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The Public Domain Review, "미치광이 의사들: 19세기 미국 속 사디즘과 고통에 관하여"

2021. 4. 19. 17:40번역/비문학

미치광이 의사들 :

19세기 미국 속 사디즘과 고통에 관하여 

글ㆍ첼시 데이비스
번역ㆍ오성진

 

19세기 미국의 문학은 괴상한 캐릭터, 미치광이 의사를 자주 등장시켰습니다. 그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육체적 고통을 향한 무자비한 사랑을 느꼈고 엄청난 설득력을 통해 많은 독자들의 몸에 닭살이 돋게끔 만들었습니다. 루이자 메이 올컷(Louisa May Alcott),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그리고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이 남긴 소설들을 통해 이 에세이의 저자, 첼시 데이비스(Chelsea Davis)는 미치광이 의사 캐릭터에 관해 고찰해봅니다.

 

글 게시일 ㆍ2020년 7월 1일

 

 

"사디스트적으로 이빨을 뽑는" 의사를 그린 이 캐리커쳐에서는 환자가 뜨거운 석탄조각에서 멀어지기 위해 고개를 젖히며 이빨이 뽑히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존 콜리에(John Colier),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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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리파드(George Lippard)의 소설 레이드 애나벨(Ladye Annabel)에선 여태껏 읽었던 것 중 가장 불쾌한 단락이 있다. 이 짧은 부분에서 처형인은 직접 자신이 범죄자를 나무 바퀴에 묶어놓고 몸 안에 모든 기관이 부서지도록 내려쳤던 경험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설명 속에서 그는 마치 신성한 의사가 환자의 상처부위를 탐구하면서 말하는 듯한 무색한 기쁨이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또 다른 부분에선 장황하게 어떤 방식으로 처형당하는 사람의 사지를 야생마에 묶어다가 거열형을 진행했는지도 적혀있으며 ...(중략)... 이런 식의 서술들은 실제로 아류의 몽크 루이스(*역주: 고딕 소설로 유명한 작가)들이 앞다퉈서 입을 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략)... 조지 리파드는 마치 그의 모든 독자들이 잔혹성에 흥미를 느낀다거나 도착된 취향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틀리 매너즈(Motley Manners)가 1848년에 작성한 ‘레이드 애나벨’의 비평에서 발췌한 부분 중

 

혹시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다면 저에게 항의 메일을 보내주셔도 됩니다: 의사 한 명, 처형인 한 명, 그리고 도착되게끔 잔인한 소설에 열광하는 팬 한 명이 어느 바 안으로 들어갑니다,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고문을 선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말이죠. 이런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으시다구요? 아마 그건 위에 수록된 발췌문이 발표된 1848년 즈음부터 의학을 바라보는 시선이 급격하게 변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얘기가 돈다면 마치 현재 병을 고쳐주고 환자를 돌본다고 여겨지며 환자를 해하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한 의사분들을 두 명의 전혀 관계없는 인물들과 묶어버리는 모욕적인 발언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특히나 그 둘이 타인의 고통을 감상하기를 즐기는 사디스트이기 때문에 더더욱이 그럴 테고요. (전염률이 높고 위험한 코로나 바이러스를 지닌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의사분들께서 동분서주 힘써주시는 2020년, 오늘날에는 말도 안 되는 비유이기도 하죠.) 하지만 놀랍게도 의사를 야만적으로, 상처 난 부위를 손가락으로 쑤셔대며 무색한 기쁨을 만끽하는 고문 전문가처럼 표현한 위와 같은 발췌문은 19세기 미국인 대다수에겐 그다지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죠, 인간 몸속 고어스러운 부분이나 환자의 고통에 전혀 감정적 동요를 느끼지 못하는 “미치광이 의사”는 전쟁 전 미국의 소설, 논픽션, 그리고 정치풍자만화에도 자주 등장했습니다.

