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28. 01:15ㆍ기록/그냥
최근에 걸으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 입으로 내뱉은 문장 하나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가치가 많이 섞여있을수록 좋겠지만 우선 편의를 위해 “오늘 저녁에 먹은 BLT샌드위치는 맛이 있었다"라는 문장을 사용해보겠습니다. 이 문장에는 발화자가 오늘 저녁을 먹었다는 사실, 당시 먹은 음식이 BLT샌드위치라는 사실, 그리고 화자가 그를 맛있다고 생각한다는 의견(및 사실)이 들어가 있습니다. (저는 논리학이라고는 개론 밖에는 들어보질 못 해서 제가 올바르게 용어들을 쓰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위에서 처럼 분석될 수 있는 이 문장은 사실 다양한 용도로 쓰일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의 발화자, A는 5살 여자아이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낳은 순간 인생을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생전 해보지 못한 만큼의 사랑을 아이에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자신의 죽음으로 다른 이의 행복과 안정이 보장된다면 A의 아버지는 몇 번이고 그렇게 할 마음입니다. 하지만 표현을 하지 못 하는 탓일까요, 아침 일곱 시에 나가서 저녁 아홉 시까지 일을 하다가 집에 돌아오는 탓일까요, 정작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매우 적다는 사실에 문득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이를 위해 일을 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미래 아이의 학비로 쓸 명목으로 통장을 만들었고 월급의 반 정도가 매달 그 통장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훌쩍훌쩍 크는 아이를 보며 지금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굉장히 커다란 것을 놓쳐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남자는 주말마다 아이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루는 떡볶이를, 다른 날에는 티본 스테이크를, 어떤 주말에는 김치전을 만들어 주며 아이와 행복한 주말의 연속입니다. 이렇게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그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아이는 만들어준 음식이 맛이 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멋쩍은 웃음과 함께 음식을 남긴다는 점, 그리고 음식이 맛이 있을 때에는 음식 이름을 말하며 맛있었다고 그에게 칭찬을 남긴다는 점입니다. 똘똘한 아이는 자신이 음식에 대해 좋은 평을 하면 아빠가 언젠가 다시 음식을 해준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달았기 때문이죠. 주어진 상황 속에서 A가 말한 “오늘 저녁에 먹은 BLT샌드위치는 맛이 있었다"는 과연 본 문장 속에서 유추할 수 있는 의미만 가지고 있을까요?
또 저기, 저쪽 구석에는 발화자 B가 있습니다. 발화자 B에게는 애인이 있습니다. 삼 년간 연애를 지속했지만 둘 사이에는 아직까지도 남들이 말하는 권태기라던가 흔한 말다툼조차 없었습니다. 둘은 서로를 각별히 여기며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최근에 B는 회사 일을 그만두고 자신이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사회에 자신이 내놓은 상품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굳건하게 믿으며 큰 희망을 품고 있지만 현재로써는 세금 문제부터 운영 문제까지 모든 일이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시험을 준비하며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애인에게 자신의 이러한 상황을 말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세 달 후에 그녀의 시험 결과가 나오면, 그 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보려고 합니다. 그 때 까지 그는 애인에게 회사에서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으며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습니다. 그로서는 그녀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안겨주는 것 보다 힘든 일은 없을테니까요. B의 애인분이 공부를 하다 저녁 시간에 잠깐 짬을 내서 그에게 전화를 합니다. 오늘은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는 둥, 매일 가는 도서관에는 오는 사람이 늘 똑같다는 둥,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던 그녀는 B에게 “그나저나 오늘 저녁엔 뭐 먹었어?”라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B는 “오늘 일이 많이 쌓여있어서 BLT샌드위치를 먹었는데 양도 많고 너무 맛있어서 좋았어"라고 답합니다. 거짓말로 얼룩진 이 문장은 A라는 소녀가 문장을 뱉었을 때와는 조금 다른 색깔이 묻어납니다. 이렇게 같은 문장이더라도 상황에 따라, 또 말하는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에 따라, 그 안에 묻어나는 의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A, B, C, D, E, F, G, … 제각기 다른 의미를 띄는 똑같은 문장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자, 그러면 “오늘 저녁에 먹은 BLT샌드위치는 맛이 있었다" 뒤에 딱히 다른 의도가 없다면 어떨까요? 말 그대로 다른 날이 아니라 오늘 저녁에, BLT샌드위치를 먹었고, 발화자 생각에는 그 샌드위치가 맛있었다는 뜻, 그 자체일 경우에 말이예요. 이러한 문장을 ‘Z문장'이라고 부르기로 해봅시다, 그냥 저희끼리요. 