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을 생각하는 마음

2021. 6. 18. 22:53기록/그냥

최근 들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여러번 들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사'라는 과목의 기말 과제를 작성하면서 뭔가 속이 시원하다는 느낌도 들고 나는 무슨 과제도 이렇게 쓰고 앉아있나, 생각도 들어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처음으로 앞으로 종종 글을 적어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다른 블로그를 만들기도 뭐하니 우선 여기에 올려보긴 하는데 이게 맞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뭐, 하다가 별로 안 내키면 그 때 가서 지우거나 다른 데로 옮기면 되겠죠? 그럼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건강하세요를레히요,

오성진 드림

 

 

과정을 생각하는 마음



1. 글을 시작하면서

 

굉장히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한 열다섯 쯤 되었을 때 어느날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보니 베란다에서 담배를 태우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아버지 옆에 가보니 아버지는 한숨을 몇 번 쉬시고는 온가족이 미국에 가게 되었다고, 아버지께서 2년 동안 교환교수직을 맡게 되었다고 하셨다. 굉장히 좋은 소식이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하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친구들, 선생님들, 부모님 친구분들 모두 아빠를 잘 둬서 이렇게 귀한 기회를 얻게 되어 좋겠다고 말을 해줬고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슬펐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들어도 이게 정말 그렇게 좋은건가, 싶은 마음이 들었고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까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이 과연 좋은건지 안 좋은건지 도무지 정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따라서 간 캔자스라는 미국의 주는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교회 사람들, 학교 친구들, 선생님들 모두 한국에서 흔히 들었던 무시무시한 인종차별 이야기나 미국에 관한 괴담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 같이 우리를 대해줬고 지금까지도 그 점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버지가 교환교수직을 맡으신 대학교에서 ‘컨버세이션 파트너'로 지정해준 클라우디아(Claudia)라는 나이든 백인 미국 여성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며 영어 실력을 늘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셨고 나는 학교 친구들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뭐, 여하튼 워낙에 커다란 계획부터 만들고 하나씩 이행해가기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은 미국내 51개주(50개였나?)를 다 다니기(비록 지키진 못 했지만 38군데나 다닌 걸 생각해보면 꽤 대단한 기록이 아닐까 싶다), 50명의 친구집에 놀러가기, 등등 여러가지 일들을 우리의 힘으로 꾸려 각자의 방식대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갔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냐면 아버지의 교환교수직 계약기간인 2년이 지났을 때 나는 친구 부모님과 학교측에 허락을 받고 친구집에 살면서 미국에서 대학교 과정까지 수료받기를 원했다. 그렇게 지내면 어마어마한 학비도 미국인이 내는 만큼만 내도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어떤 혜택들이 있을지 어린 뇌를 골똘히 굴리며 고민했던 것 같다. 여하튼 부모님의 동의만 있으면 최종적으로 결정이 이루어질 자리가 마련 되었고 그렇게 학교측 대표, 친구 부모님, 우리 부모님과 내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왜인지 모르게 작은누나가 따라왔었다. 학교측 대표분은 절차를 알려주시고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차근차근 설명해주셨다. 

      아, 그리고 같은 시기에 다른 일도 있었는데, 한국으로 돌아가야하니 2년동안 쌓인 짐들을 하나씩 처리하다가 우리가 키우던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할지 결정할 때가 되었다. 아버지는 지금껏 친하게 지내온 클라우디아에게 고양이를 맡겨야겠다고 하셨고 평소 제대로된 행동보단 말뿐인 클라우디아가 못 미더웠던 나는 여러모로 반대하고 싶었지만 당시 내 목소리가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도 좋은 시절이었지만 정말 마지막 한 달만큼은 살면서 처음 마주한 크나큰 결정들이 몇 개나 연달아 생긴 바람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처음 갈 때와 같이 마음이 복잡했다. 

 

2. 행위자 연결망 이론? 실증주의? 상대주의?

