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3. 15:52ㆍ번역/비문학
행복을 쟁취하는 방법
글쓴이ㆍ버트랜드 러셀
번역ㆍ오성진
제4 장: 지루함과 흥분감
모든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탑재되어있는 ‘지루함’이란 개념은 실제 문제의 크기 보다 훨씬 덜한 관심을 받고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전세계 역사 속에서 가장 많은 동기부여를 한 요소 중에 지루함이 빠질 수는 없다. 지루함은 인간 고유의 감정으로 보이는데, 이는 종종 어딘가에 갇혀있는 동물이 지쳐있거나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야 볼 수 있겠지만 태초에 주어진 자연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은 지루함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주로 동물들은 적이 언제 올지 경계를 하거나 음식을 찾아야 하며 시간이 남더라도 때로는 성교를 하며 때로는 따뜻한 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며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에 그들이 불행을 느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지루한 상태에 도달하지는 못 한다고 본다. 아마 유인원들이 감정적으로 우리와 그나마 가장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들과 살아본 적이 없는 관계로 그들이 과연 지루함을 느낄지 확인해 볼 기회는 없었다는 점 또한 양해해주기 바란다.
지루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현재 상황과 상상 속에서 떠도는 조금 더 끌리는 상황 사이에 놓인 극명한 차이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지루함의 또다른 조건은 바로 온몸이 무언가에 사로잡힌 상태면 발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가하게 웃음을 지으며 지금 당장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적들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상황을 즐길 수 없다는 건 명백하지만 대신 그만큼 지루할 새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형 직전에 의자에 묶여있는 남자도 - 그에게 초인적인 용기가 없는 한, -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을 것이다. 마치 처음으로 상원 의사당에서의 연설을 앞둔 사람이 하품을 하지는 않을 것처럼 말이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행동을 하고 훗날 의원들에게 존경을 받게 된 데번셔의 어느 공작(*역주: 여기서 ‘어느 공작'은 ‘Lord Hartington’을 지칭한다)은 예외로 두어야 겠다. 결과적으로 지루함이란 새로운 사건을 갈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새로이 벌어지는 일은 딱히 기분 좋은 일이여만 할 필요도 없으며 권태감의 피해자에게 단순히 오늘이 다른 날과 어떻게 다른지 알려줄 수만 있어도 충분할 것이다. 고로 지루함의 반의어는 기쁨이 아니라 바로 ‘흥분감’이다.
흥분감을 쫓는 마음은 인간, 특히나 남성 안에 깊숙이 박혀있다. 아마 사냥을 하던 시대에서는 그 이후의 시대들보다 훨씬 더 손쉽게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쫓는 행위와 전쟁, 그리고 섹스와 같은 행위들은 그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야만인은 남편이 옆에서 자고 있는 여성과도 간통을 벌일 것이다, 남편이 깨어나면 즉각적으로 그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서도 말이다. 내 생각에 말인데, 이런 상황은 절대 지루한 편에 속한다고 보기 힘들 것이다.
물론 이전 시대에서 행동하듯이 지낼 수 있던 귀족들은 예외였겠지만, 농경기 사회 이래로 사람들의 생활은 전반적으로 많이 지루해졌을 것이다. 현대사회의 기계식으로 이루어지는 업무 방식이 얼마나 단조롭고 지루한지 많은 이들이 논하고 있지만 농경기 당시의 일하는 방식이 그에 비하면 더하면 더했지, 지루함에 있어 결코 뒤처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나는 오히려 많은 독지가(篤志家)들이 목에 힘을 주고 말하는 바와는 반대로 기계 시대야 말로 전세계에 존재하는 지루함의 총량을 줄여주는데 크게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기계의 발전으로 인해 임금 노동자들이 혼자 일하는 경우가 없어졌으며 밤이 되면 모두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유희거리들을 즐길 수 있었다. 중하위층의 삶은 어떻게 변했는지 한 번 떠올려보자. 과거엔 식사를 마치고 어머니와 딸들이 식탁을 정리하고 나면 모두가 빙 둘러앉아 ‘행복한 가족 시간(Happy Family Time)’이란 것을 보내도록 되어있었다. 따뜻한 이름을 지닌 이 시간이 찾아오면 아버지들은 모두 잠을 청하러 사라졌으며 아내는 뜨개질을 했고 딸들은 가만히 앉아 자신들이 죽기를 바라거나 어느 먼나라로 떠나있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곤 했다. 당시 그 시간은 아버지가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으로 쓰이는, 모두에게 퍽이나 신이 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앉아있는 딸들이 책을 읽거나 방을 떠난다는건 당시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이었다. 이런 전통적 집안의 자제들이 운이 좋아 결혼까지 하게 되었을 때, 그들에겐 언제나 자신의 자식들이 자신들이 살아온 바와 같이 어두운 삶을 살지 않아도 될 수 있게끔 도와줄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그마저도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녀로 자라거나 주름이 자글자글한 상류층 여성으로 자랄 것이고 이런 운명이야말로 미개한 당시 사회와 사람들이 무고한 피해자들에게 가한 가장 심각한 피해였다.