 

현재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선 위에 발췌해놓은 비평을 조금 더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비평문에서는 은유적인 방법으로 만들어낸 의사를 이용해 당시 여럿 미국인의 잠자리를 망친 중요한 도덕적 질문, 바로 “타인의 고통에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을 떠올리게 하죠. 조지 리파드의 소설’ 레이드 애나벨’(1844년)을 비판하기 위해 모틀리 매너스(가명)라는 비평가는 책에서 중세시대의 고문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부분은 소설 속 캐릭터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 그리고 독자들까지 공통적으로 잔혹성과 도착성을 지녔음을 반증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매너스가 없는 말을 한 건 아닌 것이 고딕 문학에 팽배하게 자리 잡은 -- 잔혹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소비되는 동시에 또 다른 팬들을 만들어질 정도의 -- 잔인무도한 표현들은 18세기에 처음으로 세상에 발을 들이민 뒤로 인간의 도덕성에 위협을 가할만한 패닉들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패닉들은 고어 영화나 팬들을 향한 비난을 먹으면서 그 몸집을 키우는 중입니다.) 하지만 소설 ‘레이드 애나벨’이 매너스에게 더 깊은 공포심을 안겨준 부분은 처형인이 실제로 사람을 묶고 네 갈래로 나누는 거열형을 진행했다는 점보다 바로 그 캐릭터가 과거를 회상하며 보인 무색한 기쁨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역설적으로 다가올 무색한 기쁨이라는 표현 속 동정심이 결여된 느낌과 즐거운 느낌의 조합은 사실 모든 19세기 독자들에겐 전혀 역설적인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인들은 두 감정 사이에 당연한 상관성이 -- 그러니까 피해를 받고 있는 타자의 고통에 무색하던 감정이 자연스레 그것을 관찰하는 기쁨으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관성이 --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자들이 타자가 고통을 느끼는 장면에 더 많이 노출될수록 점점 더 다른 사람이 느끼는 괴로움에 둔감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 장면들에 많이 노출된 사람들 중 전문적으로 매일 살을 자르며 피를 보는 사람들을 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로는 위에 언급된 처형인 같은 부류가 있겠네요...…아 물론 의사도 빠질 수 없겠죠!

 

절단술(Amputation), 토마스 로랜슨(Thomas Rowlandson)의 1793년작이며 동판화에 직접 색을 칠한 형식의 작품이다. 작품 속에선 여섯명의 수술의와 의사들이 겁에 질린 한 남자를 둘러싸고 그의 다리가 절단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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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대의 다른 문서들을 보면 무색한 의사와 무색한 작가 사이의 연관성이 보다 더 현실과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조지 기플란(George Gifflan)이라는 비평가는 고통과 범죄의 민낯을 소름 돋게끔 표현해내기로 악명을 떨친 작가, 조지 크랩(George Crabbe)의 글에서 보이는 “완벽한 무색함"은 그가 외과 의사로 활동하던 당시에 얻게 된 전리품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의사 시절, 크랩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수많은 종류에 고통과 질병에 익숙해졌을 것이다”라고 자신이 관찰한 바를 내놓은 기플란은 그 경험이 “실질적으로 크랩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점 속 있었을 색깔을 앗아갔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크랩의 작품에서 독자들이 “유아 살해와 같은 끔찍한 현장을 직접 겪어내듯이 느끼며 악취 나는 고통과 범죄가 지닌 악에서 피어 나오는 이상하리만치 달콤한 향을 맡게끔 해준다”고도 말했습니다. 여기서도 다시 한번 미치광이 의사가 불쾌감을 일으키는 핵심적인 이유는 바로 의사라면 지녀야 할 객관성과 남의 고통에 희열을 느끼는 마음이 합쳐진 무색한 기쁨임을 알 수 있습니다. 통증을 느끼는 사람을 보며 굳어있는 얼굴은 언제든지 그 밑에 숨어있는 “달콤한 향"을 맡고 환한 미소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더 악화시킨 건 다름 아닌 고어스러움에 매혹된 작가이자 의사라는 사람이 다치게 할 수 있는 대상이 단순히 소설 속 캐릭터로만 국한되지 않을 수 있단 생각이 들고나서부터였습니다. 19세기의 사상가들은 그가 실제로 그의 환자나 독자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단 생각에 걱정을 했던 것이죠. 그래서 다른 비평가는 사악한 의사 이미지를 또 한 번 이용해 조지 리파드의 숨통을 조여왔습니다 (정말 어디 도망칠 구석 하나 없었던 작가였지 않습니까?), 이번엔 그의 다른 고딕 소설을 언급하면서 말이에요. 예술의 궁극적 목표란 그걸 받아들이는 대중의 도덕성을 기르는 데에 있다고 본 당대 빅토리아 시대 사상을 언급하며 이 두 번째 비평가는 리파드의 소설 중 피가 넘실대는 작품, ‘더 퀘이커 시티’ (The Quaker City 또는 더 몽크즈 오브 몽크 홀 (the Monks of Monk Hall), 1849년)를 비판했습니다. 이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잔혹한 표현들이 독자들의 윤리를 낮추는데 일조했다고 하면서 말이죠. “저희는 어떻게 이 의사를 믿으란 말이죠? 정말 미미하게나마 전염병이 있단 증상을 보이는 환자를 보면 바로 괴로움으로 가득 찬 극악무도한 곳에 처박히도록 지시하는데도 말이에요"하고 비평문은 딴지를 겁니다.