제 생각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A, B, C, 등등의 의미로 한 문장을 뱉어놓고 남이 추궁을 하면 언제든지 ‘Z문장'뒤로 숨어버린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 새로이 따낸 기회를 자랑하기 위해 다른 이에게 "아니, 이런 기회가 생겨버렸지 뭐야. 요즘 너는 어때? 잘 지내?"라고 말을 하고 이를 들은 상대방이 지금 내 상황에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너무한 것 아니냐고 두 눈에 불을 켜고 따진다면 자랑하려고 말을 꺼냈던 사람은 "단순히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고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본 것 뿐인데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하고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보이는거죠. 이렇게 보면 ‘Z문장’들은 너무도 견고해서 마치 든든한 황금방패처럼 보입니다. 우회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말하려고 했다가도 상대방이 추궁을 하면 바로 ‘Z문장'을 들먹이며 그 뒤로 숨어버리면 상대방으로선 더 이상 쪼잔하게 보일 각오 없이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을테니까요. 그러면 언제든지 ‘Z문장'을 빌미삼아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페이스로 이루어지는 대화가 아니라면 언제든지 회피를 해버리려는, 쉽게 말해 말을 하면서 상대방이 반대를 하거나 이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나누며 토론을 시작할 수 있을거라는 가정이나 각오가 없어서 워낙에 같잖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러한 화법은 결국 화자와 청자 사이의 거리를 늘리고 늘리다가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도 지독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휴, 오늘도 안전하게 화낼 일 없이 대화를 마쳤군' 하는 사이 상대방은 일찌감치 멀어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 행성 위에 의도치 않게 태어난 이상 다같이 잘 지내며 잘 살면 좋을텐데 그렇지 못 하는 것보다 최악이 있을까, 싶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말이죠. 그러면 모든 ‘Z문장’들은 피하는게 나을까, 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아무 의도 없이 온전한 마음을 담아 ‘Z문장’들을 내뱉는 사람들을 제 눈으로 여러번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무의식에는 거짓말 탐지기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장치가 있는 노릇인지, 실제로 화자가 말하는 바와 그 사람의 마음이 맞닿아 있을 때 만큼 쉽게 안심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제 경험상, 딱히 이렇다 할 만한 설명 또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그게 진심일테고 만약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경우에는 조금 주의깊게 해석을 해보는게 최선이겠죠. 뭐, 물론 모두 다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기에 정말로 이게 사실일지 아닐지는 저로서 알 수 있는 영역의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저는 이를 진심으로 믿기 때문에 농담을 하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최대한 말하는 내용에 다른 의도가 묻어나지 않게끔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데 제가 아는 몇몇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이를 행하며 살고 있다는 점에 종종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그들의 태도를 배우고 싶어합니다.
여하튼 돌아도 너무 돌아버린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걷기'를 주제로 글을 쓰기 위해 지난 며칠동안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렸지만 도무지 글에 제 진심이 묻어나질 않아서 다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걷는다는 행위만큼 제 인생에 들어와줘서 감사하고 뜻깊은게 잘 없었는데 이에 대해 진심을 다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이에 대해 글을 쓴들 무슨 소용이겠냐는 생각에 힘이 빠졌습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매일같이 ‘Z문장’과 비스무리한 말들만 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저로서도 그렇게 하기가 영 힘듭니다. 애초에 이를 문제삼고 불만스러워하는 것 부터 제 안에 이러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진심으로 걷는다는 행위를 너무도 좋아하게 된 탓에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한 문장 한 문장 진심을 담아 적고 싶었습니다, 사실이 아닌 내용을 꾸며내거나 필요 이상으로 창피한 부분을 드러내지 않고 말이죠. 아마 앞으로도 진심과 가장 가까운 말들을 뱉을 수 있게끔 노력하겠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 날이 올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저번 서문에도 적었던 것 같지만 저의 생활에는 본래 칭찬해줄만한 부분이 잘 없었습니다. 매일 술을 마신 뒤에 잠에 들었고, 다음날 느즈막한 시간에 일어나 대충 샤워를 하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 해야할 일들을 해치웠죠.