 

행위자 연결망 이론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 그 뒤에 의식적으로 심어진 의도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 계속해서 변하는 상호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시선으로 이론을 다루는 방법적 접근법이다. 제각기 다른 사회 연결망이 각자 얼마나 다른 상호작용을 보이며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유지되는지를 탐구하는데 이 접근법의 의의가 있기 때문에 행위자 연결망 이론은 어떤 현상의 결과를 설명하기 보다는 그 과정을 묘사하는데 더 강점을 보이는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하나의 현상을 볼 때, 오로지 과학적으로만, 또는 오로지 사회적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그 중간에 서서 즉, 사람과 사람이 아닌 모든 것들(“Actors”)이 각각 평등하게 특정 현상에 변화를 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는 접근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론은 실증주의에 가까울까, 아니면 상대주의 쪽에 가까울까? 실증주의는 ‘세상에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입장을 취하며 모든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결론을 내는데에 강점을 보이며 이론을 실험해보거나 일정 패턴을 잡아내서 특정 매개체의 다음 행방을 예측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관점이다. 그에 반해 상대주의는 모든 것들은 연결되었다고 보며 증명할 수 없는 것에도 그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여 결론보다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또 그 향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영향들이 자리잡았는지를 중점적으로 보기 때문에 각 구성원들이 맡은 역할이나 그 정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필요충분조건적인 관계에 있다고는 볼 수는 없더라도 양쪽 접근법 둘 다 그 과정과 구성원에 집중한다는 점이 존재한다는 점을 통해 행위자 연결망 이론은 실증주의보다는 상대주의쪽에 더 가까운 이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백신,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COVID-19)이 2019년 12월 31일에 최초로 발단하고나서 1년 하고도 6개월이 되어가고 있는 현재, 우리에게 가장 이목을 끄는 주제는 단연코 백신이다. 어렸을 때만 해도 SARS, 조류독감, 수두, 등등 그 어떤 문제가 있어도 일주일에서 길어야 한 달 정도 긴장하는 분위기속에서 지내다가 짧은 시간 내로 곧 그에 대항하는 백신이 생기거나 아니면 알아서 잠잠해지며 모두가 안심할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라는 무시무시한 세계적 전염병만큼은 긴 시간 동안 전세계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통째로 뒤엎어버렸다. 한참이 지나도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와중 올해 초, 미국의 모더나와 영국의 아스트라 제네카의 개발이 발표된 1월 5일부터 끊임없이 현재까지 하루하루가 다르게 백신의 개발, 실험 진전도, 접종 가능성의 여부, 그리고 무엇보다 각자 다른 백신간의 우위를 재는 소식들로 넘쳐나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번역가가 되기 위해 개인적으로 연습을 하며 그렇게 번역한 글들을 올리는 블로그를 운영중이다. 위와 같은 현실을 바라보면서 과학사 수업을 들은 이번 학기 동안 나는 의식적으로 블로그에 현재 백신과 관련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과 연관된 글을 여러 개 번역해서 올렸고 그를 통해 내가 행위자 연결망 이론과 상대주의의 필요성에 대해 느낀 바를 이야기해보자 한다. 우선 제일 연관성이 낮은 “미치광이 의사들: 19세기 미국 속 사디즘과 고통에 관하여'라는 글을 먼저 소개해보겠다. 