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29. 00:31ㆍ번역/비문학
행복을 쟁취하는 방법
글쓴이ㆍ버트랜드 러셀
번역ㆍ오성진
제1 장: 무엇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가?
동물들은, 건강과 음식 문제만 해결된다면, 금세 행복한 상태에 도달한다. 반면에 현대 인간들은 모두 행복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느끼면서도 정작 그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많이 없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현재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당신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반대로, 만약 당신이 행복하다면 과연 주변에 당신과 비슷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봐라. 질문에 답을 구했다면 앞으로 표정을 읽는 방법을 잘 터득해서 평범한 하루를 보내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감정을 읽을 수 있도록 힘을 기르도록 해라.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는
약함도 묻어나며 고통도 묻어있구나,
(A mark in every face I meet,
Marks of weakness, marks of woe,
위에 적힌 문구는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시에서 말하는 종류와는 다를지 모르지만, 당신이 어디를 가든간에 다양한 유형의 불행을 마주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당신이 세상에 대도시 중 가장 전형적인 도시로 손꼽히는 뉴욕에 위치해있다고 가정해보자.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낮에 거리 위에, 또는 주말에 꽉찬 도로 위에, 그것도 아니라면 밤중에 춤을 추는 공간에 서있다고 상상해보아라. 그리고 정신에서 자아를 최대한 배제시켜놓고, 주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특징 중에 당신 안에도 공통적으로 살아있는 점이 보인다면 그것들로 하나둘씩 머릿속을 채워나가보자. 한 번 그러고 나면 각각 다른 집단의 사람들이 각자 어떤 문제들을 지니고 사는지 낱낱이 보일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에서는 사람들 속 불안감, 집중력의 과도한 소모, 소화불량, 힘든 현실 외에는 무엇 하나에도 제대로 관심사를 둘 수 없는 상태, 제대로 놀 수 없는 상태, 주변인들을 인식하지 못 하는 상태가 담겨있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주말에 꽉찬 도로 위로 장소를 옮겨보자. 아마 차 안에서 편하게 옷가지를 풀어 헤친 남녀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몇몇은 굉장히 부유하기도 하며 몇몇은 직업이 없을 수도 있지만 모두 쾌락을 쫓는 인물들일 것이다. 이 쾌락을 쫓는 행위에는 차도 위에 가장 느린 차부터 빠른 차까지 차별없이 모두가 함께 동참하고 있다. 이 와중에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다른 차를 보기 위해 도로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며 차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은 온통 다른 차들을 제치고 싶다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운전대를 맡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보통 그러하듯이 이러한 목표에서 잠시만이라도 정신을 멀리한다면 겉잡을 수 없는 지루함을 맞이할 것이며 그에 이어 불만스러운 상태로 돌입하게 될 것이다. 간혹 가다 유색 인종으로 가득한 차 한 대에 몸을 실은 탑승객들이 순간순간을 온전히 즐기며 행복해하는 장면을 볼 수도 있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군가의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화가 조장될 것이며 결국 그들은 사고를 내고 경찰에게 잡혀갈 것이다: 연휴기간에 즐거운 감정을 느낀다는 건 기어코 불법에 가까운 행위인 것이다.
이번에는 밤에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건너가보자. 춤을 추러 나온 이들 모두 춤추는 행위를 통해 스트레스를 털어내고 다음 날 있을 치과 진료를 받으며 쓸데없이 화를 내지 않겠다는 굳건한 결심 끝에 밖으로 나왔을 것이다. 술을 마시거나 타인의 신체를 만지는 행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쾌락을 느끼게 해준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한시라도 빨리 취하려고 술을 들이키는 와중에 옆에서 춤을 추고 있는 파트너가 얼마나 시원찮은 사람인지 인지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술을 충분히 마신 남자들은 하나둘씩 울기 시작한다. 울음이 터진 남성들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어떻게 그들의 어머니의 헌신을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들인지, 그 이유들을 하나씩 늘어놓기 시작한다. 술이 그들을 위해 해준 것이라고는 머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당시에는 이성이 누르고 있던 죄책감을 풀어준 것 뿐이다.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불행들은 부분적으로 사회 체제의 탓이기도 하며 한 편으로는 개개인이 지닌 심리적인 문제의 탓이기도 하다. 나는 이전에 이미 행복을 복돋아주기 위해서 사회 체제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주장하는 바를 적은 글을 낸 적이 있다. 이미 그 글을 통해 왜 전쟁, 금전적 착취, 그 외에 두려움과 잔혹성을 가르쳐줄만한 어떤 행위라도 멈춰야 하는지 밝힌 바가 있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그런 문제를 다루고 싶지 않다.
