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16. 16:26ㆍ번역/문학 (소설)
The Sun Also Rises
그럼에도 태양은 오른다
글쓴이 · Ernest Hemingway
번역 · 오성진
- 제6 장 -
저녁 다섯시, 나는 크릴론 호텔 로비에서 브렛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도 나타나지 않는 그녀를 기다리며 나는 자리에 앉아 편지를 썼다. 그닥 만족스러운 편지는 아니었지만 크릴론 호텔 로비 종이에 적혀있으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어줄만한 내용이었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봐도 브렛이 끝까지 나타나지 않길래 바로 지하로 내려가 그곳에서 일하는 조지와 함께 잭 로즈를 마셨다. 바에도 브렛은 없었다. 나가는 길에 다시 한 번 그녀를 찾아 로비를 훑어보고 셀렉트 카페를 향해 택시를 탔다. 센느를 지나던 길에 바지선들을 줄줄이 견인한 채로 빠르게 달리고 있는 보트, 그리고 그 보트의 난간에 서있는 바지선 선원들이 보였다. 강은 아름다웠다. 파리에서 이 강을 건널 때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택시는 열차 신호등을 개발한 사람의 석상을 타고 돌아 라스페일 거리로 향했지만 나는 이내 좌석에 등을 붙이고 이 부분은 관람하지 않기로 했다. 라스페일 거리는 언제나 보는 재미가 떨어졌다. 이 거리는 어딘가 퐁텐블로와 몽뜨호 사이에 불필요하게 놓인 통로처럼만 느껴져서 매번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도 지루하고 마치 내가 죽어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내 생각이지만, 여정 중에 이렇게 ‘죽어있다고 느껴지는 장소들'의 뒤에는 그렇게 느껴지게끔 하는 개개인 특유의 사고방식이 있는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파리에는 라스페일 거리 말고도 못생긴 거리들이 많다. 그런데 나는 라스페일 거리만 오면 걸어다니는건 어느 정도 괜찮지만 차를 타고 지나가는 것 만큼은 도무지 견뎌낼 자신이 없다. 어쩌면 이 거리에 대해 누군가 적은 불쾌한 글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로버트가 파리를 대하는 자세는 내가 라스페일 거리를 대하는 태도와 다를 바가 없다. 가끔씩 로버트가 어쩌다가 파리라는 근사한 도시를 즐기지 못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멘켄 탓일수도 있다. H. L. 멘켄도 파리를 싫어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취향을 멘켄이 말한대로 바꿔대기 때문이다.
택시는 카페 로통 앞에 멈춰섰다. 몽파르나스 어디서든 택시를 타게 되면, 기사에게 어떤 카페 이름을 말해봐도 택시는 언제나 카페 로통으로 향하기 마련이었다. 이런 전통이 십 년만 더 유지된다면 이 카페는 판테온과 비슷한 명성을 지니게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어차피 내가 가려던 곳과 그다지 멀지 않아서 별 상관은 없다는 생각에 택시에서 내렸다. 나는 카페 로통의 울적한 테이블들을 지나 카페 셀렉트로 걸어갔다. 카페 안에 바 테이블에는 몇몇 사람들이 앉아있었고, 카페 외부에는 하비 스톤 혼자 앉아있었다. 코스터들을 테이블 위에 참 많이도 쌓아둔 하비에게는 면도가 절실해보였다.
"앉지," 하비가 말했다, “자네를 찾아다녔어."
"무슨 일인데?"
"일은 무슨. 너를 찾아다니는게 일이지."
"요즘도 경마장에 자주 가?"
"아니. 지난 일요일 뒤로는 안 갔어."
"정부에서 제제라도 받은거야?"
"그런 일은 없었어."
“그럼 무슨 일이야?"
"나도 몰라. 걔네들이랑 볼일은 이제 없어. 그것만큼은 제대로 정리했어."
하비는 몸을 앞쪽으로 기울여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제이크, 뭐 하나 알려줄까?"
