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악! 서른까지 한시간 사십칠분!

2021. 12. 31. 23:21기록/그냥


현재 시각 밤 10시 13분. 서른까지 1시간 47분 남았다.
(으악!)


원래 이 글은 쓰지 않으려고 했다. 뭐, 물론 쓰자, 쓰자 생각이야 했지만 끝끝내 지독하게 안 쓸 것 같았다. 스물 아홉에서 서른이 된다는 일이 (그것도 한국 나이로!) 뭐가 그렇게 큰 일이라고, 하는 생각으로 넘어갈 줄 알았다. 그런데 하필 한 시간 남짓을 남겨두고 갑자기 조바심이 드는 바람에 몇 자 적어보기로 한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일몰, 그리고 한 해의 첫 일출은 많은 관심을 받는 데도 정말 간발의 차로 시간을 잘못 배정받았다는 이유로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올한해의 마지막 일출을 보러 집주변, 하늘공원에 올라갔었다. 그저께였는지, 어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와인을 왕창 마시고 다음날 힘이 들까봐 취기에 치킨을 시켜먹었는데 치킨이 너무 매워서였는지 어쨌는지 -- 정말, 정말 많이 매웠다 --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었다. 유튜브도 보고 인스타그램도 둘러보면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아무래도 다시 잠에 들기에는 그른 것 같아서 찌푸둥한 채로 일어났다. 왠일인지 약간 더부룩한 기운만 있을 뿐, 졸리거나 힘들거나 숙취가 있지는 않았다. 이런 적은 또 처음이어서 신기하단 생각에 우선 방에 전날 밤 더럽혀 놓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한숨이 나왔다. 방을 치우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서 치우는 동안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을까, 하고 매트리스 커버, 이불, 밀려둔 세탁물들을 죄다 끌고 세탁방에 쑤셔넣었다. 세탁물이 돌아가는 동안 집안 청소를 하고 세탁과 건조가 끝난 세탁물들을 가져와 전부 다 개고, 번역을 하고, 한 시간 가까이 낮잠도 자보고, 한 시간 산책을 다녀왔는데 그래도 낮 열두 시가 채 되지 않았었다. 대충 일찍 일어나서 해야할 일들을 해치운다는 것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하루를 보내는 짓인줄은 알고야 있었지만 이 정도로 대단한 일이라고는 직접 겪기 전까지는 잘 와닿지 않았던지라 기분이 좋으면서 묘하게 억울했다. 여태껏 그럼 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밤에 혼자 외로움에 빠져 술과 유튜브에 낭비를 했던건지, 그래서 고쳐먹기로 했다. 사실 “해보자!” 하고 허공에 크게 외치거나 인상을 찌푸리면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군, 큰일이야'라고 한 것 까지는 아니고, 그냥 정말 그렇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고 나니 일전에 방식이 정말 지저분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었다. 그래서 어제도 다섯 시에 일어나고, 오늘도 다섯 시에 일어났다. 오늘 다섯 시에 일어나서 일출을 본 일은 잠시 뒤에 이어서 하겠다.

사실 이런 식으로 이번 해에 배운 것들이 많다. 책에서 읽거나 영상에서 보지도 않았는데도 문득 문득 ‘이렇게 해오던 건 참 잘못한 거 였구나'라거나 ‘이건 참 괜찮은 것 같아’라고 생각하면서 삐뚤빼뚤 잘못들도 고치고, 자존감도 (정말 많이) 올라간 한 해였던 것 같다. 마치 인생이 사람이었다면, 인생 씨가 내게 다가와 “으이그, 못살아 정말. 아직 이런 것들도 못 챙겼어! 서른 될 건데 이거 안 가져가면 안 돼! 다른 사람들 보기 전에 얼른 주머니에 넣어!” 하고는 내 주머니에 내가 필요로 하는 지식과 태도가 적힌 종이들을 한웅큼 쑤셔넣어 준 기분이었다. 그래서 인생 씨에게 이 자리를 빌어서 당신이 뭘 해줬는지 알고 있다고,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올해 워낙에 느끼고 배운 게 너무도 많아서 나중에 늙은이 오성진이 혹시 이 글을 읽고 웃을 수 있게 몇 개 적어보자면 올해 나는;

