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16. 15:10ㆍ번역/인터뷰
페미니스트 소설가와 무라카미 본인이 함께 바라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
: 가와카미 미에코, 『기사단장 죽이기』의 작가와 담화를 나누다.
*본 인터뷰는 리터러리 헙 (Literary Hub)에서 해당 특집을 원문 통째로 번역한 문서입니다.
Photo ©SHINCHOSHA
글 제공 · SHINCHOSHA & Literary Hub
일영 번역 · Sam Bett & David Boyd
영한 번역 · 오성진
2020년 4월 7일
최근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가 인터뷰를 한 적은 별로 없다. 하지만 2017년, 작가는 예외적으로 그의 영향을 고스란히 소설에 나타나는 동료 작가 미에코 카와카미와의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둘은 놀라울 정도로 죽이 잘 맞았고, 도쿄에 네 가지 다른 장소를 다니며 함께 16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이 내용을 담은 담화록은 2017년 신초샤 출판사를 통해 『みみずくは黄昏に飛びたつ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아래 발췌된 부분은 미에코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그의 소설 안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어떻게 해서 그들의 역할을 부여받았는지,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묻는 질문들과 그에 대한 하루키의 답변이 담겨있다.
*
가와카미 미에코(KM): 전 『기사단장 죽이기』에 나온 마리에 아키가와라는 캐릭터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어요. 그녀의 정체성이 그녀의 가슴과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이 많이 강조된 점이 인상 깊었어요. 선생님의 다른 소설에서 젊은 여성이 이랬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서요.저는 『댄스 댄스 댄스』의 유키나 『태엽 감는 새』의 메이 카사하라 같은 경우엔 쉽게 이입할 수 있었거든요.
지금 떠오르는 장면은 메이 카사하라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에요. “죽음의 혹… 둥그렇고 누르는 재미가 있어. 소프트볼처럼 말야.” 주인공은 우선 제쳐두고, 메이는 소설 내내 이처럼 인상 깊은 대사들을 내뱉어요, 자신의 죽음이나 다른 사람들의 죽음 또는 자신을 해치는 행위나 남을 해치는 행위 사이에 놓인 뿌연 경계선에 대해서 하는 말들이죠. 서사도 굉장해요. 소녀로 산다는 것이 어떤 건지 제대로 담아내죠. 그 문단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요. 유키와 메이는 자신의 가슴이나 몸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기사단장 죽이기』에서의 마리에는…
무라카미 하루키(MH): 반면에 그 캐릭터는 자신의 몸에 많이 사로잡힌 편이죠. 거의 집착하듯이 말이에요.
KM: 맞아요, 그런데 작가님께서는 그 집착의 정도가 조금 너무 높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1인칭 시점의 화자와 단둘이 있는 순간이 생기자마자, 이 남자는 그녀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죠, 처음으로 그녀 입밖으로 나오는 말은 대충 이런 식이었어요. “제 가슴은 정말로 작아요, 그렇죠?” 저는 이 지점에서 상당히 놀랐어요. 이 가슴을 향한 그녀의 집착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요?
MH: 저라면 “어디에서 나온다”고 표현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저는 단지 세상에 이런 식으로 느끼는 여성들이 있겠다고 상상할 뿐입니다.
KM: 그렇다면 그녀와 화자 사이에 나이 차이와 같은 간극은 어떤가요? ...마리에가 화자에게 자신의 가슴에 대해 물어볼 때 화자가 어떻게 답변하면 좋을지, 조금이라도 고민해보셨나요?
MH: 무슨 이야기인줄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주인공 남자에게 자신의 가슴이 어떻냐고 물어보는 것은 사실 그녀가 화자를 남자로 보고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죠. 그녀는 화자를 성적 대상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거예요. 이러한 사실은 둘의 대화 기저에 깔린 속사정을, 또는 철학적인 면을 키워줍니다. 마리에가 그에게 원하는 관계가 그 정도라는 것입니다. 책을 쓰면서 마리에라는 인물은 그러한 문제에 있어서 물어볼 수 있을만한 사람을 꽤나 오랜 기간 동안 찾아다녔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성적 대상으로 보일 가능성이 보인다면 보통의 경우엔 당신의 가슴이 왜 더 크지 않고 있는지 또는 유두가 얼마나 작은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겠죠. 적어도 그 점만큼은 우리가 동의할 수 있을거라고 봅니다.