“응."
"나 뭐라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지낸 지가 벌써 5일째야."
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뉴욕 바에서 만났던 하비가 주사위 포커로 내게서 이백 프랑을 가져간 지가 겨우 삼일 전이었다.
“뭐가 문제길래?"
"돈이 없어서. 돈이 아직 안 들어왔어,” 하비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제이크, 이럴 때마다 진짜 뭔가 이상하다니까. 이런 상태만 되면 매번 그냥 혼자 있고 싶어져. 거의 무슨 고양이라도 된 것만 같아."
주머니 안을 뒤적거려봤다.
"하비, 백 프랑이면 도움이 되겠어?"
"충분히."
"가자, 어디 가서 뭐 좀 먹자."
"급할게 뭐 있어. 우선 한잔 하자."
"뭐부터 먹어야 좋지 않을까."
"아냐. 나는 이런 상황이 되면 뭘 먹든 말든 크게 신경쓰지 않거든."
그래서 우리는 술 한잔을 마셨다. 하비는 내 코스터를 뺏어다가 자신의 컬렉션에 추가했다.
"하비, 멘켄이라고 알아?"
"알지. 왜?”
"그 사람 어때?"
"괜찮은 친구야. 재밌게 얘기할 줄 알지. 지난번에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호펜하이머라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었거든. 그 때는 이런 말도 했어. '문제는 있지, 이제는 그 놈이 아예 떡집을 차리고 온동네 여자들을 불러들인다는거야.' … 이런 표현들은 재밌잖아."
"재밌는 표현이네."
"이젠 그 사람도 한물 갔어,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전부 적은 모양인지 요즘 쓰는 내용은 죄다 영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내용들이던데."
"괜찮은 사람인 것 같긴 해, 단지 그 사람 글은 읽기가 힘들어서 한 번 물어본거야."
“아, 지루하디 지루한 연방주의자 논집을 읽은 사람들을 빼고는 그 사람 책을 읽을 사람은 더이상 없으니까."
"뭐, 그 논집도 꽤 괜찮지."
"그럴수도," 하비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와인 한 잔 더 할래?”
“좋지,” 하비가 말했다.
“저기 로버트 오네,” 로버트는 거리를 건너고 있었다.
“저 멍청한 새끼,” 하비가 말하자 로버트는 어느새 우리 테이블에 도착했다.
“안녕들하신가, 거지들,” 그가 말했다.
“로버트,” 하비가 말했다. “마침 제이크한테 너가 멍청한 새끼라고 말하던 참이었어.”
“무슨 소리야?”
“이 질문에 바로 답변해봐.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말고. 지금 아무거나 할 수 있다면 가장 하고 싶은게 뭐야?”
로버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하지 말라니까. 바로 뱉어봐.”
“몰라, 뭐길래 이래?”
“딱 하나만 고를 수 있으면 뭐 할 것 같냐고.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거. 이상한 거여도 상관 없어.”
“몰라, 지금은 나 스스로를 더 잘 다룰 수 있으니까 대학교 시절에 했던 풋볼에 다시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겠는데.”
“...이거 내가 사람을 완전 잘못 본 모양이야. 넌 멍청한 새끼가 아니라 단순히 덜 자란 새끼일 뿐이잖아.”
“하비, 여전히 재밌네,” 로버트가 말했다. “그렇게 입을 놀리다가는 어디서 한 대 맞겠어.”
하비 스톤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그럴 일은 없을거야. 왜냐면 그렇다고 내가 변할 일은 없거든. 난 싸움과는 거리가 멀어서 말이야.”
“그 문제는 누군가 너 얼굴을 박살낸 다음에 다시 생각할지도 모르지.”
“아니, 그럴 일은 없다니까. 바로 거기서 너가 틀려먹은거야. 그러니까 무식하다는 거지.”
“이쯤에서 그만해.”