문명의 더 나은 발전을 위해서는 전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체제를 찾는 일이 가장 우선인 것은 당연하다. 허나 사람들이 너무도 불행한 일상을 보내고 있기에 하루라도 더 죄의식을 지닌 채 태양을 맞이할 바에는 차라리 다른 이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 덜 잔인하겠다고 느끼는 현상이 지속되는 한, 그 어떤 체제라도 전쟁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발전해나가는 기계들을 사용해 가장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이 닿게끔 함으로써 지속되는 빈곤을 멈추는 것이 필수라는 사실 또한 당연하다. 그렇지만 현재 부유한 이들이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면 과연 가난한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주는데 이렇다 할만한 의미가 있을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두려움과 잔혹성을 가르쳐주는 행위가 나쁘다는 사실 또한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이 두 가지에 이미 젖어있는 이들이 그 외로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있기나 할까? 이렇게 정리해본다면 과연 어떻게 모든 문제들이 개인 단위로 종결되는지 알 수 있다. 지금, 바로 여기, 남녀노소, 현재보다는 과거만을 아름답게 여기는 이 사회 속에서 과연 그 누가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이 불행을 논하기 위해서는 누가 봐도 심각하다고 생각되는 문제에 처한 이들 대신 일반적인 이들을 고려하며 이 글을 써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 그럴 예정이다. 내가 상상하는 독자층은 음식과 집을 보존하기 위해 응당 필요한 비용을 낼 여건이 마련되어 있으며 생활 속에서 일반적으로 기대되는만큼 움직일 수 있는 신체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다시 말해 안타깝게 아이와 사별을 해야만 했다든가 사회적으로 힐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 처한 이는 내가 고려하고 있는 독자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비록 위의 문제들이 중요하며 그들에 대해서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충분히 동의하지만 단지 그들이 처한 상황은 내가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주제와는 다른 결의 문제라는 이유가 있다. 내가 전달하려는 바는 오히려 문명국의 대부분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쌓아가는 불행을 과연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그 방법을 제안하는데에 있다. 자칫 가벼워 보일 수도 있는 이 문제는 정확한 외부 원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이기 마련이며 그렇기에 사람들을 위해서 이에 대한 이야기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불행이란 보통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을 잘못 설정한 데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잘못된 도덕관과 잘못 잡힌 습관들이 쌓이고 쌓여서 자연적으로 피어올랐을 열정, 그리고 새로 시도해볼만한 일들을 찾기 위한 관심도가 폭삭 무너지는 바람에 궁극적으로 인간이나 동물, 그 종을 떠나 모두가 사는 데에 필수적으로 필요로 하는 행복을 놓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문제들은 오로지 개인적인 접근을 통해서만 고칠 수 있는데, 이 글을 통해 개인 - 그러니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평균적인 여건이 갖춰진 개인 - 으로 하여금 행복은 쟁취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다.
아마 내 인생에 대해 직접 적는 것만큼 내가 전달하려는 바를 소개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결코 행복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어린 나이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던 찬송가는 바로 '세상에 지친 나, 죄를 짊어졌네(Weary of earth and laden with my sin)'였으며,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나는 스스로 ‘내가 만약 일흔 살 까지 살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여태껏 겨우 14분의 1도 안 되는 양의 인생을 버텨냈겠군,'이라 생각하며 앞으로 남은 여생동안 나를 괴롭힐 따분함의 양은 거의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소년기의 나는 여전히 인생을 싫어하고 있었으며 거의 매일같이 자살 직전의 상태까지 이르기를 반복했지만 정작 수학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욕심 하나 때문에 막상 실행에 옮기지는 못 했다.
그랬던 내가 현재는 인생을 즐기며 지내고 있다. 더 나아가서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인생에 즐거움이 더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가 가장 원하고 있는 것이 뭔지 깨닫게 된 점과 그들 중 많은 것을 손에 넣게 된 점이 부분적인 이유일테고 또 한 편으로는 특정한 주제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같이 결코 가질 수 없을 것들에 대한 욕심을 버린 것도 부분적으로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변화에 있어 가장 큰 원인으로는 스스로 어떤 생각을 놓지 못하고 내내 집착하던 경향을 줄여나가게 된 데에 있다.
