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4. 15:25ㆍ번역/문학 (소설)
The Year of Spaghetti
스파게티의 해
글쓴이 · Haruki Murakami
일영 번역 · Philip Gabriel
영한 번역 · 오성진
(이미지 출처)
천-구백-칠십-일년은 스파게티의 해였다.
1971년에 나는 살기 위해 스파게티를 만들었고, 스파게티를 만들기 위해 살았다. 냄비에서 끓어오르는 연기는 나의 자부심이자 즐거움이었고, 소스팬에서 보글보글 졸여지는 토마토 소스는 내 삶의 위대한 희망이었다.
나는 주방용품 전문점에 가서 주방용 타이머와 독일 셰퍼드가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알루미늄 냄비를 사고, 외국인을 주로 상대하는 슈퍼마켓을 돌아다니며 이상한 이름의 양념 재료들을 구했다. 추가로 토마토 한 다발과 함께 서점에서 파스타 요리책도 한 권 샀다.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스파게티면을 구했고, 인류에게 알려진 모든 종류의 소스를 졸여봤다. 스파게티를 요리할 때면 잘게 다진 양파와 마늘, 그리고 올리브 오일에서 흘러나오는 향이 공중에 공기와 뭉게뭉게 섞여 구름을 만들었다. 그 구름은 늘 내 작은 집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바닥과 지붕, 벽부터 해서 내 옷들, 내 책들, 내 음반들, 내 테니스 라켓, 옛 편지들 묶음, 집안 곳곳에 냄새를 묻혔고, 그 냄새는 고대 로마의 수도교水道橋에서나 났을법한 냄새였다.
지금 들려줄 이야기는 서기 1971년, 스파게티의 해에 있었던 일이다.
스파게티를 요리하고, 혼자 먹는 것은 꼭 지키던 규칙이었다. 스파게티는 혼자서 즐겨야만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요리라고 확신했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그때는.
스파게티 옆에는 언제나 따뜻한 차와 오이와 양상추로 간단하게 만든 샐러드가 함께였다. 샐러드나 스파게티의 양이 적은 일은 없도록 했다. 식사에 필요한 것들을 빼먹지 않고 하나씩 테이블 위에 진열을 해둔 뒤에는 눈으로 신문을 읽으며 여유로운 식사를 즐겼다.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나의 스파게티의 날이 지면 또다른 스파게티의 날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마다 완전히 새로운 스파게티의 주가 시작됐다.
스파게티를 앞두고 자리에 앉을 때면—특히나 비오는 오후엔 특히나 더 그랬는데—누군가 집문을 두드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문 뒤에 있을 것으로 예상이 가는 인물들은 매번 달랐다. 언제는 모르는 사람이었다가도 언제는 안면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한 번은 고등학교 때 몇 번 만났던, 다리가 가녀린 여학생이었고, 언젠가는 몇 해 전의 내가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한쪽 어깨에 제니퍼 존스를 앉혀둔 윌리엄 홀든이 서있던 적도 있었다.
윌리엄 홀든?
다만 이들 중 단 한명이라도 집안으로 발을 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마치 조각난 기억처럼, 그저 노크도 하지않고 문앞을 서성이다가 어느 순간 조각조각 흩날리며 사라지곤 했다.
나는 봄부터 여름, 가을이 되도록 스파게티를 만드는 행위가 무슨 복수라도 되는 것 마냥 계속해서 스파게티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고백을 하고 갓차여버린, 외로운 여자아이가 때지난 러브레터들을 불속으로 집어던지는 것처럼 스파게티면을 한웅큼 집어다가 끓는 물 속에 던지고 또 던졌다.
무너진 시간의 그림자 조각들을 모아다가 독일 셰퍼드 모양으로 뜨개질해서 펄펄 끓는 물속으로 던지고 그 위에 소금을 뿌리곤 했었다. 그 다음 이따만한 젓가락을 든 내 손은 단조로운 타이머 소리가 울릴 때까지 냄비 위를 서성였다.