이만한 양의 지루함은 이미 몇백년 전부터 우리의 뇌속에 뿌리박혔을 것이며 어느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양보다 더한 지루함을 겪게 되는 경우엔 그/그녀의 상황은 더더욱이 안 좋아질 것이란 사실은 명백하다. 한겨울의 중세시대, 어느 마을에서 모두가 느껴야만 했을 따분함의 양을 상상해볼 수 있는가? 읽지도, 쓰지도 못했던 당시 사람들이 오로지 쥐고 있었던 건 어두운 집안을 밝혀줄만한 촛대뿐이었고 방 안의 한기와 유일하게 맞서싸우던 건 그 촛대에서 나오는 불빛뿐이었다. 게다가 도로는 다닐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마을에 있는 사람과 만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보면 마녀사냥은 필연적으로 지옥같은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자 유일하게 겨울에 할만한 일로 여겨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선대사람들 보다는 덜 지루한 환경 속에서 지내고 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들보다도 지루함을 훨씬 더 경계하며 두려워한다. 아마 여기에는 우리끼리 암묵적으로 지루함이란 인간의 자연적인 속성 중의 하나가 아니며 열심히 자극을 쫓다보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문제임을 알게 - 혹은 믿게 - 된 배경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고 있는데, 이는 생산적 활동을 통해 밤마다 자극을 쫓을 수 있게 되며 그들의 할머니들이 버텨내야만 했을 ‘행복한 가족 시간'에서 도망칠 수 있게 된 것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생산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도시에서 살고 생산적 활동을 하지 못 하더라도 대부분 차 또는 오토바이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라도 보러 갈 수 있을 것이며 거의 모든 가정에 라디오도 갖추고 있을 것이다. 젊은 남녀는 이전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만날 수 있을 것이며 모든 가정부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속 여주인공이 소설 내내 겨우 한 번 정도 느꼈을 감정을 매주 느낄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올라갈 수록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자극의 수위는 더 높아져만 갈 것이다. 필요한 비용만 지불할 수 있다면 누구나 충분히 기쁨을 즐기며 이곳저곳에서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매번 충분한 자극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쩐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같은 자극이더라도 계속해서 새로운 장소에서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임금노동자들의 경우에는 그들에게 부여된 양만큼의 지루함과 생필품을 번갈아가며 채워나가겠지만 일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자본을 갖춘 사람들은 ‘지루한 일이 없는 삶’이라는 이상을 살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이들이 쫓는 이상이 충분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며 부정하고 싶지 않지만 모든 종류의 이상이 늘 그렇듯이 ‘지루한 일이 없는 삶'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손 안에 넣기 어려울 것이다. 다음날 아침은 즐거웠던 전날 밤에 비해서 필연적으로 지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갓스무살이 된 청년이라면 자신의 인생이 서른에 끝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올해로 쉰여덟이 된 나는 더이상 그와 같은 관점을 취할 수 없다.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자극의 총량이 마치 돈처럼 한정되어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펑펑 써댄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루함 안에는 인생에서 꼭 필요한 요소가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지루함에서 도망쳐나오고 싶다고 소망하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실제로 역사를 돌이켜보면 모든 인종의 사람들이 그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새로운 기회를 맞이한 것처럼 행동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야만인들이 처음 백인들이 건네준 술을 맛보았을 때 그들은 과거부터 느껴왔던 상당한 지루함에서 마침내 풀려날 수 있었고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한 그들은 눈뜨고 보기 힘들만한 모습으로 사망에 이를 때 까지 입 안에 술을 퍼부어댔다. 전쟁, 학살, 그리고 사형은 모두 지루함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태어났으며 심지어 이웃과 하는 말싸움조차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배경에서 탄생했다고 보인다. 고로 인류가 지은 죄목들 중 절반 이상은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벌어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도덕을 중시하는 사람에게 있어 지루함이란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지루함이 순전히 나쁘다고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루함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자양분이 되어주는 첫 번째 유형은 마약이 떨어졌을 때 느낄 수 있는 쪽이고 사람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두 번째 유형은 생활에 중요한 활동들이 결핍되어있을 때 발생한다. 나로서는 - 어떤 이유든간에 - 아직 마약이 인생에서 안 좋은 역할을 한다고 말할 준비는 안 되어있다. 