KM: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저는 사실 정반대의 가능성도 떠올렸는데요. 1인칭 화자가 자신을 성적으로 바라봐주길 바래서 마리에가 그런 식으로 대화를 시작한 것이라고요.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그녀의 첫마디가 둘 사이에 모든 성적인 기류를 전부 없애고 둘의 상호작용 배경에 있는 철학적인 면을 강화시켜준다는 말씀이신가요?
MH: 맞습니다. 그 결과로 마리에와 화자 사이의 대화는 소설을 이끄는 커다란 동력이 되어주죠. 그들의 교류가 이야기에 새로운 빛을 비춰주니까요.
KM: 다른 말로 하자면 둘의 대화는—이 대화의 특성이 아니라면 독자에게 여전히 수수께끼였을—화자의 성격과 행동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신다는 거겠네요.
MH: 맞습니다. 남자는 12살 여자아이도 자신의 가슴에 대해서 편하게 말할 수 있게끔 만드는 사람인거예요. 그런 성격을 타고난 사람인거죠.
KM: 그럼 이번엔 선생님의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여성들에 대한 질문들을 해보겠습니다. 선생님의 작품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적지 않게 등장하는 질문들이죠. 바로 여성들에게 주어진 역할은 무엇이며 그들이 소설 속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제 주변에 여성 친구들이 자주 제게 이런 질문을 해요. “여성들이 그런 식으로 나오는데도 어떻게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을 그렇게나 사랑하는거야?” 선생님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그려진 형식에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거죠. 남녀를 떠나 불쾌감을 느끼는 독자층이 분명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MH: 정말이요? 어떤 식으로 불쾌감을 준다는거죠?
KM: 사실적으로 표현된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존재하는 여성들”로 비춰지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넘어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조금 전에 선생님과 말씀 나눈 바와 같이, 여성은 일종의 계시를 해주는 역할로서 존재합니다. 주인공의 운명을 달성하게끔 도와주는 조력자로 만들어진 것이죠.
MH: 그녀는 주인공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안내해주죠.
KM: 바로 그 부분입니다. 주인공에게 변화의 계기가 되어주죠. 여성들이 변화의 창구, 또는 기회로 보여지는 예시는 많이 존재합니다.
MH: 네, 그런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저도 동감합니다.
KM: 이러한 변화 과정들에 있어서, 적어도 섹스가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장치로 쓰인 경우엔, 이성애자인 남성 주인공과 대치한 여성들은 선택권을 부여받지도 못한 채로 그저 주인공의 섹스 상대로의 역할을 해내야만 합니다. 특정한 각도에서 보자면 세상에 많은 독자들은 여성 캐릭터들이 평생 이러한 역할만 주어졌다고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단순히 이야기에 필요한 수준에서 쓰이고 과할 정도로 성적인 역할을 강제로 부여받은거죠. 이 점에 대해서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MH: 제가 제대로 이해한건지 모르겠네요. “단순히 이야기에 필요한 수준에서 쓰인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KM: 제 말은 선생님 소설에서 등장하는 대다수의 여성 캐릭터들이 오로지 성적인 기능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한편으로 선생님의 작품 속 상상력은 무궁무진하죠. 그 플롯과 남성 캐릭터들에게 있어서는요. 하지만 여성 캐릭터들과의 관계에서는 결코 상황이 같지 않습니다. 작품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죠. 그리고 여성 주연들, 심지어 여성 조연들까지, 선생님 소설에는 언제나 주요 남성 인물을 위해 여성 캐릭터가 희생을 해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쭤보고 싶은 것은… 왜 무라카미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겐 자주 이런 역할이 주어지냐는 것이죠.
MH: 아, 질문이 이제 이해됐습니다.
KM: 이 점에 대해서 선생님 생각을 밝혀주실 수 있을까요?