 

이러한 미치광이 의사의 이미지는 꼭 비평에 쓰이는 은유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당대의 여러 소설 속에서 색깔이 짙은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했죠. 그런 캐릭터를 담고 있는 소설의 가장 초반작 중 하나로는 제임스 페니무어 쿠퍼의 더 스파이(The Spy: A Tale of the Neutral Ground, 1821년)를 꼽을 수 있습니다. 미국 독립 전쟁 후반부에 뉴욕에선 미군과 영국군끼리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던 상태였는데 이 소설에선 당시 뉴욕주에 살던 와튼 가족이 겪어야 했던 험난한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와튼가는 미국군에서 외과의사로 복무 중이던 아키바드 싯그레이브즈(Dr. Archibald Sitgreaves)라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상처를 입기를 번갈아가면서 당해야만 했습니다. 누군가 무덤 위에 앉고 있는 형상을 그려내는 그의 성씨는 그에게 너무도 잘 맞았는데, 이는 보기 힘들 정도의 상처들을 매번 마주하던 그가 어느새 맞이하는 환자들의 상처나 고통을 보고도 그 어떤 감정도 못 느끼게 변했기 때문입니다. 영국군 대위, 헨리 와튼이 팔에 작은 상처를 입고 오자, 아키벌드는 그에게 아쉽다는 듯이 다친 부위를 보아하니 팔을 절단할 필요가 없겠다며 시무룩해합니다:

 

“...(중략)... “다친 부위는 그리 나빠보이지 않는군요. 하지만 대위님의 팔은 꼭 한번 잘라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풋내기였다면 절단 수술을 하는 동안 행복감을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 악마 같은 것!’ 와튼 대위가 소리를 질렀다. ‘같은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데 그 무슨 행복감이 동반한다는 말이냐?’ ‘대위님,’ 의사가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과학을 동원한 절단술이란 굉장히 고혹적인 법입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자잘한 사항들은 확인할 새도 없이 바쁜 풋내기 의사들을 정말로 시험에 들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구요.’”

 

위에 적힌  대사가 적힌 페이지에 있는 일러스트레이션. 필릭스 옥타비스 칼 달리(Felix Octavius Carr Darley)가 그렸으며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가 쓴 더 스파이의 1859년 개정판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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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췌본에서 -- 다른 부분에서와 마찬가지로 -- 우리는 싯그레이브즈 의사가 자신의 발언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이질감이 들면서도 또 그만큼 웃기기도 하는 장면들을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다고 싯그레이브즈 의사가 상당한 수위의 사디즘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큰 오산입니다. 소설 속에 한 장면에서는 하비 버치(Harvey Birch)의 스파이 활동이 발각되어 그가 처형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싯그레이브즈는 하비 버치의 시체를 박제된 동상으로 만들어 자신의 고모에게 선물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며 콧노래를 부릅니다. (“버치의 뼈는 마디마디마다 잘도 엮여있지, 그의 몸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고 말거야.”) 다른 장면에선 그가 상처난 부위의 회복과정을 지켜보기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부러뜨렸던 과거를 흐뭇해하며 다음과 같이 회상하기도 하죠. “부러진 뼈마디를 꿰메면서 내 모든 신경들은 신바람이 났지 … 내가 느껴본 그 어떤 감정보다도 나를 흥분시켰어,"라며 그의 앞에 두려움에 젖은 채로 이야기를 듣고있던 이에게 말을 건넸다. “근데 생각해봐, 과연 그게 손이 아니라 다리나 팔처럼 더 중요한 부위였다면 그 흥분감이 얼마나 더 느껴질지!” 