“알았어, 그렇게 나온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아. 넌 내게 아무것도 아니거든.”
“하비, 그만하지 그래,” 내가 나섰다. “와인 한 잔이나 더 마셔.”
“됐어, 난 건너편으로 가서 뭐라도 좀 먹어야겠어. 다음에 봐, 제이크.”
그는 식당을 나가 지나다니는 택시들을 뚫고 건너편으로 건너갔다.
“저 놈만 보면 언제나 속이 쓰려.”
“난 하비가 좋아,” 내가 말했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너무 씩씩대지마.”
“무슨 얘긴지는 알아, 근데도 저 놈이 이야기 할 때마다 신경을 건드리는데 어떡해.”
“오늘 오후엔 뭘 좀 썼어?”
“아니. 아무것도 써지지가 않아. 첫번째 책보다 쓰기가 어려워. 이 책은 아예 쓰는 과정에서부터 갈피를 못 잡겠어.”
이른 봄에 미국에서 돌아왔을 당시 로버트가 풍기던 강한 자만심은 더이상 볼 수 없었다. 그 때만 해도 로버트는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차보였다, 물론 미국으로 다시 떠나고 싶어하는 개인적 갈망으로부터 생겨난 확신이긴 했지만. 그 확신은 이제 그의 눈빛에 묻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껏 내가 로버트 콘이라는 사람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브렛과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만 해도 로버트는 어떤 경우가 생겨도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를 떨어뜨려 놓을만한 말을 하지 않았다. 테니스장에서 그의 모습도 지켜보는 맛이 있었다. 체격도 시원시원했고, 다부진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도 했기 때문이다. 브릿지 게임에서는 카드를 적절하게 다룰 줄도 알았던 로버트에게는 언제나 대학생 특유의 통통 튀는 매력이 있었다. 로버트가 군중 속에 있었다면 그가 무엇을 말해도 딱히 튀지 않았을 것이다. 로버트는 학교를 다니던 당시 ‘폴로 셔츠'라고 불리던 옷을 입었지만 젊어보이려고 노력을 했다는 인상을 주지도 않았다. 로버트는 옷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로버트의 외형은 프린스턴 시절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고, 그의 내부에 있는 마음은 로버트를 훈련시킨 두 여인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녀들의 훈련을 통해서도 소년같이 밝은 로버트의 성격은 그를 벗어날 생각이 없어보였고 나 또한 그 성격을 없애려고 노력한 적은 없다. 로버트는 테니스 경기를 할 때마다 승리에 집착했다. 그의 승부욕은 수잔 렝글렌의 그것과 비슷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졌다고 화를 내는 일도 없었다. 로버트가 브렛에게 빠진 이후부터 그에게서 예전과 같은 테니스 게임은 더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전에는 상대도 안 되던 사람들이 그를 이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변화를 나름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다시 우리가 앉아있는 셀렉트 카페의 테라스로 돌아오자, 이제서야 건너편 거리로 완전히 넘어간 하비 스톤이 보인다.
“릴라스La Closerie Des Lilas로 가서 밥이나 먹을래?” 내가 말했다.
“데이트 약속이 있어.”
“몇 시에?”
“일곱시 십오분 쯤에 프란시스가 여기로 올거야.”
“저기 오네.”
프란시스 클라인은 길 건너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굉장히 큰 키를 소유한 프란시스는 걸을 때 마다 다양한 움직임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손인사를 하며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제이크 씨도 계셔서 너무 좋네요.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거든요."
“어서 와 프란시스," 로버트는 미소를 지었다.
“오, 로버트. 여기 계셨네요?" 프란시스는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제이크, 제가 이 사람 때문에 오늘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세요?" -- 프란시스는 로버트를 향해 머리를 저었다 -- "글쎄 이 사람이 점심 시간에 집에 들어오지 않은거 있죠?"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던 건 아니었잖아.”