MH: 이 답변이 가장 시원한 설명은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만든 캐릭터 중 그 어떤 인물도 그렇게 복잡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초점은 바로 캐릭터들간의 교류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남자건 여자건 말이에요, 어떻게 자신들의 세계를 살아가는지가 중요한 것이죠. 그나마 신경쓰는 특징이 있다면 저는 딱히 존재 의미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그 중요성이나 배경적인 설명 같은 것 말이죠. 일찍이도 말했듯이 저는 인물 개개인에게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똑같이요.
KM: 그렇군요.
MH: 따지고 보면『1Q84』를 쓰던 당시가 여성 캐릭터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때였던 것 같아요. 아오마메는 덴고에게 굉장히 중요한 인물인 동시에 덴고 또한 아오마메에게 어마하게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죠. 이야기 속에서 둘은 한번도 스쳐지나가지 않을 것 처럼 보여요. 하지만 소설은 둘의 움직임이 어떻게 서로를 향해 가까워지는지를 그려냅니다. 둘은 주인공으로서의 지위를 동등하게 공유하고 있어요. 마지막에 둘은 결국 만나게 되죠. 둘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거예요. 마지막까지 둘 사이에 에로틱한 장면은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면으로 보아 전 둘이 동등하다고 봅니다, 소설의 구조를 넓게 보자면 두 인물 다 소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들이죠.
KM: 선생님의 장편 소설들은 주로 거대한 세력에 저항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태엽 감는 새』에서 오카다 도루와 오카다 구미코는 와타야 노보루라는 인물에게 저항하는 싸우는 내용을, 『1Q84』에서는 아오마메와 덴고가 강력한 악의 세력과 싸우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죠. 이 두 소설 사이의 공통점은 바로 남성 캐릭터들이 무의식의 영역에서 그들의 싸움을 이어간다는 점입니다.
MH: 그렇게 정리하자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어쩌면 이건 보통 사회적으로 알려진 젠더에 부여된 역할과 반대된다고도 볼 수 있을지도요.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작가님은 이를 어떻게 보십니까? 저로서는 그것이 시사하는 바를 확실히 알 수 없네요.
KM: 선생님의 남성 캐릭터들은 그들의 싸움을 무의식, 즉 안에서 진행하고 여성들이 진짜 세계 속에서 모든 싸움을 하게끔 미룬다고 보는 것이 페미니스트들의 주된 감상평입니다. 『태엽 감는 새』의 예를 들어보자면, 구미코는 인공 호흡기의 전선을 뽑아 와타야 노보루를 죽이고 최종적으로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리고 『1Q84』에서 리더는 아오마메에게 살해당합니다. 물론 모든 소설을 일일이 페미니스트 시점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꼭 올바른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만이 작가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아니겠죠. 하지만 이 책들을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보자면 주된 감상은 아마 "뭐야, 이번에도 남자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또 한 명의 여자가 피를 보잖아" 정도일 것입니다.
저희가 살고 있는 실세계에 대다수의 여성들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삶을 더이상 살아가기 힘든 경험을 겪었습니다. 상호 동의가 아니었냐고 추궁 당하는 성폭력 피해자와 같이 말이죠. 결국 여성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봐야합니다. 어쩌면 세상에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여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사람의 생각방식이 사회적인 억압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겠냐는 주장이 들어올만한 공간은 충분히 있죠. 그래서 이러한 패턴이 픽션에 나올 때 진이 많이 빠집니다. 여성은 남성의 깨달음이나 성적 욕구를 해결해주는 존재로써 존재한다는, 일종의 리마인더의 역할을 하니까요.