 

싯그레이브즈 의사가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몸을 직접 해했다고 고백하면서 다리나 팔에 고통을 가할 상상 하며 설레어하는 그의 아이 같은 표정은 의학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온갖가지 만행에 대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싯그레이브즈가 과학적 경관을 경험하기 위해 더 심한 일을 하지 못할 거란 보장이 없단 생각도 들고요. 그의 마음속에 피어난 새싹이 자신의 손가락을, 팔을, 또 다리를 부러뜨리는데에서 다른 사람을 -- 특히나 그 사람의 신체가 좋은 동상으로 쓰일 가치가 있다면 더더욱이 -- 죽일 수 있는 꽃으로 피어날 때까지 가로막고 있는 요소가 과연 있을까요? 실제로 후자의 경우는 당시 쿠퍼의 독자들에겐 단지 가설로 남을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19세기 미국에선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 더 정확하게는 주로 유색인종, 빈민, 범죄자의 시체 --가 주변 의대에서 훔쳐다가 연구용으로 쓰이기 위해 해부실로 데려가는 일들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이 현상은 의사들을 향한 수많은 대중의 노여움을 샀으며, 1785년에서 1855년 사이에 꽤 많은 수의 “해부 반대 시위”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토마스 로랜슨이 1775년에 그려낸 위의 유화작품에서는 ‘죽음'이 망을 봐주는 것 처럼 위장한 채로 랜턴을 들고 있고 그 밑에는 두 도굴꾼의 절도 현장이 그려져있다. 또한 ‘죽음'이 한 도굴꾼의 뒷덜미를 잡고있는 장면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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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은 늪으로 향하는 폭력성의 미끄럼틀이, 싯그레이브즈라는 캐릭터는 이미 명백히 올라타고 있는, 지닌 위험성은 의료도착증을 향한 19세기 미국인의 불안을 상승시켰습니다. “그… 관찰자의 눈이 길러낸 ‘잔인함을 탐하는 취향'이란 당시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악’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라고 역사학자 케런 할터넨(Karen Halttunen)가 자신의 글에서 기술합니다. “어떠한 ‘고픔', 또는 ‘갈증', 그러니까 거의 마약 중독처럼... 먹이를 줄수록 계속해서 그 몸집을 부풀리는 악한 마음으로 여겨지곤 했죠.” 그래서일까, 1831년엔 법률 개혁가 에드워드 리빙스턴(Edward Livingston)은 “이렇게까지 역겹고, 흉측한 방식으로 인간의 처형이 거행된 적이 있었던가"라는 말과 함께 사형 집행을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사형집행은 곧 “모든 관중의 마음속에 그 악의 씨앗이 자리 잡을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되는 “경관"이다”라고 언급했습니다. 1821년, 도덕성을 중시하던 한 신문사는 지속되는 전쟁이 결과적으로 군인으로부터 하여금 전쟁의 무서움에 “둔감해지게 만든다”라고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군인이 가진 연민을 독 들게 하며 궁극적으론 경악스러운 대학살 장면을 바라보면서 아무 감정도 들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즐기게 될 수도 있다고 더했습니다. 잔인한 장면을 보거나 읽는 행위가 실제로 그를 범하는 데까지 놓였다고 여겨진 연결고리는 바로 1833년 한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 그 신빙성을 배가시켰습니다. 아브라함 프레스콧(Abraham Prescott)이 그 참상의 주인공이었는데, 그의 변호사 집단은 의뢰인이 다른 살인 사건들의 내용이 담긴 끔찍한 법정 기록을 보며 결과적으로 자신의 동료를 죽이는데 이르기까지 “동요되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당시 미국과 영국에선 의사들 사이에서 경험을 통해 늘어만 가는 침착함은 더 많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는데요, 사학자들 사이에서 당대를 “고통의 시대"라고 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18세기 후반부에 처음으로 생겨난 마취제가 세상에 발을 들이밀기 전까지 사람들은 신체가 겪는 수많은 고통들은 어찌할 바 없는 인생의 일부분이라고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수술법과 마취제가 계속해서 발전하기도 하고 의사들이 점점 더 많은 종류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터득하고 나서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신체적인 고통을 감내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도달했죠. 돌이켜보면 1772년과 1846년 사이야말로 -- 아산화질소의 발견과 처음으로 에테르를 마취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기간이었죠 -- 백인 문화 속에서 “고통을 향한 신종 혐오감"이 생겨났고 이러한 감정은 점차적으로 “완전한 형태의 혐오와 공포심으로 진화했습니다."

