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24. 15:33ㆍ번역/비문학
이상한 나라의 “목판”:
일본의 어느 그림동화 시리즈 이야기
글쓴이 ㆍ크리스토퍼 데코 (Christopher DeCou)
번역ㆍ오성진
선물을 물어다주는 참새부터 복숭아에서 태어난 영웅, 거미 마귀, 그리고 춤추는 유령 고양이까지 -- 이 모든 신비로운 대상들을 아름다운 그림속에 담아둔 책 시리즈가 있었다. 타케지로 하세가와(長谷川武次郎, Takejiro Hasegawa)가 출판한 이 동화 시리즈는 대부분 당시 잘 안 쓰이던 천같은 크레이프 페이퍼(*역주: crepe paper, 바탕이 오글쪼글한 얇은 종이로써 주로 조화ㆍ냅킨 등을 만드는데 쓴다고 한다) 위에다 일본의 전래 동화들을 옮겨다 서부 독자층에게 소개했다.
발간일ㆍ2019년 9월 3일
존 테니엘(John Tenniel, *역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일러스트레이터)이 그렸던 그림 속, 샛파란 앞치마를 입은 앨리스가 괴상한 미소를 짓고 있는 고양이를 올려다보는 장면이라던가 월터 크래인(Walter Crane)이 그린 그림 안에서 분홍색 옷을 입은 벨(Belle)이 멧돼지 머리를 한 괴물과 사랑에 빠지고 있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동화의 황금 시대"라고 불렸던 지난 백 년간의 그림동화책들은 독자들에게 잊기 힘든 이미지들을 쥐어주었다. 위에 적힌 장면들을 떠올리며 많은 이들이 그 안에 담긴 “특수한 세계"는 단순히 런던과 뉴욕의 출판사뿐만이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는 특별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지구 정반대에 위치한 일본은 세계를 향해 개항을 하고 있었고 도쿄에 위치한 고분샤 출판사를 거쳐 어린이를 위한 그림동화 시장에 또다른 유일무이한 세계를 선사한다. 타케지로 하세가와의 지휘 아래, 번역가들은 서부의 작가들과 일본의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조합시켰고 이 동화 시리즈는 수많은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1885년에서 1922년 사이에 출간된 이 20권으로 구성된 동화 시리즈는 일본에서 구전되던 많은 전래동화들을 영어, 불어, 독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 그리고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독자들의 손안으로 들어갔다. 동화의 내용은 실로 다양했다.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 ‘복숭아 동자 모모타로'(Little Peachling, 1928년)에서는 몇백 년 동안 구전되어오던 '모모타로'라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느 날 한 노부부가 강가에서 거대한 복숭아를 발견한다. 노부부는 그 복숭아를 집에 데려다가 열어보니 그 안에 있던 작은 사내아이를 보고 깜짝 놀란다. 아이의 이름은 -- 당연하게도 -- 모모타로. 모모타로는 노부부의 손에 자라며 훗날 그들을 떠나 다양한 종류의 모험을 한 뒤에 영웅으로서 마을로 금의환향한다.
시리즈 속 다른 책들은 불교 전통의 요소를 담고있는 이야기들도 존재했다. ‘어리석은 해파리’(The Silly Jelly-Fish, 1887년)라는 이야기에서는 해파리가 원숭이의 함정에 빠지며 용왕의 벌을 받고, 아끼던 조개를 잃는 과정이 적혀있는데 여기서 원숭이는 깨달음의 길을 걷고있는 보리살타(Bodhisattava)로 해석된다.
라카디오 헌(Lafcadio Hearn)이 편찬한 시리즈의 일부였던 ‘고양이를 뿌린 소년’(The Boy Who Drew Cats, 1898년)은 공상을 즐겨하는 한 소년이 수도원의 벽에다가 그려놓은 고양이들이 어느 날 수도원에 있던 괴물 쥐를 몽땅 쫓아낸 이야기를 담고있다. 초판본에서 소년은 독실한 신도의 길을 걷지만 라카디오의 판본에서는 유명한 화가가 되는 걸로 묘사된다.