청교도적인, 엄격한 부모 밑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 모두가 그러하듯이 내게는 살면서 범했던 죄와 실수,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단점들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다. 자주 스스로를 한낱 불쌍한 인간에 미치지 못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럴 때마다 어떠한 반론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난 내 못난 자신과 결점들에 대해 점점 더 무신경한 상태에 다다랐다. 그렇게 날이 갈수록 내 신경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양한 종류의 지식, 그리고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개인들과 같이 내 밖에 있는, 조금 더 객관적인, 외적 대상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외적인 것에 대한 관심사는 -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 각각 제각기 다른 유형의 고통이 수반되어있다.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수도 있을테고, 구하는게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이는 지식이 있을 수도 있고, 친구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경험을 해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류의 고통들 마저 인생에 있어서 정말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만큼은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 즉, 한 개인에게 있어 그 어떤 고통일지라도 스스로를 향한 혐오가 만들 수 있는 만큼의 상처보다 큰 고통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외부를 향한 모든 종류의 관심사에는 그에 걸맞는 활동이 갖추어져있다. 한 관심사가 소멸되지 않고 계속해서 존재만 해준다면 그 관심사를 통해서 누리는 활동은 평생동안 지루함과 떨어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신에게 관심을 돌렸을 경우에는 개인이 더 나은 형태로 발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활동이 딱히 없다. 있다고 해봤자 일기를 쓴다든지, 심리 상담을 받는다든지, 아니면 수도자의 길을 걷는 것 정도가 다이다. 하지만 수도자도 수도회에서 만들어낸 생활 루틴을 무한히 반복한 끝에 자신의 영혼을 더이상 신경쓰지 않는 단계에 도달할 때 까지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남은 여생동안 성당에 남아있도록 강요받았다는 전제 하에, 그가 종교에 스스로를 바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청소부가 그의 일을 통해 받았을 행복과 양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몰두하는 상태를 너무도 중시하는 안타까운 부류의 인간들에게는 타의적으로 부여된 규칙들을 수행하는 일이야말로 유일하게 행복으로 향하는 방법이 되어줄 것이다.
자기에게 몰두하기를 중시하는 이들은 다양한 종류로 존재하며 그 중 죄인(sinner), 나르시시스트(narcissist, 자기도취자), 그리고 과대망상증 환자(megalomaniac)가 가장 흔한 유형이다. 내가 ‘죄인’이라고 표현한 사람들은 정말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아니다. 모두가 내린 '죄인'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고려하면 세상사람들 중 그 누구도 한 번도 죄를 저지르지 않았거나 모두가 무조건 한 번 이상은 저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서 ‘죄인'이라고 부르는 집단은 죄의식에 빠져 사는 인간들을 뜻한다. 이 집단에 속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못마땅해하며 만약 그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신이 그를 못마땅해한다고 해석할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훗날 그가 되고자 하는 이미지가 잡혀있고, 그 이미지는 언제나 그로 하여금 자신의 현재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 하도록 갈등을 안겨준다. 그가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배웠던 규칙들을 의식 밖으로 던져 버린지 이미 오래 지났는데도 '죄인'에 속하는 사람의 죄의식은 아마 그의 무의식 속 깊은 곳에 갇혀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게 갇혀있는 죄의식은 오로지 그가 잠에 들었을 때나 술에 취했을 때만 튀어나올 것이며 때를 가리지 않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깃든 고유의 맛을 앗아갈 것이다. 아마 '죄인'은 유아기 때 배웠던 금지사항들을 아직도 올곧게 믿어왔을 것이다. 욕, 음주,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잘못들 마저 큰 잘못처럼 여길테고 그 중에서도 섹스를 가장 악덕한 행위라고 여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위에 적힌 쾌락들을 자제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을 것이며, 다만 그 행동들을 할 때마다 자신을 점점 혐오하게 될 것이다. 그에게 영혼을 전부 바쳐서라도 이루기 바라는 단 한가지 욕망이 있다면 바로 그가 어렸던 시절처럼 그의 어머니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인정을 받는 것 뿐일 것이다. 이게 현실로 이어질 기회가 그에게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세상에 의미가 있는 것은 더이상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어차피 죄를 범할 바에는 크게 범해버리자는 충동이 들 수 있다. 