"아, 그건 알아요. 그치만 적어도 요리사한테도 미리 알려줬다면 좋았을거예요. 결국 저 혼자만의 데이트를 즐겼죠. 폴라는 사무실에 없더군요. 그래서 릿츠에 가서 폴라를 기다려봤지만 아무리 기다려봐도 오질 않있아요. 당연히 저에게는 릿츠에서 점심을 사먹을만한 돈이 없었..."
"그래서 어떻게 했어?"
"당연히 조용히 카페에서 나왔죠." 프란시스의 미소는 어딘가 어색했다. "저는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어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매번 약속을 어기는 것 같아요. 제가 이상한거겠죠, 뭐. 그나저나 제이크 씨, 잘 지냈어요?"
"네. 괜찮습니다."
“무도회장에 데려오신 여자분이 꽤나 근사하던데, 결국 그 날 밤에 그 여자 말고 브렛이던가? 하는 분이랑 함께 나가셨죠.”
"그 여자 별로 맘에 안 들었어?" 로버트가 질문했다.
"너어무 매력적이던데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로버트는 입을 꾹 닫았다.
“제이크 씨,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함께 판테온에 가주세요. 로버트는 여기에 남아있는 게 어때요? 가시죠, 제이크."
우리는 몽파르나스 거리를 건너 테이블 위에 앉았다. 나는 '파리 타임즈'지를 들고 온 소년에게 을 쥐어주고 잡지를 펼쳤다.
"프란시스, 무슨 일이에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단지… 저이가 저를 떠나고 싶어해요."
“그게 무슨 말이죠?"
"로버트는 모든 사람들에게 저희가 결혼할 예정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저도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렸죠, 저희 어머니까지도요. 근데 이제는 결혼하기가 싫은 모양이에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직 경험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다고 했어요. 그이가 뉴욕으로 떠날 때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짐작했죠.” 프란시스의 맑은 눈망울은 마치 이것이 별일이 아니라는 것 처럼 이야기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 처럼 보였다.
"물론 그이가 싫대도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그럴리가요. 지금 같은 상황이면 어떤 조건이어도 그이와 결혼하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이미 너무 늦어져버린 것 같기도 해요, 삼 년이나 기다렸잖아요. 얼마 전에 이혼도 했고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번 좋은 자리를 마련해보려고 할 때마다 저희는 싸우기만 했어요. 너무 아이같이 굴었죠. 정말 상황이 안 좋아지면 저이는 울면서 제게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하라면서 빌어요. 정작 자기는 그렇게 못하면서 말이죠."
“상황이 꽤나 안좋네요."
"정말 안좋아요. 벌써 저이한테 쓴 시간만 해도 이 년 반이 넘어가고 있어요. 이제 세상에 저랑 결혼해줄 남자가 과연 남아있을지도 잘 모르겠고요. 이 년 전에 칸에 있을 적에는 제가 원하기만 했다면 아무나와 결혼할 수 있었어요. 요염한 여자랑 결혼하고 얼른 가정을 꾸리는데 혈안인 늙다리들은 모두 저를 가져가지 못해서 안달이었죠. 하지만 지금도 상황이 같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금도 얼마든지 원하시는 분과 결혼할 수 있을거예요."
"아뇨, 그럴 것 같지 않아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저는 진심으로 로버트를 좋아해요. 그와 함께 자녀를 기르고 싶기도 하구요. 매번 우리 둘 사이에 아이가 있는 모습을 상상해왔어요."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저는 아이들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못되지만, 평생 아이를 키우지 않을거라고 생각하기는 싫어요. 아기야 뭐, 어차피 낳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좋아할텐데, 미리부터 아이를 좋아하냐 안 좋아하냐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고요."
“로버트한테는 이미 아이들이 있잖아요."
"그건 그렇죠. 로버트에겐 아이들도 있고, 돈도 있고, 부유하신 어머니도 있고, 게다가 자기가 쓴 책도 있죠. 제 책을 출판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요, 어디에도요. 제 책이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은 하지는 않는데 말이에요. 저에겐 돈도 없죠. 뭐, 이것도 위자료를 받으면서 살 수도 있었는데 이혼을 너무 쉽게 해줘버린 제 탓이겠죠."