이 글에선 과거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마취제가 생기고 난 전후로 고통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것"에서 “에테르와 이산화질소가 있다면 피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면서 사람들이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얼마나 큰 변화가 왔는지에 관한 글이었다. 더이상 수술할 때나, 치료를 받을 때 억지로 고통을 견뎌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19세기 사람들은, 더이상 고통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않아도 됨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그 원형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으로 극대화 시키면서 소설 속이나 구전되는 이야기 속에 표현하고 스스로를 공포속으로 몰아넣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번역본, “흑사병과 페트라크: 역병의 시대의 사랑, 우정, 죽음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에서는 백신이 개발되기 전 보다도 훨씬 더 전, 그러니까 백신의 개념조차 없던 14세기의 유럽, 그중에서도 흑사병이 나돌던 시대를 살아낸 학자이자 시인인 프란체스코 페트라크(Francesco Petrarch)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견뎌내야만 했던 당대를 그려냈다. 백신이 없던 14세기 유럽, 페트라크는 위험을 무릅쓰고 고집을 부리며 자유로이 원하는 곳을 여행하며 학문에 정진하는데도 병에 걸리지 않았고 오히려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며 병에 걸리길 꺼려하던 친구들과 가족들의 죽음이 잇따라 생겼다. 이를 통해 암흑과 같은 삶을 살아야만 했던 그는 당시 그가 친구와 가족들 처럼 사랑하는 이들과 공포의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끝까지 보관하고 편찬해냈고 이 기록은 지금에도 유의미하게 작용하며 만약 백신이 없었더라면 우리 전인류가 겪어야만 했을 대재앙을 조금이나마 예상해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마지막으로 다른 번역본 “‘짐승의 자국': 조지 왕조 시대의 영국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백신 반대 운동”에서는 앞의 두 번역본에서 뽑아낸 두 가지 결론, 즉 사람들의 두려움과 현실 사이의 차이와 전염병의 잔혹성, 둘 다 담아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번역본은 백신의 가장 첫 번째 발현, 기원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가 꽤나 흥미롭다. 우두와 수두가 혼합적으로 발병되던 당시에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라는 의사는 수두보다 훨씬 약한 우두를 미리 개인에게 접종시키면 그보다 강한 수두에 대한 면역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우두 백신(여기서 백신, 우두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Vaccine은 라틴어로 ‘소'를 의미하는 Vacca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을 접종받을 것을 강하게 권유하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각종 민간요법, 내지는 아무런 치료도 되지 않는 방식의 치료법을 주장하던 의사들과 언론인들이 이를 통한 이득을 보고 있던 터라 사람들에게 우두를 접종시키려는 에드워드 제너를 “시대의 악마"로 포장하고 우두를 접종 받으면 모두 소처럼 변한다는 말도 안 된다는 논리로 백신 이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우두를 접종 시켜본 뒤에 결론을 낼 수도 없었거니와 당시 기술로는 도무지 반박을 못 할 정도로 깔끔한 결론을 낼 수 없었기에 에드워드 제너는 자신의 주장이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방해하려는 세력과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여차저차 시간이 지나고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난 뒤에서야) 상황을 뒤늦게나마 파악한 의회가 모든 국민들에게 우두를 의무적으로 접종받으라는 법안을 제출하면서 사태는 마무리를 맞게 된다. 