MH: 제 생각에 그 어떤 패턴이더라도 아마 우연적인 영역에 그칠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설정한 적이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흘러갈 수도 있겠죠, 순수하게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말이에요. 생각없이 말하는 것이라 비춰지지 않았으면 하지만, 제 글쓰기는 한 번도 정교하게 짜여진 플롯을 따라가본 적이 없습니다. 『노르웨이의 숲』을 예로 들어볼까요. 나오코와 미도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의 의식적, 무의식적 존재를 두고 힘겹게 싸워나갑니다. 그리고 1인칭 남성 화자의 정신은 둘의 지배 하에 갇히죠. 후에 그의 세계는 둘로 갈라질 위기에 처합니다. 『애프터 다크』의 예도 들어보겠습니다. 이야기는 거의 독보적으로 여성 캐릭터들의 의지만으로 진행됩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언제나 성적욕구를 충족시켜주며 남성의 목표를 이뤄주는 예지자의 역할을 한다거나 하는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야기의 진행 방향을 까먹는 한이 있더라도 제가 만든 여성 캐릭터들은 제 안에 남습니다. 『노르웨이의 숲』에 등장하는 레이코와 하츠미만 봐도 그래요. 오늘날까지도, 이 인물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감정에 북받칩니다. 저에게 이 여성들은 단순한 소설적 장치가 아닙니다. 각자 개개인이 자신의 환경에 맞추어 특별한 사건들을 불러일으키죠. 저는 지금 핑계를 대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제 감정과 경험에 따라 답변을 드리고 있는거예요.
KM: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저도 작가로서 선생님께서 이야기하신 "감정과 경험"이 굉장히 친근한 개념으로 다가옵니다. 동시에 선생님의 독자들이 선생님 글을 읽고 저희가 오늘 얘기 나눈 바와 같은 인상을 받는 경험을 하게 될거란 생각도 쉽게 접히지는 않네요.
그래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에 제게 정말 중요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생님의 생각에—제가 요약해보자면— '여성들은 현재 자신들이 성적으로만 다뤄지는 환경을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 또는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갈 힘이 있다' 라는 말인데요.
MH: 맞습니다. 저는 여성들은… 뭐랄까요, 남성들과 다른 기능을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클리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남성들과 여성들이 살아가는거죠. 서로를 돕고,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주면서 말예요. 어쩔땐 서로의 젠더의 역할이나 기능을 바꿔서라도 말이죠. 결국 개개인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이를 자연스럽다고 보는지 아닌지, 정의롭다고 보는지 아닌지를 떠나서 말이에요. 그들이 젠더의 차이가 정말 완전히 반대되는 수준이라고 보는지, 아니면 조화로운 밸런스를 지녔다고 보는지는 철저히 개인에게 달려있는거죠. 어쩌면 저희가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만이 정답이 아닌 만큼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우는 것만이 정답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경우에 있어선, 저는 오로지 소설을 통해서만 이렇게 복잡한 문제들을 다룰 수가 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이야기들을 제 안에 있는 그대로 다루는 겁니다. 저는 철학자도 아니거니와 비평가도, 사회 운동가도 아닙니다. 단지 소설가일 뿐이죠. 누군가 "무슨무슨 주의"의 관점에서 제 작품에 결함이 있다고 말하거나 조금 더 생각을 해보지 그랬냐고 말한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진심으로 사과하는 마음을 내비치며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뿐이에요. 지적을 당했을 때 사과를 가장 빨리 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바로 저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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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 래이몬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소설들에서 여성들은 주로 남성이 해낼 목표나 임무를 들고 등장합니다. 넓게 보자면 선생님의 작품도 선생님이 읽으신 작품들에서 여성을 표현하는 방식을 조금이라도 차용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들이 읽는 글들은 그들의 글쓰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니까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창작하신 모든 여성들 중에, 아직까지도 제 머릿속에 가장 진하게 남아있는 여성 캐릭터는『잠』의 주인공인데요. 여성 작가들이 써낸 여성 캐릭터들과 남성 작가들이 써낸 여성 캐릭터들도 많이 읽어봤지만 오늘날까지 『잠』에 등장하는 여성과 같은 인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굉장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MH: 그 이야기는 뉴요커 잡지에 출간되었었죠. 당시만 해도 저는 미국에 이름을 알리지 않은 작가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읽은 대다수의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람이 여성이라고 생각했다고 해요. 심지어 많은 여성들에게 이야기를 잘 써줘서 고맙다는 감사 편지도 많이 받았습니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KM: 『잠』이 선생님께서 여성의 시선에서 처음으로 쓴 작품이라는 게 사실인가요?
MH: 네, 맞는 것 같습니다.
KM: 선생님의 커리어의 그 시기에 여성 인물에 초점을 맞춰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아니면 그냥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일까요?
