 연기자들에게 쓴소리를 들으면서 당신의 위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그 다음 다시 새로운 꿈을 설정할 시간도 충분할 것이다. 부모의 생각은 결코 자신의 목표를 포기할 만한 이유가 되어주지 못한다. 만약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끝까지 목표한 바를 이어간다면, 당신의 부모는 - 당신이나 당신의 부모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일찍 - 곧바로 원래 모습대로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만약 전문가에게서 받는 의견으로 인해 꿈이 꺾여버린다면 이건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초심자로서 언제나 진중하게 귀담아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난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에는, 전문인들의 의견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그 크기를 떠나 너무도 많은 무게를 실어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보통 한 개인은 굶주림을 벗어나도록, 그리고 감옥에 갈 일이 없도록, 어느 정도 주변 환경에 눈치를 봐야겠지만 그 이상의 눈치를 보는 일은 자발적으로 필요 이상의 흉폭한 환경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일생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감 앞을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가로막는 꼴이다. 지출 비용의 개념을 예로 들어보자.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진짜 취미와는 거리가 먼 곳에다가 돈을 쓰며, 그 기저에는 기껏해봐야 어떤 차를 소유하는지, 방문객에게 얼마나 괜찮은 저녁을 대접할 수 있을지에 따라서 그들의 이웃이 그들을 존중해주는 정도가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사실 차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비용은 지녔지만 실제로는 도서관에 가거나 여행하기를 선호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모두와 같이 행동했을 때 보다 훨씬 더 많은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론이라고 해서 무조건 억지로 낮잡아 보거나 거부할 필요는 없다, 뒤죽박죽이긴 하겠지만 여론을 따르는 데에도 어느 정도 보상은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정녕 진심으로 여론의 흐름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면, 그러한 성향은 또 그대로 개인에게 힘이 되어주는 동시에 행복을 일으켜줄 수도 있다. 거기에 더해 사회구성원들이 사회 관습에 극도로 충성을 다하는 사회보다 그렇지 않은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훨씬 더 흥미로울 것이다. 각 구성원마다 개인이 지닌 성향을 키워나가며 다른 유형이 보존될 것이며 사람을 볼 때마다 데자뷰를 느낄 필요도 없이 매번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신분이 출신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제각기 사람들이 사회 평균보다 떨어져있는 취미도 원없이 가질 수 있었던 귀족 사회의 - 그나마 있었던 - 이점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린 이러한 사회적 자율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으며 조금은 더 억지로라도 스스로에게 사회와 합쳐지는 현상이 지닌 위험성을 일깨워줄 필요가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이상하게 행동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관례적으로 행동하는 것 보다도 덜 흥미로운 행동방식 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누군가의 취향이 극적으로 반사회적이지 않은 한, 즉흥적으로 생겨난 자신의 취향이나 생각들을 자연스레 따라가는게 옳을 것이라는 말이다.
현대 사회의 점점 발전해가는 교통 기술 덕분에 사람들은 조금씩 태초에 지리학적으로 주어진 이웃들에게 덜 의존할 수 있는 환경이 이루어졌다. 차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서 20마일 반경 이내에 사는 모든 이들을 이웃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이 친하게 지낼 사람들을 고르는데 있어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힘을 지니게 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서 20마일 안에 자신과 맞는 영혼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지독하게 불운한 사람일 것이다. 바로 옆에 사는 이웃들과는 알고 지내야 한다는 사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사라졌지만 작은 마을이나 시골에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사회성을 위해 인접한 이웃들에게 의지해야 할 필요가 없게 된 지금, 그다지 따라주는 이들이 사라지게 되어버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에겐 단순히 근접성에 의해서만 아니라 얼마나 서로 잘 통하는지에 따라 누구와 소통하고 교류할지 결정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지고 있다. 행복은 자신과 비슷한 취향과 의견을 지닌 사람들과 엮임으로써 활성화될 수 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적 교류를 계속해서 이어나가다 보면 결과적으로 관습에 엮이지 않은 채 지내는 많은 이들이 느끼는 외로움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의 행복감은 당연히 늘어날 것이겠지만 뻔하게 사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사회 속에서 품어준다는 착각을 하며 느끼는 사디스틱한 희열의 총량 또한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좋은 것 처럼 “희열"이라고 이름 붙이기는 했지만 이런 종류의 쾌감은 우리 사회에서 보존해나갈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대중을 향한 두려움은, 다른 모든 종류의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억압적인 동시에 한 개인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이러한 형태의 두려움이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는 한, 어떠한 류의 위대함도 이뤄내기가 힘들 것이다. 추가적으로 행복이란 주변 사람들이나 가족에게서 우연히 받게 된 취향이나 목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생각에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의 생각을 가지지 못하게 되어버린 사람은 매일같이 독약을 마시고 있는 바와 다름이 없다.
주변 사람들을 향한 두려움이 결코 과거보다 줄어들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와 동시에 최근들어 새로운 종류의 두려움이 생겼다고 볼 수도 있다. 바로 여러 종류의 신문사에서 야기하고 있는 유형의 두려움인데, 이 유형은 중세시대에 이루어진 마녀사냥처럼 무시무시하다. 신문사에서 실은 별로 악하지 않은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들고자 할 때, 그 결과는 매우 끔찍할 수 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애매모호한 말들을 구사하며 이런 상황들을 피할 수 있는 것 같다만, 매스컴은 계속해서 손에 쥔 사냥 도구의 날을 점점 더 날카롭게 다듬을 것이며 그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정의 구현’이 지닌 위험은 커져만 갈 것이다. 이 문제는 피해자의 입장에 선 개인으로 하여금 함부로 업신여겨질 문제가 아니며, 언론의 자유에 붙어있는 위대한 가치 또한 내 생각에 현재 명예훼손법 보다 훨씬 더 까다롭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라도 무고한 - 설령 그들이 여론에서 안좋게 해석될 만한 언행을 보인 점이 악의적으로 언론에 비춰졌다고 한들 - 개인들의 삶을 힘들게 만들게 한다면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악행에 맞설 수 있는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는 대중의 포용력을 키우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포용력을 기르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진정한 행복을 즐기는 자의 수가 불어나면서 남에게 상처를 줌으로써 희열을 느끼는 자들의 수가 줄어들게끔 하는 것이다.
원문 출처: 자유 이용 저작물인 버트랜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The Conquest of Happiness'의 서문과 목차를 번역했습니다. 원문을 구할 수 있는 링크를 여기에 남기겠습니다.
'번역 > 비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058: 발터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1) (0) | 2021.10.30 |
---|---|
#043: 버트랜드 러셀, "행복을 쟁취하는 방법: 17. 행복한 사람" (마지막) (0) | 2021.08.31 |
#040: 버트랜드 러셀, "행복을 쟁취하는 방법: 15. 비개인적인 관심사" (6) (2) | 2021.08.20 |
#038: 버트랜드 러셀, "행복을 쟁취하는 방법: 12. 애정" (5) (0) | 2021.08.15 |
#036: 버트랜드 러셀, "행복을 쟁취하는 방법: 5. 피로" (4) (0) | 2021.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