그녀는 다시 한 번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너무 부당해요. 제 잘못이 있긴 하지만 제 잘못만은 아니잖아요… 제가 더 잘 알았어야 했어요. 제가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울먹이면서 아직은 아니라고만 하는 남자라니. 왜 결혼하지 않으려는거죠? 저 정도면 좋은 아내가 될 수 있잖아요. 어울려 지내기도 쉽고요. 별로 귀찮게 굴지도 않아요. 그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줘봐도 상황이 나아지지가 않아요."
"참 안타깝네요."
"맞아요. '참 안타깝죠'. 그런데 이야기한다고 나아지는건 없겠죠? 일어나요, 다시 카페로 갑시다."
"제가 도와드릴 건 없나요?"
"네. 제가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는 것만 그이가 모르게 해주세요. 그가 뭘 원하는지 제가 정확하게 알고 있거든요." 그녀의 너무도 밝고 활발한 기운이 처음으로 사라졌다. “그 사람은 뉴욕으로 혼자 돌아가고 싶어해요, 책을 내고 바로요. 그 때야 말로 자기 꽁무니를 쫓아다닐만한 아가씨들이 가장 많을 때죠. 그 사람이 진짜 원하는 건 바로 그거예요.”
“젊은 여자들이 이번에 나올 책을 많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죠. 로버트도 그런 식으로 생각할거라고 보이지 않아요. 진심이에요.”
“제이크, 당신은 저만큼 로버트를 알고 있지 않아요. 그게 로버트가 원하는거예요. 그냥 알아요, 느껴지는걸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결혼을 피하는거예요. 이번 가을에 자신만의 축제를 벌이려고 준비중인거죠.”
“카페로 돌아가볼까요?”
“네, 그래요.”
우리는 테이블에서 일어나서 - 종업원들은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마실 것을 내오지 않았다 - 거리를 가로질러 미소를 머금은 로버트가 대리석 테이블 뒤에 앉아 있는 셀렉트 카페로 향했다.
“왜 그렇게 웃고 있죠?” 프란시스가 로버트에게 물었다. “기분이 좋은가 봐요?”
“둘이 무슨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고 왔을까, 생각하면서 웃었어.”
“비밀이라뇨. 곧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이야기인데요. 다만 제이크한테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직접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무슨 얘기를 했길래 그래? 영국 가는 거라도 얘기했어?”
“네, 맞아죠. 아. 제이크! 말하는걸 깜빡했네요. 저는 영국에 갈거예요.”
“너무 좋네요!”
“이거야말로 연인끼리 서로를 최대한 잘 챙겨주는 방법이지 않겠어요? 로버트가 저를 보내줄 거예요. 제가 영국에 사는 친구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제게 이백 파운드나 줬죠. 너무 좋은 소식 아닌가요? 아직 제 친구들은 몰라요.”
그녀는 로버트를 향해 뒤를 돌아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로버트는 더이상 웃고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백 파운드를 줄 예정이었어요. 그렇지 않나요, 로버트? 그런데 저와 대화를 나누고 백 파운드를 더 주기로 했죠. 정말 마음이 넓은 사람이지 않나요?”
나는 사람들이 로버트 콘이라는 인간에게 어떻게 하면 저리도 심한 말들을 할 수 있을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모욕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인간들이 분명 존재하는 법이다. 그들은 마치 당신이 모욕적인 말을 꺼내는 순간, 눈 앞에 세상이 일순간에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을 안겨준다. 그런데 여기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인 로버트가 온갖 수모를 꾸역꾸역 참아내고 있다. 이 엄청난 광경이 내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막아야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마저도 직후에 프란시스가 뱉은 말들을 생각하면 약소한 농담에 불과했다.