타케지로 하세가와는 맨 처음 동화 시리즈를 기획할 때 메이지 시대 일본의 점점 커지는 교육산업을 대상 고객층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타케지로는 다양한 물품을 수입하며 그 중 서부에서 건너온 교과서들도 많았던 상인의 집안에서 자랐는데 어린 나이 때부터 영어를 사용하는 학교에 다니기도 햇다. 그렇기 때문에 타케지로는 일본 내에 많은 외국인들과 접할 수 되었고 그 중 하나가 캐로더(Carrother) 부부였다. 장로교에서 온 전도사였던 부부는 집에서 과외를 하고 있었고 그를 통해 타케지로는 국내에서의 영문으로된 교과서들을 필요로 하는 수요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 후로 타케지로는 실력있는 작가들과 번역가들 뿐만 아닌 일본의 장인들의 힘까지 실린 새로운 교본을 만들어내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타케지로는 계획을 수행시킬 모델로 일본의 전통적인 작품집들이 지닌 심미적 요소들을 떠올렸다. 산문들과 전래동화들을 아름답게 엮어낸 오토기 조시(お伽草紙, Otogi-zoshi) 시리즈, 그리고 환상속으로의 모험, 신화, 괴물 이야기들을 담아낸 킨무 즈이(訓蒙圖彚, Kinmou Zui) 시리즈와 아카혼(赤本,Akahon) 시리즈까지 16세기부터 일본에선 어른과 아이들을 위한 그림동화의 발전을 이뤄졌다. 문맹률이 아직까지는 높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 책들의 내용이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일본의 유명한 그림체로 그린 그림들이 엮여있어야 했고 주로 더 나은 이해를 위해 놀랄만한 장면과 함께 끝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의 전통적인 작품들의 이러한 성격들을 띄기 위해서 타케지로는 전통 목판 인쇄 장인들을 섭외하고 밋수마타(Mitsumata)종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일본내 상업 출판의 가장 초기 방법이었던 목판인쇄술은 10세기에서 13세기 사이 중국 송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왔으며 그 후로 19세기 후반까지 일본에서 지배적이었다. 각각의 철자가 따로 있는 이동식 인쇄술은 같은 글자를 다른 페이지에서도 쓸 수 있게 해준 반면, 목판인쇄술은 기술자가 목판위에 한 페이지 전체를 깎아내야만 한다. 당대 일본에서 가장 많이 쓰이던 밋수마타지는 삼지닥나무(Edgeworthia Plant)를 이용해서 만들었는데 그 높은 질을 인정받아 에도 시대의 일본으로 수입되기 시작했다. 삼지닥나무는 나무다운 질감을 지닌 줄기의 질이 좋았으며 재배된 다음에는 부수물들을 제거하고 통 안에서 눌러진 뒤에 큰 종이로 만들어졌다. 그렇게 완성된 종이는 크림 색을 진고 단단하며 적당한 무게가 있는 형태였다.
그렇게 종이가 만들어졌다면 동화 속 글 자체는 어땠을까. 타케지로는 동화 시리즈의 첫 독자가 될 사람들을 위해 선교사 친구 세 명, 데이빗 톰슨(David Thomson), 바질 챔버레인(Basil H. Chamberlain), 그리고 케이트 제임스(Kate James)를 모아서 번역일을 부탁했다. 목사였던 톰슨은 일본에 1860년대에 건너왔고, 일본어에 능통했으며 캐로더 부부의 학교에서 같이 일했다. 그는 일본내에서 성경을 번역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빅토리아의 정신을 본받아 교훈이 두드러지는 이야기들을 주로 번역했다. 영국에서 온 바질 챔버레인은 귀족 집안 출신의 외교관이었는데 그는 일본학자로서 일본에서의 여행, 민족지학, 그리고 다른 이야기들을 적는 일로 명성을 벌어들인 인물이었다. 세 명의 번역가들 중 가장 학식이 높았던 그는 동경제국대학(Imperial Tokyo University)에서 교수직을 맡기도 하며 특히 일본의 전래동화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바질은 타케지로의 첫 번째 동화 시리즈에 제일 많이 관여했으며 실제로 초판본 시리즈의 명성에 많이 일조했다. 