예를 들면 현명한 의사가 아편을 처방해줄 수도 있는 법인데 단지 이런 순간들이 마약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횟수보다 훨씬 더 빈번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러나저러나 마약을 향한 갈망에 규제가 반드시 따라야한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며 마약에 중독된 사람의 주변에 마약이 없을 때 그가 느끼는 지루함에 시간 말고는 그 어떠한 해결책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자, 추가적으로 위에 마약에 대해 이야기는 - 특정 범주 내에선 - 어떤 종류의 자극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과도한 흥분감으로 휩싸인 인생은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소 중 하나인 스릴을 위해 매번 전보다 더한 자극을 갈구할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피곤한 생은 없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너무 많은 자극을 쫓는 사람은 매운 음식을 비정상적으로 쫓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데, 이는 매운 음식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은 먹은 뒤에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로 매운 음식을 먹어도 아무 맛을 느끼지 못하는 단계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과도한 양의 자극을 피하는 행위와 지루한 상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과계에 놓여있으며 과도한 자극은 단순히 건강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즐거움이라도 제대로 느낄 수 없도록 촉수를 갉아먹기까지 하며 자연적인 상태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심오한 만족감, 지혜를 위한 영리함, 그리고 아름다운 대상을 바라보며 온몸이 짜릿해지는 감정 모두 단순한 자극으로 대체시켜 버린다. 물론 나도 최대한 극적인 예시만을 골라다가 자극에 반대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어느 정도의 자극은 물론 그 자체로도 우리 인생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양적으로 과도해지거나 또 너무 부족해지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자극의 양이 너무 적을 때 인간은 도저히 참아낼 수 없을 정도의 지루함을 느낄 것이며 반대로 자극이 너무 많을 땐 금세 피로를 느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지루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행복한 삶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며 젊은 사람들이 무조건 배워야하는 과제 중에 하나이다.
아무리 대단한 책이라도 반드시 지루한 부분이 존재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삶들에도 분명 지루하기만 했던 구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현대의 미국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편집자가 투고 받은 구약 성서를 처음으로 읽었다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성경에서 족보를 언급하는 부분에 관해 그가 어떤 말을 할지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도 유추해낼 수 있다.
‘선생님,’ 그의 말은 대충 이런 식으로 시작할 것이다, ‘이 장에는 활력이 많이 부족해 보이는군요. 독자들이 선생님께서 별로 이야기하시지도 않는 인물들의 이름까지 관심을 가져줄 것이라고 기대하시는 건 좋지 않은 듯 합니다. 저도 글을 읽기 시작하며 이야기에 잠시나마 빠져들었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꽤 괜찮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합니다만 글 전반적으로 너무 많은 정보를 담아내려고 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주요한 부분들을 살리시고 필요 없는 부분들은 잘라내신 뒤에 전체적으로 글의 양이 적당하게 줄어들면, 그 때 한 번 다시 파일을 보내주십시오.’
위의 예시는 현대의 편집자들을 비꼬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들이 현대의 독자들이 지루함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위의 편집자는 공자의 고전서들이나 코란, 맑스의 자본론, 그리고 과거에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날린 다른 모든 신성한 책들을 읽어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럼 이 이야기가 모든 종교적인 서적에만 해당되냐고 하면 그 또한 아니다. 최고라고 알려진 모든 소설들 또한 지루한 구간을 지니고 있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휘황찬란하며 자극적인 소재로 가득한 소설은 결코 좋은 소설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위인들 또한 그들의 삶에서 중요한 몇몇 순간들을 제외하고 지루한 순간들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때때로 성대한 만찬을 즐길 수도 있었으며 온몸에 독이 퍼져가는 동안 대화를 나누며 상당한 만족감을 누렸을 수 있었겠지만 그는 거의 삶의 대부분을 크산티페(Xanthippe, 소크라테스의 아내)와 조용히 보내며 오후에는 헌법을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정말 가끔씩 친구들을 만났다고 알려져있다. 칸트는 그의 일생동안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칸트의 주거지)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걸로 알려져있다. 다윈은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남은 여생을 그의 집안에서만 보냈으며 맑스는 몇 번의 혁명을 일으킨 뒤에 여생을 대영 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서 보내기로 결심했다. 이를 통해 위인들이 공통적으로 조용한 삶을 보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외부인들에게는 그닥 자극적이지 않아보이는 부분을 통해 그들 모두 나름의 자극과 기쁨을 누리고 있던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성과라고 한들 그들의 지속적인 노력이 바탕에 깔려있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은 너무도 어려운 과제를 떠안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다보니 조금이라도 힘이 들만한 자극을 느낄만한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기껏해야 그들이 즐길 수 있는 일이라고는 휴일날 마음먹고 체력을 보충한다던가 알프스 산맥을 걸으며 산책하는 정도였던 것이다.