 

인간의 고통 분야에서 이룩해낸 이러한 엄청난 발전은 미국에서 문화적으로 두 가지 명백하게 상반되는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쪽에선 문화계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쳤던 감상주의(Sentimentalism)가 붐을 일으켰습니다. 이 문화계 운동은 철학과 문학 쪽에서 마취제의 발명과 발전을 축복하며 그 인간이 느껴야 하는 고통의 총량을 반드시 줄여야 한다는 주장을 설파했습니다. 수잔 워너의  넓고 넓은 세상(The Wide Wide World, 1850년) 같은 감상주의 소설들은 타인의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연민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큰 가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감상주의 개혁운동은 노예제도, 군대, 교실, 또는 법적 처벌이란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한편 그 이면에선, 금기시되는 것 보다도 더 사람들을 자극시킬만한 것은 없기 때문에, 많은 미국인들 사이에선 타인의 고통을 관망하고 싶어 하는 열기가 엄청나기도 했죠. 당시 굉장히 많은 수의 반달리즘(BDSM) 포르노들이 생겨났으며 싸게 팔리던 신문(“Penny press”) 에서는 고어스러운 범죄현장이나 미국의 자극적인 소설들을 공공연하게 담아냈습니다. 

 

심리 상담가이며 초기 성 행태학자 였던 독일계 호주인 리차드 크래프트-에빙(Richard Freiherr von Krafft-Ebing)의 개인적인 수입풍 중 하나인 19세기 “프랑스산 우편엽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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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괴로움에 관해 두 부류의 집단이 가진 생각이 정반대처럼 비칠진 몰라도 감상주의자들과 사디스트들은 모두 똑같이 고통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집단 모두 잔인한 의사의 이미지가 자신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표현하고, 비판하며 더 파고드는 데에 사용하기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거죠. 앞서 고딕 소설가 조지 리파드를 정신 나간 의사에 비유한 두 비평가들을 예로 들자면, 둘은 똑같은 은유를 사용해서 자신들의 공격 대상을 조롱했죠. 그들이 비판한 소설, ‘더 퀘이커 시티’에서는 기괴한 의사 맥토니켓(Dr. McTourniquet)이 광기에 젖은 채로 많은 종류의 “아름다운" 수술과 공개해부술의 즐거움에 대해 말하는 장면(“못 배운 놈들에겐 이만한 교육도 없지")이 있습니다. 다른 장면에선 치과의사가 말이 많은 환자들의 치아를 부숴버리기도 하며 소설 속에서 악당으로 등장하는 데빌버그(Devil-Bug)는 도착증을 지닌 고문자로서 자신의 피해자들을 “환자"로 칭하며 훔친 시체들을 의사들에게 팔기도 하죠. 데빌버그가 피해자들을 학살하고 불구로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해부용 메스를 들고 시체 앞에 서있는 그 어떤 학교의 어떤 의사라도 그보다 더 많은 흥분감과 침착함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소설 속 내레이터가 말합니다.

 

와중에 소설 속에서 악랄한 의사들에 대해 다른 생각을 지닌 인물들도 있었는데요, 루이자 메이 올컷의 -- 이론적으론 감상주의 소설 중 상대적으로 그 색깔을 옅게 지니는 -- 단편소설 병원 스케치(Hospital Sketches, 1863년)에선 조지 리파드를 더욱더 옭아매는 장면들이 담겨있는데요. 루이자 올컷, 자신이 미국 내전 당시 간호사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자신의 이야기에 조금 살을 덧붙여서 만든 병원 스케치에서 루이자는 의사가 지녀야만 하는 가치로 동정심을 손꼽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트리뷸레이션 페리윙클(Tribulation Periwinkle)이란 이름의 간호사, 는 근무지로 배정받은 워싱턴 DC의 군 병원에서 그 정반대의 경우, P(Dr.P)를 목격하는데요. P의 관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P가) 무자비하게 손상된 신체를 바라보는 시선은 수선이 필요한 옷 쪼가리를 바라볼 때의 나의 그것과 비슷했다. 수술실에서 그가 다친 몸을 자르고, 톱질하며, 꿰매고, 토막 내면서 보이는 표정을 보고 있다면 그가 의사인지, 재봉사인지 헷갈리기도 할 정도였으며 상처 난 부분이 복잡할수록 그의 기분은 더더욱 좋아지는 것만 같았다.” 