      위 사건을 통해 우리는 백신의 재미있는 유래 뿐만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 수 있다. 그건 바로 제아무리 어떤 과학의 발견이나 기술의 발전이라 할지라도 결국엔 정보를 쥐고있는 사람들의 역할과 또 이를 수용하는 대중들의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 어쩌면 이는 현재에 떠돌아다니는 각종 백신 제약회사의 주가와 관련된 소식, 서로를 비방하는 사태, (실질적으로) 나라간의 순위를 나뉘어 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백신의 분배와 같은 일 때문에 벌어지는 혼란과도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오늘만 해도 얼마전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고 사망하게 된 군인에 관한 기사가 한 번 더 눈에 띄었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백신을 맞고 있는 실정을 고려해본다면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측을 향해 가지고 있는 신뢰도가 떨어졌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다할만한 신빙성을 여전히 심어주지 못 하고 있는 상대측으로 구성된 형세를 짚어낼 수 있으며 이 현상을 에드워드 제너가 만약 하늘에서, 혹은 저 밑에서, 보고 있다면 억울해하며 땅을 칠지도 모를만한 일이다. 

 

 4. 행위자 연결망 이론 , 실증주의, 상대주의, 그리고 백신

 

그렇다면 이를 앞서 언급된 행위자 연결망 이론, 실증주의, 그리고 상대주의를 통해 보면 어떨까? 그것은 바로 실증주의와 행위자 연결망 이론 사이에 어떻게 해도 떨어뜨릴 수 없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에드워드 제너가 겪어야 했던 일을 통해 이를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1) 우두(Cowpox)가 있는 시대에 더 심각한 질병인 수두(Smallpox)가 발병했다. (원점) 2) 비록 정보나 기술이 부족한 시대였지만 에드워드는 자신의 최선을 다해 실증적으로 우두와 수두 사이의 링크를 찾아내고 이를 통해 수두의 해결책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다 (실증주의); 3) 그렇게 나온 결론은 다른 이익집단에 의해 폄하되고 이러한 내용은 대중에게 혼란을 일으켰다 (행위자 연결망 이론); 4) 이를 통해 해결책이 제시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죽어나가야만 했다. (원점 회귀 및 상황 악화); 5) 충분한 증거는 없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의회는 실증적인 실험을 통해 결론내려진 에드워드의 실험결과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수두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실증주의 & 행위자 연결망 이론); 6) 사태는 많은 피해자를 부른 뒤에야 종료되었다. (결론) 이와 같이 기술의 필요성이란 사회적 현상에 의해 증대하며 이를 통해 나타난 기술은 사회적, 그리고 비사회적인 무수한 연결망 속에서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서 그 효과가 실제적으로 발현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아무리 기술력이 좋고 그 효율성이 확실하더라도, 그것을 같은 세계의 구성원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사태를 두고 누군가 “그렇다면 언론의 불명확한 정보제공과 사람들의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고치기 위해선 실증주의적인 실험을 통해 이를 고치면 될 것 아니냐"는 반론을 한다고 한들 그 이후에 사회원들을 통해서 (아니면 행위자 연결망 이론의 더 근원적인 면으로 들어가서 백신과 같이 ‘인간이 아닌 대상’의 양상을 통해서) 충분히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의 실효성은 결과적으로 사회망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 이러한 비교가 가당키나 하다면 -- 실증주의와 행위자 연결망 이론(또는 상대주의)간에서 어느 접근법이 옳냐고 하는 질문은 “담배는 몸에 해롭다"와는 논제와 “실제로 피지 않으면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사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논제중 어떤 편이 더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냐는 질문으로 정리될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다행히)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인류에게는 후자의 결론이 훨씬 더 가치있는 답안이라고 볼 수 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결국 아무리 맞는 논리여도 각자의 경험에 맞닿을 수 있게끔 요밀조밀 먹을 수 있는 크기로 깎아서 테이블 위에 올려놔야 된다는 것이다.

 

