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31. 16:04ㆍ번역/비문학
행복을 쟁취하는 방법
글쓴이ㆍ버트랜드 러셀
번역ㆍ오성진
제17 장: 행복한 사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의 일부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처럼, 외부 환경에, 또 나머지 일부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 이 책은 바로 후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책을 통해 독자들이 환경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만들 수 있는 행복을 위한 조리법은 사실 굉장히 간단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 여기엔 앞서 언급했던 크러치 씨(Mr. Krutch)를 뺄 수 없겠는데 - 행복이란 종교적인 유형의 규칙이나 신조가 없이 만들어내기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불행의 뿌리에는 굉장히 복잡하고 지적인 이유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그런 사람들이 늘어놓는 요소들이 행복, 또는 불행의 이유가 되어줄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 요소들은 고작 해봐야 정작 중요한 문제들을 겉도는 증상들일 뿐이다. 불행한 사람은 거의 빠짐 없이 불행한 신조를 체득할 것이며, 행복한 사람은 반대로 행복한 생활이나 규칙들을 체득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각자 자신의 행복이나 불행은 자신이 받아들인 신조에 잇따른 결과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시각은 인과관계를 뒤집어서 바라보고 있다.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빠지면 안 되는 것들이 분명히 있지만 이 또한 모두 간단한 것들이다, ‘음식과 집’, ‘건강’, ‘사랑’, ‘성공적인 일’,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받는 존중’ 같이 말이다. 어떤 이들에겐 ‘부모로서의 삶’ 또한 굉장히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 행복감을 누릴 수 있겠지만 만약 이런 것들을 누릴 수 있거나 적절한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도 불행한 사람은 심리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는 판단이 들며, 문제가 심각할 시에는 심리 상담가를 만나야 할 필요도 있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경우, 정신적인 문제 또한 적절하게 방향을 설정하고 노력한다면 언제나 자기 스스로 고칠 수 있다. 외부 환경이 극성으로 불행하지 않다면 누구든지 - 그의 관심사와 열정이 내부가 아니라 외부로 향해있다면 - 행복감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적응하려는 노력과 교육에 있어서 우리의 목표는 간단하다. 바로 자아에 너무 치중한 열정들을 기피하는 동시에 애정이나 관심을 쏟을 수 있을만한 외부적 요소들을 인생에 초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감옥 같은 환경에서 행복해할 수 없는데, 우리의 자아 안에 우리 스스로 가두어버리는 유형의 열정은 지상 최악의 감옥 중 하나이다. 이런 식으로 위험한 열정 중 가장 흔한 개념으로는 두려움, 질투심, 죄책감, 자기 연민, 그리고 자기 우월감, 등등이 있다. 이런 욕망들은 우리의 자아를 중심으로 두고 있으며 바깥 세상을 향한 진정한 관심은 부족한 반면, 오히려 우리의 에고가 더 커지는 길이 막히게 될까봐 걱정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있다. 두려움이야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며, 거짓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에 갇혀살게끔 만드는 가장 강력한 원인이다. 하지만 이 가상 세계를 찢어서 열어줄 만한 송곳들은 언제나 무서우리만치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따뜻하고 안전하기 만한 허구의 세계에 이미 적응해버린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스스로의 정신을 두껍게 만들어온 사람들보다 이 송곳에 더 많은 해를 입는다. 더 나아가서, 스스로를 속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가 존재함을 인지하고 있고 가상의 세계를 깨부숴줄만한 깨달음이 오는 순간을 언제나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다.