MH: 그 이야기는 제가 로마에 살고 있을 때 썼습니다. 신경쇠약에 걸릴 했다고 까지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일본에서 베스트셀러로 활약중이던 『노르웨이의 숲』을 둘러싼 많은 관심에 굉장히 신경이 곤두서있었던 시기였어요. 너무 지친 바람에 다른 세계로 떠나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로 떠나 잠시 그곳에서 머물렀던거죠. 조금 우울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글쓰기도 도무지 불가능했죠. 그러던 어느 날,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때가 『TV 피플』과 『잠』을 썼을 때였어요. 이른 봄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KM: 무슨 이야기를 먼저 쓰셨나요? 아무래도 『TV 피플』이었을까요?
MH: 네. 제 생각에 『TV 피플』을 먼저 썼던 것 같아요. MTV에서 루 리드의 어느 뮤직비디오를 봤는데 상당히 인상깊더군요. 그래서 그자리에서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써내려갔던 것 같아요.
KM: 『잠』은 굉장한 작품이에요.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은 마치 죽음이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과 같죠. 거기엔 뭐랄까... 단 한번도 모습을 나타내진 않지만 어딘가 불안정하고 독특한 종류의 긴장감이 깔려있죠. 여성의 삶에 대한 완벽한 은유입니다. 쓰시는데 며칠 안걸리셨을 것 같은데… 맞나요? 아무래도 단편이다보니.
MH: 네, 뭐. 그래도 글을 깔끔히 다듬는데는 일주일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KM: 독자인 저마저도 『잠』을 한줄 한줄 읽느라 다 읽는데 며칠이 걸렸는걸요. 『잠』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 같은 캐릭터는 정말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여성으로서 글 위에서 "신여성"을 마주친다는 일은 정말 크나큰 기쁨이었거든요. 남성 작가가 쓴 캐릭터라는 사실에 더욱이 놀라울 따름이었죠. 그 이야기를 읽는 경험은 정말 황홀했습니다.
저는 선생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 캐릭터들 중에서 『잠』에 나오는 인물이 가장 좋았습니다. 페미니스트로서 이 캐릭터를 발견했을 때 선생님의 작품과 제 사이엔 엄청난 믿음이 자랐죠.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래도 선생님의 글, 또는 단어선택 하나하나에 믿음이 생겼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 여성 작가인 그레이스 페일리의 단편 소설들을 번역하신 걸로도 알고 있어요. 어쩌면 거기에 연관성이 있을수도 있겠네요. 선생님께서 여성 캐릭터를 만드시는 방식과의 연관성 말이죠.
MH: 저라면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그레이스 페일리의 작품을 번역하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단지 그녀의 작품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에요. 그녀가 여성을 어떻게 그려내는지에는 의식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죠. 『잠』이라는 작품을 집필했을 때 저는 제가 생각하던 것들을 종이 위에다 옮겼적었을 뿐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놓인 여성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면서 말이죠. 그 시기에 쓴 글의 내레이터가 여성이었던 점도 순전히 우연입니다. 여성의 정신세계를 탐구해보고자 의식적으로 노력을 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어요.
KM: 여성 캐릭터를 쓸 땐 독자의 성별을 떠나 그들로 하여금 이 캐릭터가 소위 사회적으로 여성이라고 불릴만한 인물임을 믿을 수 있도록 쓰일만한 모티프가 여러가지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그런게 하나도 나오지 않죠.
MH: 엔딩만 빼고요. 여주인공이 부둣가에 차를 주차하는 장면 말이에요. 그 씬에서만큼은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밤, 두 남성이 여성의 차를 앞뒤로 밀고 흔든다? 그런 일은 생각만 해도 정말 무섭네요.
KM: 남성에게도 똑같이 무서울만한 일이죠, 하지만 여성에게 그런 감이 더 있을 순 있겠네요.
MH: 저는 모든 방면으로 캐릭터를 사람으로 그리는데 집중했습니다, 그녀가 여성이라는 점은 그다지 많이 신경쓰지 않았어요.