지루한 삶을 견뎌낼 수 있는 역량은 어렸을 때 갖춰지고 키워져야 할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 현대 부모들은 날카로운 비판을 받아도 싸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들이나 텔레비전과 같이 수동적인 자세로 즐길 수 있는 자극제들을 너무도 많이 제공해주고 있으며 아이들이 왜 어제와 같은 오늘을 - 물론 특별한 일이 있는 날들은 빼고 - 보내야만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해야만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즐거움의 상당수는 아이가 직접 노력과 창의력을 통해 주변 환경에서 뽑아낸 경험이어야 하는게 바람직하기 때문에 극장에 가는 일처럼 신체적인 힘을 요하지 않는 동시에 자극적일 만한 활동은 최대한 절제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는 자극이란 결국 마약과 비슷해서 즐기는 양이 많아질수록 사후에 같은 수준의 자극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양은 점점 늘어만 갈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나무처럼 같은 땅에서 방해받지 않은 상태로 있을 때 가장 잘 자랄 수 있다. 너무 많은 양의 여행이나 과도한 감정은 어린이에게 좋지 않을 수밖에 없으며 만약 어린 나이서부터 많은 자극을 느끼게 된다면 아이들은 커서도 혼자 가만히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없이 자라게 될 것이다.
나는 지루한 삶 자체에 커다란 이점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바는 아니며 단지 몇몇 좋은 일들은 어느 정도의 지루함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 뿐이다. 워즈워스(W. Wordsworth)의 ‘서곡(Prelude)’을 떠올려보자. 그의 책에 실린 내용에 담긴 감정과 생각들이 현대 기술을 누리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전달되기가 사뭇 어려울 것이라는 것 쯤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만약 진정으로 원하는 목표와 체계적인 계획이 있는 소년, 또는 청년이라면 상당한 양의 지루함을 견뎌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주변에 쉽게 관심을 뺏길만한 물건이 가득 놓여있을 방탕한 젊은이의 머릿속에 체계적인 계획이나 목적이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기는 굉장히 힘든 일이다. 이런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시간이 지나야만 이룰 수 있는 성과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유희거리에 쉽게 관심을 쏟아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만약 언젠가 미래에 한 세대가 통으로 지루함을 견뎌낼 수 없는 날이 온다면 바로 그 때 그들을 두고 어린이들, 즉 자연의 느린 과정에 지나친 거부감을 느끼며 마치 줄기가 잘린 채로 꽃병에 놓인 꽃송이처럼 서서히 중요한 자극을 느낄 수 있는 힘을 잃어가는 어린이들로 이루어진 세대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복잡한 말을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씩 과학적으로 말할 때 보다는 시적인 표현을 썼을 때 글이 더 잘 써지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에 비유를 한 번 들어보겠다. 우리가 스스로를 뭐라고 생각하든간에 우리가 지구 위의 생명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지구의 삶의 일부이며 우리는 동식물과 마찬가지로 지구로부터 살아갈 양분을 섭취한다. 지구에서의 삶의 리듬이란 본래 느리다. 그 리듬에 가을과 겨울은, 봄과 여름이 그러하듯이, 상당히 중요한 시기이며 매순간순간 허투루 지나가는 시간이란 없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 성인보다도 더 - 지구상에서의 삶이라면 겪어야만 할 썰물과 밀물의 원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신체는 이 느린 리듬에 맞추어 몇 세기를 진화해왔으며 종교 또한 부활절이란 이름으로 이와 비슷한 원리를 축복해오고 있다.