그는 홋카이도 지방 토착민들이 꾸려낸 아이누(Ainu) 문화를 향한 관심을 살려 아이누 동화가 담긴 특별판을 출판하는건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케이트 제임스는 제일 많은 양의 책들을 번역했고 톰슨 목사처럼 도덕적 교훈을 지닌 이야기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 그녀는 셋 중 가장 베일에 쌓인 인물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현재로써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알려진 바는 그녀가 스코틀랜드의 성직자 집안 출신이며 그녀의 남편 토마스 제임스(Thomas H. James)를 콘스타티노플에서 만나 함께 일본으로 이주한 것, 그리고 일본 제국 해군 사관 학교(Imperial Japanese Naval Academy)에서 만난 바질과 친구관계를 맺었단 사실 뿐이다. 이를 통해 일본의 동화 시리즈의 초판본들은 실로 도쿄 속 끈끈히 연결된 해외출신 인물들의 힘을 빌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시리즈가 거둬낸 1885년의 성공에 이어 타케지로는 동화 시리즈를 단순히 일본내의 선생님들과 학생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외국인들도 타겟 대상으로 상정하고 팔기 시작하면 더 많은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을거란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그는 이야기에 들어갈 그림들을 그릴 화가들 -- 코바야시 에이타쿠(小林 永濯, Kobayashi Eitaku), 스즈키 케이즌(鈴木華邨, Suzuki Kason), 치카노부(楊洲周延, Chikanobu) --을 기용했는데 그들은 이미 일본 내에서 우키요에(浮世絵, Ukiyo-e) 스타일의 목판인쇄술로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일본의 예술품들을 수집하며 즐기고 그 기술들에 관심을 가지는 자포니즘(japonisme)이 부상하면서 타케지로의 동화 시리즈는 예술에 열광하는 서양인들의 수요를 꾸준히 키워나갔다.
1895년부터 타케지로는, 아마 이건 자포니즘을 염두에 둔 행보였을텐데, 더 화려한 일본 종이들을 사용해서 '특별판'들을 찍기 시작했다. 크레이프 종이의 특징은 면의 재질을 지녔다는 점인데 이는 종이 섬유를 반복해서 누르면서 천천히 회전시키는 기술을 통해 생긴 것이었다. 이 기술의 결과로 종이는 부드러운 촉감을 지녔지만 거친 주름이 있고 가죽의 질감을 지니기도 했으며 결과적으로 책에 찍힌 그림들로 하여금 예쁜 골동품처럼 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실제로 타케지로가 택한 새로운 마케팅 전략은 동화책들이 일본의 예술품, 또는 기념품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것이기도 했으며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요코하마 항구 주변은 목판인쇄물과 그를 담은 서적들을 찾으러 오는 수집가들의 메카가 되었다. 그림책의 인기에 제일 많은 역량이 행사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도쿄뿐만 아니라 시카고, 런던, 파리, 세인트 루이스, 그리고 튜린에서 열린 전시 박람회 속 타케지로가 발 벗고 뛰어다닌 홍보의 산물이었다. 수많은 전시 박람회에서 타케지로가 받은 연락처들과 동화전집이 받은 상들은 그의 동화 시리즈가 몇 세기 동안이나 꾸준한 인기를 지닐 수 있게 해주었다.
우키요에 스타일의 그림들이 가미되며 크레이프 종이로 만들어진 신판본은 타케지로의 동화 시리즈로 하여금 1890년대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더 많은 서부의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었다. 많은 독자들과 도서 평론가들 두 부류 모두 그간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들을 재밌어했으며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 마저도 잘 어우러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 주간 칼럼의 한 평론가는 케이트 제임스의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간결한 동시에 어른들이 즐길 수 있도록 클리셰는 많이 거둬낸” 언어를 두고 호평했다. 동화 시리즈는 유명한 잡지 두 권, 미국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세인트 니콜라스(St. Nicholas)와 레이디스 홈 저널(the Ladies Home Journal)에 실리기도 할 정도로 인기의 상승세를 달렸다.