사랑에 빠졌을 때 그는 이성에게서 어머니의 사랑과 비슷한 부드러움을 바라겠지만 동시에 그걸 마냥 받아들일 수도 없는 교착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욕망이 어머니를 상상하게 함으로써 그는 어느 여자와 함께이건간에 성관계를 가질 때 마다 마치 그가 큰 죄를 범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실망을 할 것이고, 실망은 잔혹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자신의 마음 속에 피어오른 잔혹성을 보며 후회를 하게 될 그는 얼마간 자신의 행동을 자제하다가도 다시 그의 상상속에서나 이루어진 규칙을 어기고, 죄책감에 빠지고, 후회를 하는 진흙탕같은 악순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흔히들 스스로를 터프하다고 여기는 타락한 사람들중 많은 사람들의 심리 상태이다. 그들의 심리를 정녕 잿가루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바로 그들의 머릿속에서 이상한 구조로 만들어져버린 윤리 코드에게 설득을 당하는 바람에 결코 얻지 못 할 대상(어머니나 어머니를 대체해줄만한 사람)을 향해 헌신하는 자세이다. 이렇게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발현된 상상속 모성애의 피해자들이 행복으로 향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하는 것은 인생 초기에 생긴 신념들과 사랑의 형식(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 어떻게 보면 - 흔히들 생각하는 ‘죄'의 개념과 정반대에 위치해있다. 그 안에는 한 개인이 스스로를 존경하며 남들도 같은 정도로 자신을 존경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어느 정도까지의 나르시시즘은 문제없이 평범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정도가 심각해졌을 때의 나르시시즘은 썩은 악취가 나는 악(惡)으로 변한다. 많은 여성들이, 특히나 부유한 사회에 속하는 여성들이라면 더더욱이, 사랑을 얻을 수 있을만한 우물은 완전히 말라비틀어져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욕망은 세상 모든 남자가 그들을 사랑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경로를 바뀌기 시작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을 지닌 여성은 이성이 당연히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더이상 남성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게 되어버리며 여성의 경우보다는 적지만 남성에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중에 하나로는 뛰어난 소설, ‘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가 있다. 혁명이 일기 직전, 프랑스 귀족들끼리 벌이는 불륜을 그려낸 이 소설의 주인공은 위에 설명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종류의 인간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공허함이 최고조에 달했을 당시에는 더이상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자리잡지 못 했을테고, 그만큼 결과적으로 사랑을 통해 진정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확률도 현저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사랑 뿐만 아니라 다른 관심사들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도 매번 실패할 것이다.
위대한 화가들에게 바치는 오마주를 인상깊게 본 나르시시스트를 예로 들어보자. 이 사람은 훗날 예술계 학생이 될 수야 있겠지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그에게 단순히 그가 목표로 하는 이미지로 도달하기까지 도와주는 수단일 뿐, 그리는 기술은 절대 그의 흥미를 돋구지 못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피사체도 그의 눈에선 자신과 연관지어서만 보일 것이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실패와 실망으로 이어질 것이며 그가 바래왔던 환호 대신 그를 찾아오는 건 오로지 조롱뿐일 것이다. 이 원리는 자신을 영웅적인 여자라고 일컬으며 글을 적는 작가라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한 분야에서 진정한 성공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그 분야와 그 분야에 관련된 것들을 향한 진심어린 관심이 묻어나야만 한다. 성공적인 정치인들이 하나둘씩 비극적인 행보를 걷는 이유는 그가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 자치권을 향해 지니고 있던 관심이 점점 나르시시즘으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배울 점이 없으며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오직 어떻게 하면 세상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줄 것인지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절대 성공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가 물질적 성공을 거머쥐게 된다고 한들 그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능이란 본래 결코 자신만을 돌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데에도 불구하고 나르시시스트들은 - ‘죄인' 유형의 인간들이 그러하듯 -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잣대를 통해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야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원시인이 뛰어난 솜씨의 사냥꾼이라고 불리우는 데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겼을지 몰라도 분명 그는 그와 동시에 사냥하는 과정마저 즐겼을 것이다. 공허함이라는 것은, 일정 수준이 지나면, 모든 활동에 들어있는 즐거움을 없애버리며 그 결과로 피할 수 없이 지치고 지루한 상태로 개인을 이끌고 간다. 그 뿌리는 보통 부족한 자존감에 있으며 그 해답은 스스로를 존중하는데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세상을 외적인 대상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며 이루어낸 성공적인 활동들을 통해 건질 수 있다.