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 다시금 쉰답시고 맥주 네 캔을 차례대로 벌컥이며 이번에는 조 로건이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 또 뭐라고 속시원하게 이야기 했는지 보여주는, 츄라는 아이돌이 얼마나 귀여운 사람인지 보여주는, 침착맨이 또 어떤 헛소리를 했는지 보여주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공연 중 잠깐 실수한 허비 핸콕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보여주는, 손흥민 선수가 이번엔 몇 명을 제치고 골을 넣었는지 보여주는, 내용보다는 제목만 머리에 남는 영상들이 쑤욱, 쑤욱, 눈앞을 지나가게 두었습니다. 어쩐지 허한 기분이 들었지만 분명히 다음 날 일어나면 술에 젖어 피곤에 찌든 몸으로도 나름의 최선을 다해가며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나씩 해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죄책감과 정당화가 반복되던 사이, 머릿속에 이러한 감정들을 처리하는 기관에 문제가 생겼는지 어느 날부터 나날이 좋지 않은 감정들이 계속해서 쌓여가기만 했습니다. 체력이 깎이면 음식처럼 보이는 아무 물체나 먹어도 금방 뚜두둠! 하고 건강을 찾는 게임 속 캐릭터와는 다르게 현실 속에서는 어떠한 결심이 들어도 실제로 그에 맞는 해결책으로 고안해낸 생각을 실행하는 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마 일 년 정도 지난 것 같아요. 막판에 지난 학기 기말고사를 준비하던 시기에는 몸상태가 말도 아니어서 정말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 였습니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던 찰나에 할아버지 집으로 가서 열두시에 잠에 들고 일곱시에 일어나는 패턴을 배워왔습니다. 서울에 돌아와서 이 곳에서도 과연 패턴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잠에 들었고 다음 날 아침 알림이 울리기도 전인 여섯 시 오십몇 분에 잠에서 깼습니다. 그 날은 왠지 뭘 해도 될 것 같아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샤워도 하지 않고 모자만 걸쳐쓴 채로 물병 하나를 달랑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예전부터 아침마다 걸으면 환상적이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었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옮긴 건 처음이었던 탓에 모든게 낯설었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일곱시에도 붓기 없는 얼굴로 직장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른 시간에도 이미 열띤 토론을 나누시면서 앉아계시는 노인분들도 보였어요. 오오, 하면서 계속해서 걸었습니다. 사실 첫 날 기억이라고는 이게 다입니다. 뿌듯하기는 했지만 세상을 바꿀만한 참신한 생각이든다던가 갑자기 오랜 친구를 떠올리며 오늘은 꼭 오랜만에 연락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일거나 하는 기적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오늘까지도 매일 아침 걸었습니다. 매일 걸으면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혼잣말을 즐기며, 가끔은 비둘기와 눈싸움도 하면서 즐거운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별일없는 시간이 즐거운가 했더니, 이제껏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해보자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적이 잘 없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가서 땀을 흘리고 온다는 일은 제가 하루의 시작을 내 마음대로 보냈다는 생각을 안겨줍니다. 다녀와서 샤워를 하고 나갈 준비를 하고 저녁에 먹을 BLT샌드위치를 만들기까지 해도 원래 같았으면 아직 드르렁드르렁 자고 있었을 시간입니다. 근데 이것보단 아무래도 걸으면서 후라문ㅇ히ㅏ놈ㅇ히ㅏㅗㅁ니%!&!%&...
아무리 세세하게 적어보려고 해도 도무지 걷는 행위가 왜 저에게 정신적으로 도움이 되는지 설명을 하지 못 하겠네요. 아쉽습니다, 제 상황에 처해있던 사람들이 읽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글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예요. (이유는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겠지만 시간이 되실 때 한 시간만 걸어보시는 건 어떤가요?) 아무쪼록 한 번 쓰기로 마음먹은 글을 미루고 미루다보면 마치 머릿속에 열매가 점점 시들다 못해 썩어간 걸 너무 많이 봐온 탓에 이에 대한 글은 이제 그만 미루고 여기에서 마치는 걸로 하겠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자는 시간을 늦춘게 벌써 삼 일째라서요. 정말 좋은데 왜 좋은지 설명을 못 한다니 웃기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네요. 뭐, 여튼 저는 내일도 아침에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걸으면서 그동안 미뤄왔던 잡생각들을 꺼내다가 하나하나 마침표를 찍을겁니다. 어떤 건 제대로 마무리를 짓기도 하고 또 몇몇은 '이게 왜 여기에 있어?'하면서 버리기도 하겠죠, 쌓여있는 메일함에 메일을 하나씩 읽는 마음으로요. 제 머릿속 메일함을 비운 뒤에는 과연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할지, 또는 어떤 생각을 하지 않을지 기대가 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또 어떤 일을 할 때 저 스스로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지, 전달이 조금이나마 더 잘 될 수 있도록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그나저나 오늘 저녁에 먹은 BLT샌드위치는 맛있었습니다,
오성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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