KM: 네. 제 생각에 그런 식의 거리감을 만드는 방식, 인간성에 집중하는 방식—왜냐면 결국에 남는 건 그것일테니까요, 여성 캐릭터의 인간적인 면모들 말이죠—이야말로 그녀를 여성으로서 더 부각시켜주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 생각에는요. 그런 여성은 다른 곳에서 읽어본 적이 없어요. 정말로 훌륭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MH: 지금와서 되돌아보면 이야기는 똑같이 제역할을 해냈을 것 같네요. 주인공이 남성주부, 아내는 의사거나 치의사였고 남편이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요리를 한다거나 빨래를 하는 이야기였다고 해도 말이죠. 그래도 그런 이야기가 쓰였다면 어떤 점들에서는 분명 다른 의미를 지녔을거라 생각합니다.
KM: 저는 부부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생명을 주는 것은 여성이잖아요. 그녀가 이를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로 하여금 남편은 느끼지 못하는 상실감에 빠지게 만들죠.
MH: 거기에다가 그녀가 남편을 향해 느끼는 일종의 원한같은 것도 존재하죠. 그런 원한심은 특별히 여성들만 느낄 수 있는 유형의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KM: 원한심을 넘어선 무언가죠. 이름은 특정지을 수 없지만 원한심을 넘어선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는 것 만큼은 맞아요.
MH: 네. 가끔은 집을 그냥 걷고 있을 뿐인데 제 등뒤에서 그런 기류가 올라오는 걸 느낄 때가 있어요. 스멀스멀 방안으로 흘러온거죠.
KM: "스멀스멀 흘러오는 기류"라면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결혼생활에선 거의 폭포처럼 흘러넘치잖아요! (웃음) 이 이야기를 하니 아들과 아빠가 비슷한 행동을 한다고 표현되었던 점이 생각나네요, 주인공에게 손인사를 하거나 할 때 말이에요. 왜냐하면 원한 같은 것은 정말 풀어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말로써는 설명하지 못할만한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죠. 여주인공이 안나 카레리나를 읽게 하신 것도 좋았어요.
MH: 안나 카레리나. 남편을 향한 원한이라면 빼놓지 못할 고전작품이죠. 어쩌면 톨스토이 선생도 집에서 생활할 때 방안으로 비슷한 기류가 스멀스멀 흘러다녔을지도.
KM: 선생님은 글을 써오시면서 많은 남성 캐릭터들을 쓰셨는데요, 앞으로 쓰실 책에서 『기사단장 죽이기』에 등장한 멘시키같은 캐릭터가 여자로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시나요? 조금 오묘하고 전례가 없어서 한 번 보면 독자 입에서 "와, 이런 건 새로운 걸"이라고 말이 나올만한 캐릭터들 말이죠. 아니면 여성 캐릭터들이 계속해서 현재와 같은 미신적이고 다분히 기능적인 역할만 할거라고 보시나요?
MH: 저는 계속해서 새로운, 현재까지 나온 인물들과는 다른 캐릭터들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되죠. 쇼코 아키가와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녀는 조연일지 몰라도 제가 여태껏 써온 캐릭터들에서 많이 떨어진 인물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그녀는 어딘가 특별한 점이 있어요. 저는 그녀에게 대해서 더 알고 싶습니다. 그녀의 표면만 다뤘다는 느낌이 있어요.
KM: 그녀가 무슨 책들을 읽었는지 궁금해질 때가 이따금씩 있어요. 그녀의 침대 옆에는 어떤 책들이 있을까요? 그녀가 찾을 수 있는 한 가장 하드보일드한 소설들이 서있을까요? 너무 알고 싶어요. 그러니까 그녀가 책을 가지고 어딘가 앉았다고 상상하면, 그녀가 들고있는 그 책의 제목이 무엇일지 너무도 궁금해져요. 저로서는 쉽게 짐작이 가지 않네요.
MH: 아마 뭔가 거대한 스케일을 담은 내용의 책일 것일겁니다. 삼국지연의 같은 책 말예요.
KM: 쇼코는 정말 강한 인상을 지닌 사람이에요. 어떤 소설들은 여성 캐릭터에 대해서 성격, 헤어스타일, 옷차림 같은 세부 정보들을 전부 쥐어주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보를 주고 여성에 대해 명확한 이미지를 제시하는 챈들러 소설에서처럼요. 선생님의 소설에서 여성의 캐릭터화는 그녀의 옷에 대한 작은 디테일들로 시작하는 경향이 있어요. 여성의 옷에 대해 정보를 얻기 위해 따로 가시는 곳이 있으신 건가요?