 

소설은 ‘그 무엇이 사디즘을 의사 P의 머릿속에 고착시켰을까?’라는 질문에 ‘의사들이 노출된 폭력적인 장면들’이 다시금 용의 선상에 올립니다. 의사 P가 처음 소설의 주무대인 병원으로 오기 전에 그는 크림 전쟁(the Crimean War, 1853-56년도)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한 적이 있다고 밝혀지고 주인공은 그가 “전쟁에서 관찰한 수많은 참상이 그로 하여금 인간과 인간의 상처를 다른 부류의 것이라 판단하게끔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실제로 이 둔감화되는 과정은 같은 병동에서 근무하는 다른 동료들에게도 일어나기 시작하고 심지어 주인공, 페리윙클 간호사 본인마저도 수술을 볼 때면 거슬릴 정도로 매혹되기 시작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P가 아름다운 신체들을 바라보거나 가까이에서 샅샅이 훑어보는 광경을 보고 불쾌할 정도로 매료되기도 했다.”

 

 

 

 

미국 내전 당시 게티스버그(Gettysburg)의 한 의료용 텐트 앞에서 절단 수술이 벌어지는 장면 (186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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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과 간호사들)의 시야를 폭력적인 장면들로 가득 채운건 전쟁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고통이란 일반적인 환경 속에선 19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의사들의 밥벌이 수단이었습니다. 수술실에 에테르가 발을 들이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방대한 고통을 선사하는 능력만큼 전문의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자격요건은 없었다”라고 사학자 마틴 퍼닉(Martin S. Pernick)이 서술했습니다. 이렇게 전쟁이 아닌 일상 속에서도 의사들이 노출되어 있는 장면들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 반증이라도 하듯  럿거스 대학교의 어느 의과대학원생 아사 피치(Asa Fitch)는 몇 주간 자신의 변화과정을 서술하며 본인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을 표출했습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이 절단술을 마주했을 때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이제는 수술대 위에 오른 아이가 겪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지루한 수술”을 바라보며 “이전에 지니던 연약한 마음은 이제 사라졌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는 의사들의 무관심하다는 듯한 말투가 어디서 생겨난 건지 이제 아시겠나요?

 

특별히 이 불평을 잘 대변하는 예시로 허먼 멜빌이란 작가를 빼놓을 수 없죠. 그의 소설 ‘화이트 재킷’(White-Jacket; or, the World in a Man-of-War, 1850년)은 의학박사 캣왤더 큐티클(Cadwallader Cuticle)이라는 캐릭터를 이용해 고학력이면서 환자에 동감하지 못하는 의료계 사람들을 풍자했습니다. 캣왤더는 화이트 재킷 속 주요 이야기가 전개되는 호위함에서 근무하는 의사로서 “해군 최고의 외과 전문의”라는 명성과 세계에서 이름있는 의료 단체에 속해있다는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는 인물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캣왤더가 최고의 교육기관에서 수료한 인간 해부학은 “오로지 과학적인 면만을 바라보는 무감정의 상태”를 그에게 쥐어줬으며 그의 감정을 잿빛으로 만들어버린 것 같단 생각도 들게끔 합니다. 그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캣왤더는 자신에게 온 환자들의 신체들을 의학적 발견(과 승진)을 위한 좋은 기회로만 바라보며 실제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임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아낸 고통으로 인해 아파하는 신음소리와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찬 공간에서”, 멜빌의 내레이터가 말합니다. “캣왤더는 초현실적으로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미치광이 의사의 선입견에 걸맞기 위해서인지, 캣왤더의 의학적 지식을 위한 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점점 광기 젖은 관심사로 변질되었고 그의 치료 과정을 볼 때면 가끔 과연 그 안에 아직 타자를 향한 동정심이 남아있긴 한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또 그는 해군 내 다른 외과의사들에게 그의 기술을 자랑하기 위해서 훨씬 덜 현란한(그렇지만 신체에 덜 손상을 입히는) 방법을 제안하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다친 해병의 다리를 과감히, 그리고 천천히, 절단하기도 합니다. 그 해병은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상당한 고통을 호소했으며 거의 수술이 마침과 동시에 죽어버립니다.