스파게티면은 한 가닥 한 가닥 지독하리만치 섬세한지라 도통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등이라도 돌렸다간 면들이 냄비의 한쪽 구석으로 넘어가 밤속 깊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밤은 언제나 어디 구석에 몰래 매복한 채, 호시탐탐 철없는 녀석들을 데려갈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스파게티 알라 파르미자나Spaghetti alla parmigiana
스파게티 알라 나폴레타나Spaghetti alla napoletana
스파게티 알라 프레마트라Spaghetti alla premature
스파게티 알 카르토치오Spaghetti al cartoccio
스파게티 알라 알리오 에 올리오Spaghetti aglio e olio
스파게티 알라 카르보나라Spaghetti alla carbonara
스파게티 델라 피나Spaghetti della pina
그리고 불쌍하게도 붙여질만한 이름 하나 없이 냉장고에 무심하게 던져진 먹다 남은 스파게티.
뜨거운 열기 속에서 생명력을 얻은 모든 스파게티면들은 1971년의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 영영 사라졌다.
1971년에 탄생하고 사라진 모든 스파게티를 애도한다.
오후 3시 20분에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다다미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때마침 내가 누운 자리에는 겨울의 햇빛이 한웅덩이 내리앉아있었다. 나는 죽은 파리같이 머리를 텅 비운 채로, 12월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누워있었다.
처음에는 들리는 소음이 전화벨 소리임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익숙치 않은 기억이 공기층 사이를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국엔 그 기억이 점점 모양새를 잡아가더니, 마침내 그것이 전화 벨소리임에 의심할 여지가 사라졌다. 그것은 순도 백퍼센트 공기로만 이루어진 대기중에 순도 백퍼센트 전화벨로만 이루어진 소리였다. 여전히 드러누운 채로 나는 팔을 최대한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저편에는 한 여성이 있었다. 흐물흐물, 목소리만으로는 제대로 생김새가 떠오르지 않는 여성은 아마 네 시 반이 되기도 전에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내 친구의 전여자친구였다. 뭔지 모를 뭔가가 이 친구와 형상이 잘 떠오르지 않는 이 여성을 하나로 묶었다가 다시 둘의 사이를 갈라버렸다.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건대 내키지는 않았지만 둘이 하나로 엮이는데 나도 일조했다.
“바쁠텐데 전화해서 미안해,” 그녀가 말했다, “너 친구, 지금 어디있는지 알아?”
전화기를 향해있던 내 눈은 찬찬히 전화기 코드선을 따라 움직였다. 코드선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전화기에 연결되어있었다. 그녀의 말에 애매하게 답변했다. 여자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불길한 느낌이 서려있었고, 둘 사이에 피어오르는 문제가 뭐든지간에 엮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무도 걔가 어디있는지 말해줄 생각이 없어,”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여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가 모르는 척을 하고 있어. 그런데 걔한테 꼭 말해줘야 할 것이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부탁이야—어디있는지 제발 알려줘. 알려준다고 너를 귀찮게 만들 일은 절대 없을거라고 약속할게. 말해줘.”
“진짜야. 어딨는지 나도 몰라, 안본지도 꽤 됐고.” 내 목소리가 내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를 오랜 기간 동안 보지 못했다는 것은 진실이었지만, 다른 반쪽은 거짓이었다. 친구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내 목소리에 변화가 생겼다.
수화기 건너편으로부터 답변은 없었다.
손에 쥔 전화기는 마치 얼음기둥 같았다.
그렇게 느끼고 나니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하나둘 얼음 기둥으로 변했다. 꼭 J. G. 발라드의 SF 소설 속에 들어간 것처럼 말이다.
“정말 몰라, 한마디도 없이 떠나버렸어. 오래 전에.”
여자의 웃음소리.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걔가 그렇게 똑똑하다고? 걔가 뭘 해도 꼭 이래저래 잡음을 만드는 사람이라는건 너도 잘 알잖아.”
여자의 말이 맞았다. 그 친구가 그런 쪽으로는 영 둔했다.
그렇지만 여자에게 친구가 어디있는지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했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로 친구의 이야기를 귀에 피가날 때까지 들어줘야만 할 게 눈에 훤했다. 더이상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묻어둬야 할 것들은 전부 뒷마당에 묻어둔 지 오래였다. 그것들을 다시 파헤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미안해,” 내가 말했다.
“넌 내가 싫지.” 여자는 갑작스럽게 말했다.