과대망상증 환자(megalomaniac)들은 나르시시스트와 다르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보다는 더 많은 힘을 지니는데 관심을 두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대상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 카테고리에 속하는 이들 중에는 대부분의 광인(狂人)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소위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들'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있다. 공허함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닌 이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물론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감정 또한 현실성을 잃은 채 발현되거나 너무 과할 정도로 커졌을 때 비로소 문제가 된다. 상태가 심각해지면 주체자는 불행하거나 스스로를 바보같이 여기는 (아니면 둘 다인) 지경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를 왕이라고 여기는 자가 행복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느끼는 행복감이 결코 탐낼만한 종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리적으로는 알렉산더 대왕도 광인의 상태와 일치했지만 단지 그에게는 광적인 꿈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 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의 업적이 쌓이면 쌓일수록 커져만 갔던 그만의 개인적인 소망을 이루지는 못 했다. 그가 세상에 알려진 지배자중 가장 위대한 인물임이 명백해지자 그는 스스로를 신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과연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을까? 그의 알콜중독, 걷잡을 수 없이 화를 내는 경향, 여성을 아래로 보려는 성향, 그리고 스스로 신격화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가 결코 그렇지 못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전세계 사람들을 희생시키거나 세상을 단지 자신의 거대한 에고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여기더라도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는 공간이 있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약간의 정상성이 있다고 한들 대개 과대망상증 환자들은 엄청난 양의 수치심으로 통해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보조금을 받아 겨우 학교를 다니던 나폴레옹은 귀족 집안의 자제들인 학우들에게 시달리며 열등감을 느껴야만 했다. 망명자들의 귀국을 허락했을 때 그는 과거에 그를 놀렸던 사람들이 그를 향해 엎드려 절을 하는 모습을 보며 만족감에 젖을 수 있었다. 오, 신이시여! 하고 생각하며 그는 잠시나마 만족할 수 있었겠지만 그의 탐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비슷한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러시아의 군주를 없애려고 했으며 이를 통해 결국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되기까지 했다. 인간은 본래 전지전능할 수 없기 때문에 권능만을 쫓아온 삶은 언젠가 극복할 수 없는 상대를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타당하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이지 못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야만 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이 사실을 말해준다 한들 진실을 전달한 자들의 목숨은 온전치 못할 것이다. 정치적인, 그리고 정신의학적인 의미에서의 억압은 그렇게 서로 관련이 있을 수 밖에 없게된 것이다. 정신의학적인 억압이 발동한 두뇌를 지닌 이에게 진실된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권력이 그에게 약간의 행복감을 쥐어주었을 지는 몰라도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그의 인생이 궁극적으로 산산조각 나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렇다시피 불행의 심리적 원인은 많고도 다양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보통 불행한 사람이라고 불리우는 이들은 평균적으로 다들 느껴봤을 만족감이 결핍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한 가지 가치를 다른 가치들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세워 그를 통해서만 만족을 느끼려고 하며, 그를 통해 한쪽으로만 치우친 삶을 살게 된 사람일 것이다. 이 모든 요소가 다 합쳐지면 결국 결과와 업적에 집중할 뿐, 그 곳까지 가는 길에서는 아무 즐거움도 찾지 못 하는 사람으로 변해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에는 이보다 더한 단계까지 있다는 사실을 일상 속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현대 사람들은 내적 균형이 너무도 붕괴되었는지, 더이상 만족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그 대신 시선을 분산시켜줄 대상이나 현실을 인지하지 못 할 수 있도록 도와줄 대상만을 찾고 있다. 그럴 경우에 그 사람은 ‘쾌락'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며 스스로의 정신을 보다 덜 살아있는 상태로 만듦으로써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술에 취하는 행위를 예로 들어보자. 술을 마신다는 것은 일시적 자살행위와 같다. 술을 통해 얻게 되는 행복감은 해봤자 부정적일 뿐이며 그마저도 불행을 잠시나마 멈춰줄 뿐이다. 나르시시스트와 과대망상증 환자 집단의 인간들은 행복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이 행복을 얻기 위해 밟는 과정이 결코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을 술에 중독된 자와 비교해보면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더 잘 전달될 것이다. 술에 취한 상태를 갈구하는 자는 머릿속을 비우는 것 말고는 어디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럴 경우에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일은 바로 그에게 행복이란 쟁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일러주는 것이다. 숙면을 취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행한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상태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아마 그들의 자부심은 꼬리를 잃어버린 여우가 느끼는 그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정녕 그렇다면 그의 상태를 낫게 해주기 위해선 그에게 새로운 꼬리가 자라날 수 있다고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에 세상에 행복을 찾는 방법이 있음을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계속해서 불행한 상태에 남는 것을 선택할 인간은 굉장히 적을 것이다. 물론 후자를 택할 사람들이 분명 있을거란 사실도 부정하진 않겠지만 그들의 수는 너무도 적어 중요한 문제로 여길 필요도 없는 정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글의 독자가 불행보다는 행복을 선택할 것이라고 믿고 글을 쓸 것이다. 내가 독자로 하여금 위에 말한 내용이 사실인지 일깨워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이러한 노력은 언제나 세상에 득이 된다면 득이 되어주지, 해가 되지는 않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원문 출처: 자유 이용 저작물인 버트랜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The Conquest of Happiness'의 제1 장을 번역했습니다. 원문을 구할 수 있는 링크를 여기에 남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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