자아에만 집중된 열정이 우리에게 입힐 수 있는 가장 큰 피해 중 하나로는 바로 우리 인생의 다양성을 앗아간다는 점이 있다.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사람은, 이건 정말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데, 난잡하다는 얘기를 들을 일은 없는 반면에 결과적으로 그가 매일같이 열정을 쏟는 대상이 정말 매일같이 똑같다는 생각에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만한 지루함에 빠지게 되어버릴 것이다. 또 다른 유형으로는 죄책감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위와는 다른 종류의 자애(自愛)를 하고 있다.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그가 제일 중요시 여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 매사에 도덕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이건 전통적인 종교에서 비롯된 극악의 폐해 중 한 종류인데,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과적으로 한 사람에게 자기 자신에게 너무 몰두한 나머지, 더 이상 바깥 세상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고로 행복한 사람이란 바로 객관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며; 사랑하는데 자유롭고 관심사의 폭을 넓게 가진 사람이고; 그의 행복을 관심사와 사랑하는 대상들을 통해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인 동시에 결과적으로 다른 많은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이다.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행복한 삶의 시작이 되어줄 수 있지만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기회가 주어질 리가 없다. 사랑을 받는 자는, 넓게 이야기 하자면, 사랑을 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계산을 통해 - 마치 돈을 빌려주는 것 처럼 - 사랑을 주려는 행위는 무의미하며 그의 계산된 사랑을 받게 된 사람 또한 이를 무의미하게 여기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에게 극도로 몰두해버린 바람에 불행하다고 느끼게 된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원인만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중심적으로 변하게 되며, 그 결과로 자신을 가두고 있는 악순환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그가 정말로 악순환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면 잠깐이나마 현실의 문제에서 도피하게끔 도와줄 자극제가 아니라 정말 진심을 다할 수 있을만한 관심사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관심사를 찾기까지 꽤 많은 어려운 상황들을 겪어야만 하겠지만, 자신의 문제에 올바른 진단을 내릴 줄만 안다면 분명히 조금씩이나마 자신의 문제가 지닌 무게를 조금씩 덜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자신의 문제가 (의식과 무의식을 떠나) 죄책감 때문에 생겨났다면,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의 의식에게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을 설득시켜야 하며 앞의 장들에서 다루었던 방법들을 이용해 의식에 심어둔 생각들이 무의식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약 그가 성공적으로 죄책감에서 벗어났다면, 그도 모르게 그의 마음 속에서 자라고 있던 그의 진정한 관심사들이 자발적으로 솟아날 것이다.
만약 그가 겪는 고초가 자기연민(self-pity)이라면, 그는 위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의식에게 주변 환경에 극적으로 불행한 요소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어야 할테고, 두려움이 문제인 사람은 자신에게 용기를 쥐어다줄 만한 활동들을 실행하면 될 것이다. 전쟁에서의 용기는 지금껏 매우 중요한 미덕으로 여겨져왔으며 어린 소년들과 청년들에게 키워주어야 하는 가치관으로 자리잡아 왔다. 하지만 도덕적인 용기, 지적인 용기는 분명히 터득할 수 있는 방법과 그들 각자의 연구된 바가 잘 없다. 매일 스스로에게 뼈아픈 사실 한 가지를 인정하는 방법을 길들여 보아라, 보이 스카웃에서 하는 ‘1일 1선행 운동'처럼 효과가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보다 미덕이나 지적인 면에서 더 월등하지 않더라도 삶은 여전히 꽤 살만하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가르쳐주어라. 수년 간 걸쳐 이러한 훈련을 해내다보면 당신은 떨리지 않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훗날 많은 영역에서 마주하게 될 두려움을 예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기 몰두(self-absorption)'라는 질병을 극복하고 난 뒤에 당신의 마음 속에 어떤 관심사가 떠오를 지는 당신의 천성과 외부 환경에 따라 자연스럽게 결정될 것이다. 그러니 미리부터 자신에게 ‘난 우표를 모으는 취미를 길들인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거야' 따위의 말을 하며 당장 우표를 모으는 일에 착수하는 식의 실수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취미나 관심사를 이렇게 뽑기를 하듯이 찾다보면 행복해지는 것은 둘째치고 우표를 모으는 일에 영영 흥미를 못느끼게 될 수도 있다. 당신에게 진정으로 생기는 관심사들만이 당신의 삶에 쓸모있는 형태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며 진정한 관심사는 당신이 스스로에게 갇혀 살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는 순간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행복한 삶이란 넓게 보면 좋은 삶과 동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학문의 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윤리학자들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법'들을 너무도 많이 중요하게 여기면서 실제론 그닥 필요하다고 보이지 않는 영역들도 너무 많이 함께 강조되어 오곤 했다.