“프란시스, 왜 그런 말들을 늘어놓는거야?” 로버트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이 사람 말하는 것 좀 봐요. 저는 영국에 갈거예요. 그리고 친구들을 보겠죠. 당신을 보기 싫어하는 친구들을 방문한 적 있으세요? 오, 걱정할 거 없어요. 아무리 꼴보기 싫어도 제가 보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 지냈어, 자기? 너무 오랜만이다. 어머니는 잘 지내셔?’라면서 반겨줄거예요. 아, 제 어머니요? 프랑스 전쟁 채권에 전재산을 집어넣었어요. 정말이에요. 아마 그런 선택을 한 사람은 세상에서 어머니 하나뿐이었을거예요. 그 다음에는 뻔하죠. '로버트는 어때?'라고 묻거나 조심스럽게 말을 꺼낼거예요. '프란시스 앞에선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편이 좋을거야. 불쌍한 프란시스. 그런 사람을 만나다니, 복도 없지.'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로버트? 제이크는 어떻게 생각해요?"
프란시스를 그녀 특유의 끔찍히도 밝은 미소를 짓고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마 지금 이 순간 나라는 청중이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매우 큰 만족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제가 영국에 가있으면 뭘 하실 예정이죠, 로버트? 맞아요, 이건 다 제 잘못이에요. 순 제 잘못이죠. 잡지사 여자를 그렇게 모질게 내칠 때 언젠가 저한테도 똑같이 할 거라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제이크는 이 이야기를 모르죠, 아마? 말해줘도 괜찮을까요?"
"무슨... 닥쳐, 프란시스."
“알았어요, 그러면 다 말해드리죠. 로버트가 잡지사에서 일할 당시에 그를 졸졸 따라다니던 여비서가 한 명 있었어요. 세상에, 같은 여자인데도 어찌나 귀엽던지. 로버트도 그녀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나봐요. 그 다음에 제가 나타났고, 로버트는 저도 매력적으로 느꼈어요. 저는 로버트에게 여비서를 떼어내버리라고 했죠. 그랬더니 로버트는 카르멜 시에서 그녀를 차에 태우고 프로빈스타운에 내려주고 그냥 바로 온 거 있죠? 그녀에게 다시 돌아올 차비도 주지 않고요. 전부 저를 기쁘게 해주려고 한 일이었어요. 저를 그만큼 괜찮게 봤던거죠. 안 그래요, 로버트?
"제이크, 오해하진 마세요. 로버트랑 그 비서의 관계는 완전한 플라토닉 사랑이었어요. 그마저도 아니었죠. 정말 아무 관계도 아니었어요. 단지 그녀가 너무 매력적이었을 뿐이죠. 그런데도 저를 기쁘게 해줄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인거예요," 그녀는 혀를 찼다. "'칼로 이뤄낸 자, 칼로 무너지리라'라고 했었나요, 지금이 딱 그런 꼴이죠. 그런데 그건 문학 속 이야기 아닌가요? 로버트, 다음 책에 이 내용을 넣으면 좋겠네요.