1) 자존감을 많이 얻었다. 평소에 난 자조적인 투로 웃음을 만드려고 한다거나 최대한 나를 낮추려는 경향이 있는데 재밌게 잘 지내다가도 아직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몇 번 “아니야, 성진! 넌 참 멋져!”라고 외쳐주면 멍 해질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내가 그 정도로 나를 낮췄나?’ 하고 가만 생각해보기도 하고, ‘나는 정말 나를 싫어하나?’ 라고 고민도 솔직히 여러 번 했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 인생 씨, 이십 대의 마지막 선물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 문득 나는 그냥 내 방식대로 말을 하면서도 아직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그렇지, 사실 나 자신은 정말 많이 존중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익히 알고야 있었지만, 여태껏 ‘~런거 아닐까' 하는 식으로 넘어왔다면 올해에는 그냥 ‘파이는 원주율이다’라는 명제처럼 굳이 명확하게 그 원리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냥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나를 걱정하듯이 말하는 다른 사람들이 각자 조금씩 자존감에 있어서 조금은 결핍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들을 비꼬듯이 약올렸었는데, 아마 이건 또 이거대로 질려서 내년쯤 되면 나도 그들을 사랑하고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와주지 않을까, 기다려주지 않을까 싶다. 여튼 자존감이 올라가면서 표현을 더 많이 하게 되었고(순서는 거꾸로였을지도…?) 그로 인해서 조금 더 연결된 것 같아서 기분이 많이 좋았다;

2) 난처한 일도 여럿 있었다. 이건 훗날 늙은이 오성진 씨라도 잊지 못할 일들이니 굳이 적어놓지는 않겠다(굳이 키워드를 적자면 “오렌지”와 “돈”);

3) 정말 지독한 악취가 나는, 찝찝한 관계가 하나 있었는데 너무도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 사람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 같았고 그 사람은 무의식적으로만 상황을 즐기고 있을 뿐, 사실 그 사람도 지금 관계가 어느 정도로 안좋게 변질되었는지는 몰랐던 것 같아서 참 애매하고 싫은 관계였다. 아마 그 관계를 끊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그만!”을 외쳐야만 하는 상황이어서 어지간히도 질질 끌었던 것 같다. 이젠 끝. 물론 하하, 크게 웃을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이너스인 상황에서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점만으로도 나 자신을 충분히 칭찬한다. 용기 있었고, 잘 대처했다. 정말;

4)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다들 정말 고맙고 좋은 사람들;

5) 이제 졸업까지 내가 알기로는 6학점만 들으면 되어서 학교도 거의 끝난 바나 마찬가지이다. 이것도 뭐 이룬 거라면 이룬 것일 수 있겠다. 그래서 내년엔 뭘 할지 조금 생각해봤는데 몇가지 변화가 있을 건 확실할 것 같다. 다음 주 내로 내 스스로 정리야 하겠다만은 혹시나 까먹을까봐 여기에 적어놓자면 [a. 이사를 갈 것이다. 같은 은평구에서 지내시는 부모님 집에서 일 년동안 거주하면서 최대한 시간효율, 비용효율적인 삶을 살며 번역일로 돈을 버는 삼십대를 준비해보려고 한다. b. 담배를 끊을 것이다. 이건 스물 일곱즈음에 언젠가 편의점 아저씨께서 서른 전에만 끊으면 된다고 하셔서 그걸 기준으로 스스로와 약속했던 것이라 별로 걱정이 되지는 않는다. 또 이런 미신같은 각오가 들어있는 건 기가 막히게 잘 해내는 나니까. c. 술도 아마 많이 줄이지 않을까 싶다. 부모님 집에 가면 월세와 식비를 많이 아낄 수 있지만 그 말고도 술을 반강제적으로 자제할 수 밖에 없다는 장점이 있어서 술을 줄이는 연습에 있어서 좋은 환경이 되어줄 것 같다. 아, 이건 생각 못해봤는데 서른이 아니더라도 내년엔 어차피 담배를 못 폈겠네. d. 유튜브 채널 두 개를 운영할까, 생각중이다. 하나는 그냥 내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을 하는 채널?이 될 것 같고, 또 하나는 내 블로그에 자유 이용 저작물 텍스트들을 번역해서 올리듯이 자유 이용 저작물 영상들에 자막을 붙여서 올려볼까 생각 중이다. e. 번역 학원을 다니려고 한다. 어차피 올해 대학원도 못 가겠다, 번역 학원을 다니면서 같은 목표를 지닌 사람들을 조금 알아갔으면 좋겠다. f. 이 말고도 일찍 일어나기, 헬스장 다니기, 여행 자금 모으기 및 여행 가기, 소설 구체화, 마지막 학기 마무리, 강제성 섞인 독서와 영화 시청, 등등이 있지만 글자만 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실 몸으로 직접 실천하기 전까지는 그닥 큰 의미가 없는 일들이어서 여기까지만 적어두려고 한다. 미래의 늙은이 오성진께서 흐뭇하게 웃으면서 “그거 다 했어~”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정도가 있다.