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부정한다는 것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몰두하게 만들며 그의 삶에서 무엇을 희생했는지 매번 선명하게 상기하게끔 만들며, 그로 하여금 삶에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 묻혀버리고, 애초에 목표했던 바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자기부정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이루고 싶어하는 삶은 결코 자기부정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또 자발적으로 길들인 - 바깥세상으로 향해 있는 - 관심사를 통해 이룰 수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쾌락주의자의 목소리를 자주 차용하곤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행복을 마냥 좋기 만한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글을 썼다는 것인데, 결론만 두고 보자면 도덕주의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같은 이야기를 한 것과 전반적으로 다름이 없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도덕주의자는 - 전세계의 윤리학자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 보통 생각의 틀 보다는 행동에만 초점을 두려는 경향이 있다. 특정 행동에 잇따르는 결과는 그 행동의 수행인, 그리고 그 사람이 행동을 하는 순간의 정신 상태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물에 빠진 아이를 보고 즉각적으로 도와주어야겠다는 직감과 함께 아이를 구했다면, 아이를 구해준 다음에도 당신은 도덕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만약 당신이 스스로에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미덕이며, 나는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기에 난 저 아이를 살려야만 한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아이를 도와준다면, 당신은 아이를 도와주기 전보다 더 못난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극적인 경우에 적용되는 원리는 보통 상당수의 - 그보다 뚜렷하지는 않은 - 일반적인 상황들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그리고 이건 티가 덜 날수도 있겠지만, 윤리주의자들이 권장하는 삶의 방식과 내가 이 책에서 이야기해온 방식에는 또다른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도덕주의자들은 사랑은 이기적이면 안 된다고 이야기해왔다. 사랑을 하는 입장에서 이기심이 너무 커지면 안 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주장이 일정 부분 맞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개인의 행복은 스스로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발현한다는 점에서 사랑을 할 때 무조건적으로 이기심을 배제하는 것은 옳지 못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남자가 상대방의 행복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청혼을 한 동시에 그녀가 그에게 남자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회를 던져줄 것이라고 착각한다면, 예시 속의 여인이 과연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지, 심히 의심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기원한다는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우리의 행복을 대신해가면서까지 그들의 행복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자기부정에 담겨있는 자신과 나머지 세상 사이에 멀게도 그려진 선은 우리의 관심을 자신에게서부터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대상들에게 돌림으로써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심사들을 통해 사람은 자신을 딱딱한 당구공처럼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면 부딪혔지, 절대 섞일 수는 없을 하나의 개체로 보는 대신에 마침내 모두와 함께 이 인생이라는 큰 냇물을 따라가고 있다고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모든 불행은 정신적 통합이 부족한 데서 나타나는 무질서에서 피어오른다. 이 무질서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교류가 부족한 상황, 그리고 비개인적 관심사들을 통해 자신의 자아와 사회가 엮일 수 있는 링크가 부족한 상황을 통해 생긴다.
행복한 사람은 이러한 연결성을 유지하는데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며, 인격이 사회와 분열되어있지 않으면서 세상의 대척점에 서있지도 않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를 세계의 일부라고 느끼는데 어려움이 없으며, 죽음을 향한 두려움 없이 세계가 제공해주는 장관이나 즐거움들을 여유로이 즐긴다, 그는 그의 뒤를 잇따라 세상에 등장할 후세들과도 연결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구 상의 인생'이라는 큰 흐름과 함께한다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느낌으로써 비로소 사람은 최대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끝)
*옮긴이의 말:
버트랜드 러셀 선생님의 에세이를 번역하면서 나쁜일도 좋은일도 가는 길이 설레고 두려울 뿐, 결국엔 모두 허무하기 때문에 살면서 많은 좋은 일들을 앞두고 바라봐야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이 책을 번역하면서 기존에는 몰랐던 영역에 대한 양질의 정보를 많이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전 아직도 행복한 기분이라는 것이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떠올려보면 행복했던 순간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말이예요. 그래도 러셀 선생님의 'The Conquest of Happiness(행복을 쟁취하는 방법)'을 번역하는 순간들 만큼은 정말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원문 번역도, 퇴고도 아직까지는 모두 엉망인 실력이지만, 몇 문장이라도 좋은 마음으로 들고 가셨다면 그건 또 그거대로 많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문 출처: 자유 이용 저작물인 버트랜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The Conquest of Happiness'의 서문과 목차를 번역했습니다. 원문을 구할 수 있는 링크를 여기에 남기겠습니다.
'번역 > 비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059: 발터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2) (0) | 2021.11.03 |
---|---|
#058: 발터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1) (0) | 2021.10.30 |
#042: 버트랜드 러셀, "행복을 쟁취하는 방법: 9. 눈치" (7) (0) | 2021.08.27 |
#040: 버트랜드 러셀, "행복을 쟁취하는 방법: 15. 비개인적인 관심사" (6) (2) | 2021.08.20 |
#038: 버트랜드 러셀, "행복을 쟁취하는 방법: 12. 애정" (5) (0) | 2021.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