더 넓은 시장에 관심을 두기로 한 타케지로의 선택 뒤에 큰 이유중 하나로는 당시 일본과 연관되어 많이 알려졌던 인물중 한 명, ‘라카디오 헌’의 이야기를 책에 싣기 위해서였다. 그리스계 영국인 작가였던 라카디오는 뉴올리언스와 프랑스령이었던 서인도 제도에 관한 여행 이야기를 쓰면서 일본에서의 유명세를 얻었다. 그는 결국 일본으로 이주하고 일본인과 결혼한 뒤에 일본 시민권까지 취득했다. 많은 관계를 쌓아둔 덕에 그는 일본 문화와 문학의 전문가가 되었으며 서부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출판해냈다. 그리고 그가 동화 시리즈 프로젝트에 기여한 몇 가지 이야기들은 확실히 프로젝트의 명성을 상승시켰다.
동화 시리즈가 많은 호평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혹평을 받은 적이 없지는 않았다. 또다른 일본 주간 칼럼의 평론가는 “읽기에는 문제가 없지만 새겨진 그림들은 너무 몽환적이다”라는 비평을 했다. 그는 동화 시리즈에서 “본디 전통적으로 초록색을 띄던 고양이의 눈을” 누런 색으로 처리됐다며 인쇄술자가 게으르다고 평했다. 다른 비평가들도 그림체가 동화 시리즈의 명성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데일리 불레틴(San Francisco Daily Bulletin)에서 특히나 많은 편견을 지녔던 한 평론가는 타케지로의 동화 시리즈가 너무 “일본적”이고 “정교하지 못하며 야만적이다”라고 말했으며 “이런 조잡한 책을 읽는데 크레이프 종이의 활용은 너무도 실용적이지 못한 선택”이라고 표했다.
크레이프 종이를 향한 의문은 비평가 뿐만 아니라 실제로 별로 편견이 없던 인물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프로젝트의 참여자였던 라카디오 헌, 그마저도 타케지로에게 쓴 편지에서 크레이프 종이가 지닌 거친 질감과 그 결과로 잃게 되는 시각적인 디테일을 안타까워하며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실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Christopher Decou)마저도 일반적인 종이에 찍었던 동화 시리즈의 과거판본을 더 좋아한다. 그림이 더 나은 형태로 나올 뿐만 아니라 큰 종이에 찍힌 그림이 어린이들의 눈에 더 쉽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가까운 미래에 일반 종이에 찍힌 세트를 구매하고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아름다운 그림들의 세세한 장점들이 크레이프 종이 위에선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늙은 승려의 얼굴에 그려진 표현력 짙은 선들이나 ‘소작농 오야’(The peasant oya)에 도입부분에 그려진 캐릭터 구조들의 선들을 생각하면 더더욱이 그렇게 생각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의 장난인지, 20세기까지 계속해서 팔렸던 판본은 바로 크레이프 종이로 이루어진 책들이었는데 판매부수가 그려낸 상승곡선은 타케지로가 일본내의 다른 동화집과 경쟁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이어졌다. 미국과 일본의 교육 종사자들 마저도 교육자료로써 일본의 이야기들을 교과서에 실어넣기 시작했다 -- 물론 말끔한 종이 위의 그림들은 목판인쇄술이 지닌 특이점은 많이 줄어든 모습이었다. 동화 시리즈의 마지막 -- 물론 2차세계대전 이후로 출판사는 더 많은 판본들을 출간하기도 했다 -- 판본은 라카디오가 창작한 동화, 젊어지는 샘물(The Fountain of Youth, 1922년)이었다.
이제와서 돌아보면 “그림동화책의 황금기”라고 불리던 당시 타케지로의 동화 시리즈는 단순한 이야기와 파격적인 그림들을 잘 엮어내며 다른 어떤 동화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런던과 뉴욕의 출판사들이 동화 시장을 장악하던 당시 도쿄에서 탄생한 타케지로의 출판물들은 일본 고유의 기술을 이용해 일본 문화를 전세계에 알려주며 비슷한 수의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오늘날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만화가 전세계 대중을 상대로 그 인기를 키워나가고 있다지만 예술과 공예의 세계에서는 “세계 어린이들을 상대로 수출되기 위해 번역된 일본 작품 중에선 메이지 시대의 기록은 아직도 꺾이지 않고 우뚝 서있다”고 역사학자 앤 허링(Ann Herring)이 말한다.
크리스토퍼 데코는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위해 연구중이며 역사와 과학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있다.
원문 출처: publicdomainreview.org/essay/woodblocks-in-wonderland-the-japanese-fairy-tale-se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