"있죠, 로버트는 새로 나올 책에 쓸 소재를 구하고 있거든요. 맞죠, 로버트? 그래서 저를 떠나려는 거예요. 저로는 구상이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에요. 저희가 동거하는 동안 로버트는 언제나 바빴어요, 책을 쓰면서요. 그래서 저희 관계에서 기억나는게 하나도 없대요. 그래서 이제 다른 데로 가서 새로운 소재를 조금 찾아온대요. 글쎄요, 그에게 굉장히 흥미로운 일들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들어봐요, 로버트, 자기. 제가 뭐 하나 말해줄게요. 괜찮겠죠? 당신을 따르는 그 젊은 아가씨들이랑 일을 벌이지 않았으면 해요. 부탁이에요. 왜냐면 당신은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울어버리잖아요. 게다가 스스로를 너무 불쌍하게 여기는 경향 때문에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듣지도 못하잖아요. 그런 식이면 어떤 대화도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조금 더 침착해보려고 노력해보세요. 물론 어렵겠죠. 그래도 이 모든 건 문학을 위해서인걸요. 문학을 위해서라면 우리 모두 희생을 해야하지 않겠어요? 절 봐요. 저는 아무런 반항 없이 당신의 문학을 위해 영국으로 가잖아요. 저희 모두 떠오르는 젊은 작가들을 위해 힘써야죠. 그렇지 않나요, 제이크? 근데 있죠, 로버트. 당신은 더이상 젊은 작가가 아니지 않나요? 서른 넷이잖아요. 그래도 위대한 작가에겐 꽤 젊은 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토마스 하디를 봐요. 아나톨 프랑스는 어떻구요. 물론 얼마 전에 돌아가시긴 했지만요. 로버트는 그 사람이 작가로서 완전 엉망이라고 했대요. 로버트의 프랑스 친구들 몇 명이 말해줬죠. 로버트도 불어는 아직 잘 못하는데 좋은 작가, 안좋은 작가 정도는 가려볼 수 있는 모양이에요. 로버트, 확실히 그 사람이 당신처럼 굉장한 작가는 아니었죠? 그 사람도 소재를 찾아서 어딘가로 떠나야만 했을까요? 그 분은 자기를 따라다니는 여자들한테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말했을까요? 그 사람도 그런 순간이 오면 눈물을 짰을까요? 아, 그러고 보니 뭐 하나가 떠올랐어요.” 프란시스는 장갑낀 손을 그녀의 입술 쪽으로 가져갔다. “제이크, 로버트가 저랑 결혼을 안해주는 진짜 이유를 알았어요. 이제서야 깨닫게 되다니. 아까 셀렉트 카페에 앉아있을 때 하늘에서 어떤 힌트를 보내준 게 분명해요. 신기하죠? 언젠가 루르드 시 처럼 사람들이 이 이야기가 적힌 간판을 세워둘지도 몰라요. 듣고 싶어요, 로버트? 말해줄게요. 별건 아니에요. 난 왜 이제껏 이런 생각을 안했는지 몰라. 있죠, 로버트는 언제나 바람을 피울 상대를 원했던 거예요. 그렇다면 저랑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가 뭐겠어요, 그러면 더 이상 바람을 피우지 못하기 때문이죠. 어떤 식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여기서 로버트가 저한테 언제나 약속한대로 저랑 결혼을 했다가는 그 뒤로 로버트의 인생에 스릴있는 사랑은 더이상 없는거예요. 여기까지 알아내다니 이번엔 꽤 똑똑했다고 생각이 들지 않아요?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로버트를 옆에서 잘 지켜보세요, 제 말이 틀린가. 제이크, 어디 가세요?"
“안에 들어가서 하비 스톤이랑 잠시 얘기 좀 나눠야겠어요."
로버트는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나를 넋놓고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로버트 왜 가만히 앉아있었을까? 왜 그렇게 그녀의 말을 전부 순순히 듣고만 있었을까?
바에 걸터 서서 유리창을 통해 그들을 볼 수 있었다. 프란시스는 여전히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고 "그렇지 않나요, 로버트?”라고 할 때마다 로버트의 얼굴을 한 번씩 봤다. 어쩌면 방금건 다른 대사였을 수도 있다. 나는 바텐더에게 아무것도 마시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옆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 앉아있는 둘을 봤다. 프란시스는 여전히 로버트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인도로 걸음을 옮겨 라스페일 거리를 향해 걸었다. 택시가 내 옆으로 왔고, 난 기사에게 내 집 주소를 불러주었다.
*원문 출처: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The Sun Also Rises'를 번역했습니다. 이 작품은 올해, 2022년 1월 1일에 들어서 자유 이용 저작물로 등록되었으며 책을 볼 수 있는 링크는 여기에 남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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