MH: 저는 어디에도 가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대로 쓸 뿐이에요. 이와 비슷한 것들을 조사하는데 시간을 쓰지 않아요. 여성 캐릭터의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면 그녀의 몸에 제가 표현하는 옷들이 자연적으로 입혀져있죠. 그래도 한가지 첨언을 하자면 여성의 옷들 자체에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긴 합니다. 제가 몇 벌 사본 적도 있고요.
KM: 『토니 타키타니』에 등장하는 아내도 충동적으로 옷을 구매하는 인물로 나오죠, 마지막에 가서는 차사고로 인해서 죽고요. 그녀는 옷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몸을 떠는데, 저는 이런 디테일을 정말 좋아한답니다.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선생님께서 쓰셨던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계속해서 떠오르네요. 모든 여성들이 한가지 카테고리에 들어간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래도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쓴다는 것과 그녀들을 이야기에 중요한 인물로 만드는 것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죠.
MH: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로서는 작가님께서 계속해서 있다고 주장하시는 이 패턴이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 소설 속 여성들을 하나로 뭉쳐 이야기한다고 문제될 건 없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들 모두 한명한명 특별한 의미를 지닌 개인입니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보자면, 제가 그들을 남성으로 보거나 여성으로 보거나 하는 문제 이전에 저는 그들을 전부 사람으로 봅니다. 잠시 다른 얘기지만, 제 단편 소설 『녹색 짐승』에 등장하는 아내는 어떻나요. 엄청 무서운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KM: 네, 그 사람도 있네요.
MH: 저는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특유의 잔혹성을 탐구하던 차였습니다. 그 자리에 있을 땐 감지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해도 손 안에 거머쥘 수는 없을 것 같았어요. 다시 젠더간의 차이로 돌아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진 않지만 이런 식의 잔혹성이 남성에게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 같아요. 남성들도 분명 잔혹할 때가 있죠, 그렇지만 남성들의 잔혹성은 뭐랄까… 조금 더 구조화된 방식으로 진행된달까. 거기엔 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완전히 사이코패스 같을 때도 존재하죠. 하지만 여성들의 잔혹성은 조금 더 일상적인,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을만한 유형의 것이에요. 가끔가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볼 수 있죠. 놀랍게도 많은 여성 독자들께서 『녹색 짐승』를 좋아해주신 것 같아요. 어쩌면 그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KM: 네, 제 친구들도 그 이야기를 많이 좋아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 이야기 중에 하나이기도 하구요. 뭐랄까. 그녀가 보여주는 무서움은 무섭게 다가오지 않아서 독자들로 하여금 완전히 정상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게끔 하죠. 친근한 형식의 잔혹성이랄까.
*
무라카미 하루키는 교토에서 1949년에 태어나 현재는 도쿄 인근에서 거주중이다. 그의 작품은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그는 프라츠 카프카 상과 예루살렘 상을 포함해 다양한 국제상을 수여받았다. 또한 리에주 대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그의 작품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그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주었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1976년, 오사카현에서 태어나 싱어송라이터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2006년 작가로서의 데뷔를 했다. 2007년에 발표된 그녀의 첫 소설 『My Ego Ratio, My Teeth, and the World』은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올랐고 츠부치 쇼요에서 급부상하는 신인 작가상을 받았다. 다음 해에 카와카미는 단편 소설 『가슴과 알』을 발표했다. 해당 작품은 일본에서 가장 명예로운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고 저명한 작가 요코 오가와에게 많은 찬사를 받기도 했다. 가와카미는 『천국』, 『연인들의 밤』, 그리고 영어권 국가에 처음으로 번역본이 발표될 『가슴과 알 (확장판)』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현재 일본에서 살고 있다.
*원문 출처: *위 문서는 자유이용저작물이 아니며 무단 복제나 이용을 철저히 금합니다. 샘 벳과 데이빗 보이드가 일어에서 영문으로 번역했으며, 그 번역본을 토대로 제가 영한 번역을 진행했습니다. 본문서를 볼 수 있는 링크는 여기에 남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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