 

허먼 멜빌이 쓴 화이트 재킷의 1892년 개정판 표지. (어거스터스 번햄(Augustus Burnham)作)

그림 출처

 

객관적으로 덧붙이자면, 캣왤더가 지닌 폭력성은 미치광이 의사라는 이미지를 이용해 의사들을 극도로 희화화한 것입니다. ‘더 스파이’의 싯그레이브즈 의사도 그랬으며 ‘더 퀘이커 시티’의 맥토니켓 의사도 그랬듯이 ‘화이트 재킷’의 의사는 그가 진행하는 잔혹한 수술들의 “아름다움”에 관해 논하면서 의료적 특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을 “기념품”처럼 수집하기도 하죠. 이 소설이 지닌 한 가지 차이점을 꼽자면 의사, 캣왤더 큐티클이 지닌 타인의 고통에 대한 둔감함을 예외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최상의 자격을 지녔으며 굉장히 침착한 의사를 사회 속 지위가 가진 전반적인 폐해성을 비추기 위한 도구로 이용해버릴 뿐이죠. ‘화이트 재킷’을 읽다 보면 해병 장교들이 계급이 낮은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거나 형벌을 내리며 즐거워하는 장면들을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병사들의 살점이 찢겨 떨어질 정도로 때리는 태형을 거행시키거나 (이 장면에선 캣왤더가 무덤덤하게 처벌식을 집행시킵니다) 또는 병사가 사형당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죠. “해군은 미치광이들의 정신병원이었던 것이다”, 고 내레이터가 뭉툭하게 결론 내립니다. 소설을 읽고 화가 난 독자들은 이에 깊게 동감하는 바를 표했습니다. 체벌법 개혁가들은 화이트 재킷을 의회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끔 각자에게 한 권씩 배부하기도 했으며 책을 접한 의회 사람들은 몇 달 뒤에 해군 내에서 태형을 폐지시키자는 법안에 찬성했습니다. 멜빌의 책이 실제로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 법안에 대한 생각을 바꿨는지 정확히 알려주는 학설이나 논문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 후 몇십 년동안 그 소설이 실제로 개혁법안 관련 투표를 진행하는 데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수많은 말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멜빌의 잔혹한 소설이 해군 내 태형을 폐지시킬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았지만 적어도 소설 속에서 폭력성이 강조된 채 등장하는 의사 캐릭터들이 지닌 순기능의 존재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히려 역으로 사람들이 쌓아온 선입견처럼 폭력적인 장면에 많이 노출될수록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고 잔인성은 고조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점도 시사한다고 봐도 되겠죠. 여러분이 이렇게 문화적으로 쓰이고 있는 폭력적인 표현들이 과연 대중들을 잔인하게 만들지 아니면 현실 속 잘못된 문제들을 바로잡아줄지 정확하게 고르기가 어렵다고 아쉬워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묘사들이 정확하게 어떤 속성을 지녔는지에 대한 논의는 계속해서 되어왔고 현재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타인의 고통에 사로잡힌 문화가 만들어낸 캐릭터, 도덕성이 위험에 빠진 ‘미치광이 의사'. 사회적 권위에 더불어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장면을 자신의 동맥에 계속 주입시켜 스스로를 매우 쉽게 사디스트적인 고문자로 만들 수 있는 동시에 성자와 같은 치유자로 비칠 수도 있는 만큼 그가 사회적으로 가진 의미는 아직도 두 가지 정반대의 견해를 두고 미궁에 빠진 이 문제를 보다 명확하게 상징하는 매개체였던 것입니다.

 

첼시 데이비스(Chelsea Davis / 역주: 이 글의 저자)는 샌 프란시스코에 거주하고 있는 비평가이자 작가이다.  그녀의 에세이들은 리터러리 헙(Literary Hub), 일렉트릭 리터러쳐(Electric Literature)와 같은 플랫폼에 게시되었다. 그녀는 스탠퍼드 영문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거치는 동안 폭력성이 문화적으로 어떻게 묘사되어왔는지 -- 호러영화부터 전쟁 문학, 종말론적 주제의 부상에 이어 고딕 문학까지 -- 연구했다. 그녀는 현재 호러 장르와 코미디 장르 사이의 전반적인 공통점을 연구하여 발표하는 에세이 시리즈에 몰두하고 있다. 그녀의 웹사이트에 가면 더 많은 글을 접할 수 있다.


원문 : https://publicdomainreview.org/essay/sicko-doctors

 

Sicko Doctors: Suffering and Sadism in 19th-Century America

American fiction of the 19th century often featured a ghoulish figure, the cruel doctor, whose unfeeling fascination with bodily suffering readers found both unnerving and entirely plausible. Looking at novels by Louisa May Alcott, James Fenimore Cooper,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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