뭐라고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를 특별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 대한 아무런 인상이 없었을 뿐. 별인상이 없는데 안좋은 인상을 가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미안,” 내가 다시 말했다. “내가 지금 스파게티를 요리하는 중이라서.”
“뭐?”
“스파게티를 만들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말하면서도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이미 내 일부가 되었는지—적어도 그 순간만큼은—방금 뱉은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허구의 냄비를 허구의 물로 채우고, 허구의 성냥으로 허구의 가스레인지에 허구의 불을 켰다.
“그래서?” 그녀가 말했다.
끓는 물에 허구의 소금을 뿌리고 조심스럽게 허구의 스파게티면 가닥들을 허구의 냄비 안으로 눌러 앉힌 뒤, 8분으로 맞춰진 허구의 주방용 타이머를 켰다.
“그래서 전화를 할 상황이 아니라고. 더 얘길 했다간 요리를 망칠수도 있거든.”
그녀는 답이 없었다.
“정말 미안해, 스파게티를 요리한다는 게 워낙에 복잡한 일이라서 말야.”
여자는 여전히 조용했고 내 손안에 수화기는 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
“다음에 다시 전화줄 수 있어?” 침묵을 참지 못한 나는 잽싸게 말을 더했다.
“스파게티를 만드는 중이니까 다음에 전화하라고?”
“어.”
“누구한테 해주는거야, 아니면 혼자 먹는거야?”
“나 혼자 먹을거야,” 내가 답했다.
여자는 숨을 오랫동안 참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너는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큰 문제에 처해있어.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큰 문제에.”
“도와줄 수 없어서 미안,” 내가 말했다.
“돈문제도 껴있어.”
“그랬구나.”
“걔 나한테 갚을 돈 있어,” 여자가 말했다. “내가 돈을 좀 빌려줬어. 그랬으면 안 됐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
난 잠시동안 스파게티에 대한 생각을 하며 조용히 있었다. “미안해, 지금 스파게티를 만드는 중이라...”
여자는 힘빠진 웃음을 내뱉었다. “끊을게, 스파게티한테 인사나 대신 전해줘. 먹음직한 스파게티로 완성되면 좋겠네.”
“이만 끊을게,” 내가 말했다.
전화를 끊었을 때, 바닥에 햇빛 웅덩이는 몇 센치 정도 움직인 뒤였다.
영원히 끓여봐도 절대로 완성되지 않는 스파게티를 떠올린다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다.
지금와서는 그 여자에게 아무 이야기도 안했다는 사실을 조금 후회한다. 어쩌면 뭐라도 말해줬어야 했을 수도 있다. 그녀의 전남자친구—예술적인 척이나 하지, 사실 빈 껍데기 같은 녀석이다—는 말만 많을 뿐, 주변에 그를 믿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여자의 목소리는 정말 돈이 궁한 사람의 것처럼 들렸고, 상황이야 어찌됐건 빌린 돈은 마땅히 갚아야 한다.
가끔 그 여자가 어떻게 됐을지 떠올려본다—이런 생각은 주로 뜨거운 연기가 넘쳐나는 스파게티를 마주하고 있을 때 든다. 그녀는 전화를 끊은 뒤에 과연 오후 4시 반의 그림자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을까? 그랬다면 내게도 책임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내 입장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당시에 난 그 누구와도 엮이고 싶지 않았었다. 그래서 매번 그렇게 혼자서 스파게티를 만들었던 것이다. 독일 셰퍼드도 들어갈만한 그 큰 냄비에.
듀럼 세몰리나, 이탈리아 논에서 바람 따라 살랑이는 황금빛 밀.
상상이 가는가. 1971년, 자신들이 수출한 것이 바로 외로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탈리아인들의 놀란 얼굴들이.
(完)
*원문 출처: 무라카미 선생님의 'The Year Of Spaghetti'라는 작품을 번역했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자유 이용 저작물이 아니기에 무단 도용 및 상업적 이용을 절대 금합니다. 이야기의 영문본을 볼 수 있는 링크는 여기에 남겨두겠습니다.
**본이야기는 뉴요커 2005년 11월호 서면에 실렸으며, 해당 글의 지적재산권은 철저하게 무라카미 선생님과 뉴요커에게 있으니 이 글을 무단으로 배포하거나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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