언젠가 한 번 두 살 짜리 남자아이를 본 적이 있다. 그 날은 런던의 집 안에서만 자라던 아이가 처음으로 집밖으로 나가 푸른 땅을 밟아보는 날이었다. 계절은 겨울이었으며 모든 것엔 습기와 진흙이 묻어있었다. 어른의 눈에는 즐거워 보이는게 마땅히 없었지만 아이는 그 곳에서 마치 황홀경에 빠진 것 처럼 보였다. 아이는 젖은 땅에 무릎을 꿇고 잡초 속으로 얼굴을 파묻기도 했으며 기쁜 마음이 묻어나는 소리를 계속해서 내뱉었다. 아이가 느끼던 즐거운 감정은 매우 원초적이고 단순했으며 그 크기는 상당히 거대했다. 우리 안에 충족감을 필요로 하는 구멍의 깊이를 너무도 심오해서 이 마음을 채우지 않은 채로 오래 지낸 사람 중에 완전히 이성적인 사람을 찾기란 무척 힘들 것이다.
많은 종류의 유희거리는 - 아마 도박이 좋은 예시가 되어줄텐데 - 지구와 이러한 류의 연결성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동떨어져있는 유희거리는 끝이 나는 순간 행위를 한 사람으로 하여금 공허하고 불만족스러우며 뭔지도 모르겠는 무언가를 향해 갈증을 느끼게 만들 것이다. 그러한 류의 유희는 ‘즐거움'이라고 불리울만한 감정의 그 언저리의 것도 불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지구와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느끼게끔 해줄만한 류의 행위들은 그와 반대로 깊은 만족감을 자아내기 마련인데 이러한 행위는 도중의 느낄 수 있는 자극의 강도가 전자의 예시의 것보다는 적을지 몰라도 위에서 언급한 유희거리와는 다르게 끝난 뒤에도 도중에 생긴 행복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위에서와 같이 내 머릿속에 자리잡은 자극 구분법은 오늘날 가장 단순한 단계의 사회부터 가장 문명화된 사회까지 관통하고 있다. 좀전에 이야기한 두 살 짜리 아이는 지구와 하나가 되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를 보여주었지만 조금 더 입체적으로 다가가면 시(poetry) 또한 곧 같은 종류의 행위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적은 글이 최고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그의 글에 앞서 언급한 두 살짜리 어린이가 풀에 안기면서 느꼈을 즐거움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Hark, hark, the lark’, 또는 ‘Come unto these yellow sands’와 같은 셰익스피어의 시를 떠올려보아라. 이 시에서는 자연에 놓인 어린 아이가 차마 말로 못하고 소리로 밖에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마저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사랑과 원나잇 스탠드, 둘간의 차이점을 생각해보아라. 사랑은 우리의 존재를 뒤엎어놓으며 마치 가뭄 뒤에 비가 내린 것 처럼 모든 것이 새로이 태어나는 감정을 쥐어주는 반면에 사랑이 빠진 섹스는 이러한 성격을 하나도 띄고있지 않다. 순간적인 유희가 그치고 남는 것은 피로, 역겨움, 그리고 인생이 허무하다는 감정 뿐이다. 사랑은 지구에서의 삶에 속하는 중요한 일부분이지만 사랑이 없는 섹스는 그 비스무리한 영역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렇듯 현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특이한 유형의 지루함은 본질적으로 지구에서의 삶과 떨어져있는 삶을 사는데에서부터 비롯된다. 이와 같은 종류의 지루함은 사막을 걷는 순례자의 삶과 같아서 인생을 힘들고 공허하다고 느끼게 만듦과 동시에 도저히 얻지 못할 것을 갈망하게 만든다. 자신의 인생 경로를 원하는대로 설정할 수 있을 정도의 자본이 있는 자들이 겪어야만 하는 특수한 종류의 지루함마저 -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 결국 본질적으로 지루함을 향한 그들의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자양분이 되어줄만한 지루함'으로부터 멀어진 뒤로 그들은 스스로 더 악질의 지루함의 먹잇감이 되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고로 진정한 즐거움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은 오로지 고요한 환경 속이며 그렇기에 크게 봤을 때, 행복한 삶이란 상당 부분 고요함이 깃든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원문 출처: 자유 이용 저작물인 버트랜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The Conquest of Happiness'의 서문과 목차를 번역했습니다. 원문을 구할 수 있는 링크를 여기에 남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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