5. 결론

이러한 결론(‘결과적으로 연결망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행위자 연결망 이론에 더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살고있다’)을 내릴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 다른 자료로는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던 중 발견한 “Darwins’ take on Relativism and Science”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도 있었다. 해당 영상에서 리차드 도킨슨은 몇몇 고등학생들과 함께 시간을 가지며 그들이 가진 과학 상식 수준을 파악하고 크게 실망하여 많은 선생님들이 학생들 개개인의 종교적 가치관이나 집안에서의 교육관으로 인해 어차피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이론들(ex.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치기를 회피하고 상대주의적으로 접근하여 아이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 현실을 크게 비판했다. 이 과정에서 리차드 도킨슨은 직접 그 아이들의 과학 선생님들을 찾아가 도대체 왜 그렇게 가르치냐고 질문하며 공격했지만 선생님들은 죄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각자의 사정을 말할 뿐이었다. 영상 속 선생님들의 표정을 보며 나는 ‘우리도 당신이 맞다는 건 익히 알지만 당신은 이 학생들을 가르쳐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겪어야만 하는 매일매일을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실 수 없으실거예요'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다, 실로 연구나 증명, 그리고 실험은 모두 실증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테지만 보다 큰 틀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이를 전달함과 받아들임에 있어 상대주의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옳은 정보라 한들 이를 고려하지 않고 억지로 먹이려는 식으로 모두에게 전달하다보면 결과적으론 더 안좋은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온전히 실증주의적으로 연구된 결론을 두고) 상대주의적으로 접근하여 개별적인 그룹에게 일일이 전달하고 최대한 효율적이고 좋은 결과를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6. 글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다시 원래 하던 열일곱, 열여덟 그 사이의 시절, 내가 미국에서 보내야 했던 마지막 한 달간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결과적으로 둘 다 모두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내가 미국에 남게 될 지 말지를 두고 최종 결정권을 가진 중간측 사람들은 양측에서 필요한 서류와 동의가 갖춰진 상황임을 확인한 뒤에 드디어 내가 의사를 밝힐 차례가 되었다. 모두가 내게 의견을 기다리고 있던 중 잠시동안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갑자기 조용히 있던 작은누나가 본인의 주장을 밝히며 왜 내가 미국에 남으면 안 되는지, 이 모든 일이 왜 터무니없는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원래 수줍기도 한 탓도 있겠지만 워낙에 당황해서 나는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 했고 그 귀중한 기회는 그냥 맥도 없이 지나가버렸다. 그 후로 스스로에게 아무 힘이 없다고 느낀 나는 마치 한국에서 내 의사와 관계없이 미국으로 가게 됐을 때와 같이 상황의 흐름에 전적으로 내 몸을 맡기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클라우디아에게 고양이를 맡기겠다는 아버지의 말씀에도 그냥 알겠다고 하고 넘어갔다. 그녀의 어영부영하는 태도나 여러 면을 보았을 때 사랑하는 고양이를 맡기기에 못 미더운 사람이었지만 너무도 힘이 빠진 터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모든 일이 흘러간 것이다. 그리고 같이 살기로 약속했던 친구와 울면서 작별인사를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지낸 지 육 개월 정도가 지났을까, 부모님은 클라우디아의 소식을 듣기 위해 그녀에게 전화를 했고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내 고양이 맥스가 차에 치여 죽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고양이를 안에서 키우지 못 하고 밖에서 키우되 키우던 강아지 사료 따위나 몇 번 가져다주며 지내던 차에 갑작스럽게 사고가 생겼다는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전혀 “갑작스럽”지 않고 과연 그렇게 키운다면 그 어떤 고양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키우면 상당히 위험하겠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자리에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힘이 빠진다거나 무력감에 아무 말도 못 한 것이 아니었다. 내 안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분노가 끓어오르며 다시는 남이 정해주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나의 주장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 하고 일을 마치는 일은 없도록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 남기 보다는 아직은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 나이", “비행기를 태우고 데려온다고 한들 한국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기 힘든 점", 등등의 굉장히 논리적이고 옳은 말이더라도 표현하는데에 있어서 충분한 설명과 태도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기억과 경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얼만큼 논리와 증거를 갖춘 정보라 할지라도 전달과정에서 매우 신중하게 고려하는 마음이 필수적으로 자리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나는,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뭐라고 하더라도, 실증주의론 같이 논리를 내세우는 방법론보다는 ‘행위자 연결망 이론'이나 ‘상대주의' 같이 결론보다 그 과정의 중요성을 절대 가볍게 여기지 않는 쪽의 손을 들어주며 살게 되었다.







참고자료



  1. AJMC(https://www.ajmc.com/view/a-timeline-of-covid-19-vaccine-developments-in-2021), AJMC 직원일동, A Timeline of COVID-19 Vaccine Developments in 2021

 

  1. 티스토리(https://generallylucky.tistory.com/), 오성진(본인), 번역 연습장 (블로그 이름)

 

  1. The Public Domain Review(https://publicdomainreview.org/essay/sicko-doctors/), Chelsea Davis, Sicko Doctors: Suffering and Sadism in 19th-Century America

 

  1. The Public Domain Review(https://publicdomainreview.org/essay/petrarchs-plague/), Paula Findlen, Petrarch's Plague: Love, Death, and Friendship in a Time of Pandemic

 

  1. The Public Domain Review(https://publicdomainreview.org/essay/the-mark-of-the-beast-georgian-britains-anti-vaxxer-movement/), Erica X Eisen, “The Mark of the Beast”: Georgian Britain’s Anti-Vaxxer Movement

 

  1. Youtube(https://www.youtube.com/watch?v=ohYGd2sSV5w), igytsiycm(영상 올린이의 ID), Dawkins' Take on Relativism and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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