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28. 13:15ㆍ기록/그냥
(그림 출처)
그게 얼마전이었는지 정말로, 진심으로 가물가물한데 - 15년전이었는지, 4년전이었는지 영 헷갈린다 - 우리 집에 조그마한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온 날이 있었다. 늘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하던 나는 그 검은 고양이를 너무도 반갑게 여겼다. 고양이와 놀기도 하고, 가끔씩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 내 모습이 너무도 좋았다. 우리 둘은 마치 서로를 위해 태어난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 이상한 일이 두 가지나 벌어졌다! 술을 마시거나 창피해할만한 일들을 치르고 난 뒤에도 술에 취하거나 죄책감을 느끼기는 커녕 아무런 증상을 느끼지 못했다. 두 번째로 신기했던 일은 이놈의 고양이의 몸집이, 대체 어느 틈에 집구석을 나가서 뭘 줏어먹고 돌아오는지 몰라도, 매일같이 정말 몰라볼 정도로 커져가는 것이었다. 듣도보도 못한 신기한 일이, 그것도 두 가지 씩이나 동시에 벌어졌다는 게 너무도 의아해서 어안이 벙벙했다.
처음엔 살집이 제법 붙은 고양이의 모습이 포동포동, 귀엽기도 하고 보드라운 검은색 털이랑 함께 만져주면 고양이도 그릉그릉, 나도 드릉드릉,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계속 커지던 고양이의 몸은 나중이 되어서 어느새 나만큼, 아니 내 키보다 훨씬 더 커져있었다. 그 후로부터 8평뿐인 우리집 옥탑방에서 나는 화장실을 가거나 요리를 하려고 집안을 돌아다닐 때마다 고양이와 부딪히지 않기 위해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움직여야만 했다. 제일 최악이었던 점은 고양이가 살이 찌면서 혀에도 살이 붙었는지 어느샌가부터 나와 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 답답했지만 나만 그런 감정을 느낀 건 아닌 모양이었다. 고양이는 어느새 소통없이 비좁은 집에 갇혀있기가 너무도 힘들었는지 내가 바깥에 나갈 때에도 나를 따라다녔고 매번 내 등 뒤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고양이는 그마저도 재미가 없었는지 길을 걷다가도 내 머리를 치거나 커다란 발톱으로 내 등 뒤를 괜히 한 번 찔러보는 일도 이따금씩 생겼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있었던 일이었는데 그 횟수는 날이 갈수록 점점 늘더니 지난주에 들어서는 시종일관 내 관자놀이에 제일 날카로운 발톱을 꾹 누른 채로 함께 다녔다. 마치 자신이 가자는 방향대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바로 내 머릿속에 발톱을 쑤셔박겠다는 무언의 경고같았다. 고양이의 몸집은 우리 집의 크기보다 더는 커지지 않았고 고양이의 발달이 멈춘 시점과 동시에 나는 다시 술을 마시면 마시는대로 취해서 추운 겨울밤 창문을 열어두고 기절하기 일쑤였고, 담배를 태우면 등쪽에 심각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으며, 아무것도 안해도 가슴이 답답해 트름도 자주 하고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리는 날이 허다했다.
얼마 전에도 역시 가만히 냅두면 가끔씩 우리 학교 도서관만큼이나 몸집이 커지며 걸을 땐 내 관자놀이에 발톱을 올려놓는 고양이와 함께 밖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 날은 어쩐지 용산구 쪽을 걷고 있던 것 같은데 정확한 주소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의 폐, 장, 등, 어깨, 왼쪽 종아리, 전부 통증에 시달렸지만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면 무서운 고양이의 그 좆같은 손톱에 힘이 들어갈 수도 있겠단 생각에 나는 쉬지 않고 걸어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방을 헤매며 우왕좌왕 눈알을 돌리고 있었을 때, 정말 우연하게도 바닥에 놓인 하얀색 종이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어떻게 된 건지 질감은 내가 알던 종이의 그것 그대로였지만, 내 손에 집힌 채로 바람따라 여유롭게 나풀거리던 종이는 비현실적이게도 나와 가까워질수록 밝은 빛을 뿜어냈다. 그 빛의 밝기 정도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여서 눈을 감고 시선을 피해 고개를 뒤로 돌려봐도 온통 내 앞엔 하얀색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바람도(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이 바람의 출처는 종이였다) 점점 강해져서 양쪽 허벅지에 힘을 꽉주고 하늘에 날려가버리지 않기 위해 온갖 힘을 쏟았다. 한참동안을 그렇게 빛바람과 함께 사투를 벌이고 나니 차츰 그 강도가 줄어들었고, 그제서야 천천히 눈을 뜰 수 있었다. 방금까지 세상이 번쩍거리던 터라 모든 사물이 두세 개로,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보이면서 머리가 핑핑 돌았다. 조금씩 초점이 맞춰진 내 동공에 쪽지 위 글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나도 너야.”
쪽지 내용을 소리내서 읽고 나니 주변에 어수선한 기운도 잦아들었는데, 그 때문인지 어딘가 허전한 기분도 들었다. 그제서야 죽일 놈의 고양이가 떠오른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지만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2022년 4월의 어느 날에 겪은 이 기이한 일을 두고 나는 아직도 넋이 나가있지만 이 와중에도 이 날의 일들을 어떻게든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몇 자 정리해보았다.
아, 그 이후로도 검은 고양이는 모습을 비치지 않고 있으며 내 협심증은 한결 나아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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