빼꼼

주와아앙

구오오오오


자, 그리고 오늘 2021년 마지막 일출을 보러 간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사실 말이야 예쁘지, 정말 처음부터 일출을 볼 생각으로 잠든 건 아니었다. 그냥 다섯 시에 일어나는 게 목표였는데 정말 술도 안 마시고 잠에 들어 다섯 시에 막상 일어나니까 기분이 너무 좋길래 바로 문밖으로 나섰던 게 시작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걷고 걸어서 하늘 공원 맨 위에 도달해서 자리를 잡고 한참을 기다렸다. 그 시간대에 바깥에 나가본 적은 군대 이후로 엄청 오랜만이었는데 하늘 색깔이 정말 밑에는 옅은 주황색 그리고 얇은 층의 회색이 깔려있고 그 위에는 칠흑같은 어둠이 물들어있었다. 여섯시 반부터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사진도 찍고 혼잣말도 하면서 태양을 기다려봤지만 태양은 떠오를 생각도 없이 이미 하늘은 하얗게 -- 물론 그 전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 밝아졌다. 시리는 분명히 일출 시간이 7시 47분이라고 했는데 이제 겨우 일곱시가 될동말동 한 시간에 환해진 하늘을 보면서 원래 도시에서는 일출을 보지 못하는 건가, 싶어서 조금 의아했다. 그러다가 너무 춥길래 ‘하긴, 안 그러면 사람들이 사서 굳이 바다에 까지 가서 일출을 볼 리가 없잖아!’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집에 가려고 발을 돌렸다. 한 삼 분 정도 걷다가 갑자기 너무 억울하길래 시리를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사십 분 남짓 더 기다리니 정말 기가막히게 밝은 태양이 이전에 밝았던 하늘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엄청난 자태로 모습을 조금씩 나타냈다. 일출을 본 지가 너무 오랜만이어서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태양의 속도에 흠칫 놀라며 사진과 영상을 여러 번 찍고 얼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일출을 감상했다. 그렇게 한 오 분 정도 있었나, 도저히 추위를 더 버틸 수가 없어서 얼른 동산을 내려왔다. 동산을 내려와 집으로 가는 길에도 계속해서 고개를 돌려 하늘 위에 떠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묘했었다. 이것도 또 인생 씨가 뭔가를 건네 준 것만 같았는데, 이건 아직 뭔지 모르겠어서 적지는 않겠다. 여튼 그렇게 하루를 일찍 시작하고 번역에, 식사에, 월세까지 내고 나니 시간이 남아 내가 좋아하는 광화문 교보문고를 다녀왔다. 나와 같은 하루를 보낸 사람들이 많은 건지 아니면 원래 연말과 연초에 사람들이 서점을 많이 찾는 것인지 -- 노트, 다이어리 쪽에 사람들이 득실 거렸던 걸 생각하면 아마 후자인 것 같다 -- 사람이 엄청 많았는데, 사람들이랑 부딪히지 않으려고 춤을 추듯이 요리조리 움직이다가 멈칫, 살 책들을 고르고 가만히 읽어보던 차에 왠지 이제 인스타그램이랑 유튜브도 멀어져야 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그러려고 한다. 평소에는 시간이 남으면 ‘볼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네' 하고 연한 우울감에 젖어들곤 했었는데 서점에서 책을 읽다보니 그냥 혼자 있는 법을 제대로 배워보고, 책도 다시 즐길 줄 알게 되고, 사람들을 찾지 말고 사람들이 찾아줄만큼 우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 문득문득 오는 가르침이나 결심 같은 것들을 조금 더 자세히 표현하고 싶은데, 그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잘 전달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아쉽다.

오늘 교보문고에서 사온 책들. 광화문 교보문고에는 다양한 영문서적이 많이 있어서 너무 좋다.


어쨌든 이제 어느새 11시 11분이 되어서 서른까지, 오! 11시 12분이 되었다, 48분이 남았는데, 글을 쓰고나니 또 잠시 미쳐서 조바심이 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조금 침착해진 것 같다. 내일은 2022년 1월의 새로운 나답게 살 것도 없이 그냥 오늘의 나처럼, 뒤에서 나를 봐도 부끄럽지 않을 모습으로 살면 되지 않을까(참고로 요며칠 빼고는 꽤나 부끄러운 저녁과 밤들을 상상 이상으로 많이 보내왔다), 생각이 든다. 괜찮겄지, 뭐. 이제 마지막 담배를 태우고 잠에 들어야겠다.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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