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발터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1)

2021. 10. 30. 16:43번역/비문학

The Author as Producer

생산자로서의 작가

 

글쓴이ㆍ발터 벤야민
번역ㆍ오성진

 

(표지 사진 출처 / 본문 사진 출처)

 

생산자로서의 작가

 

노동자들의 임무는 그들의 영적인 주체를 깨닫고 스스로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깨우침으로써 지식인층과의 투쟁에서 이겨내는 것이다.
                                                                                                                        - 라몬 페르난데즈(Ramon Fernandez)

 

 

Part 1

 

그의 저서 ‘국가론에서 플라톤이 시인들을 어떻게 다루겠다고 적었는지 다들 기억하고 있는가? 그는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시인들을 사회에 남겨둘 수 없다고 말했다. 시에 담긴 힘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던 그는 시라는 텍스트에서 넘쳐 흐르는 파괴적인 힘이 완전한 사회에 가할 위협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 그만큼 작가들의 존속에 관해 모두가 깊게 생각해 본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오늘날, 이 이야기가 다시 한 번 다뤄져야 할 시간이 돌아왔다. 확실히 작가들을 두고 플라톤처럼 강경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잘 없었지만 근래에 들어 과연 작가들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활동을 해도 되는 것인지, 즉 작가의 자주권(自主權)에 대해 야기되는 논의들을 모두 적어도 한두번 정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마 당신도 그다지 쉽게 작가들과 자주권을 연결짓지는 못할 것이다. 당신은 현재 사회의 흐름이 작가들로 하여금 누구를 위해 그들의 작품을 쓸 것인지, 그 대상이 변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유명한 이야기들을 써온 부르주아 계급의 작가들은 이러한 원리를 현실로써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당신은 그 사람에게 그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들, 이미 그는 특정 계급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실력 있는 작가라면 이 원리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으며 그는 계급 투쟁의 시점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편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렇게 그의 자주권은 끝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작가들을 두고 특정 “경향(tendency)"을 갖추고 있는 작가들이라고 말한다.

 

이 “경향"이란 것은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 사이에 언쟁을 불러일으켰던 키워드이다. 당신은 이미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이를 두고 벌어진 논의들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커져만 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매번 “한 편으로는 우리 모두 작가들에게 올바른 정치적 경향을 마땅히 지니게끔 요구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 모두 작가가 내놓는 결과물이 높은 수준의 질을 지니기를 바랄 권리도 있다”와 같은, “한편으로는 ~, 그렇지만 ~”하는 식인 문장들의 향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공식은 우리가 예술이 지닌 경향과 수준 사이에 있는 연결고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고 말끔하게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둘 사이 상관관계를 간단하게 정의 내려버릴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올바른 정치적 경향을 지닌 작품의 질을 논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올바른 정치적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다른 영역에서도 충분히 뛰어나야 한다]라고도 한 번에 뭉뚱그려 정리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후자의 논리는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논리가 심지어 옳으며 내가 글을 쓰면서 터득한 논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통해 글쓰기의 의의를 한 번에 싹둑, 제단해버리고 싶지는 않다. 이러한 주장이 옳다고 설득하는 방법은 올바른 논거들을 통해 증명하는 방법 뿐이다. 앞으로 내가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하는 말들에 집중해주길 바란다. 당신은 거부감을 표현할 수도 있지만 이는 상당히 특수한, 너무 동떨어진 개념이다. 내가 이 파시즘의 개념처럼 들리는 이 이야기를 정말 증명하려고 하는 것인지 궁금한가? 맞다, 그것이야말로 정확히 내가 이 글을 통해 해내려고 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난 당신에게 위에서 언급된 논쟁이나 토론에서 자주 뭉텅이처럼 요약된 채, 등장하는 경향의 개념은 사실 정치적인 글을 비평할 때 쓸만한 도구로 상당히 부적절한 이유를 설명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나는 한 작품이 지닌 정치적 경향이 반드시 그 작품이 문학적으로 옳을 때에만 정치적으로도 옳을 수 있다는 점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참된 올바른 경향 안에는 반드시 문학적 경향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잠시, 좀 더 명확하게 말을 전달하기 위해 잠시만 짚고 가자면, 여기서 내가 말하는 문학적 경향이란 보이는 식으로든 아니든 정치적 경향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 외의 그 어떤 것도 글의 수준을 결정짓지 못한다. 작품의 올바른 정치적 경향에는 문학적 경향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문학의 수준 또한 그 안에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기 전에 이 글을 읽으면서 내가 주장하는 바가 당신에게 점차적으로 쉽게 다가올 것이라는 점은 약속하겠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면 나는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 내가 관찰한 바가 담긴 이 글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난 작품의 정치적 경향과 작품의 수준 사이에 놓인 상관관계 따위의, 딱히 이렇다 할만한 결론이 없는 주제로 이 글을 시작했다. 내가 고를 수 있었던 방법 중 하나는 조금 더 오래 된, 그렇지만 이보다는 더 신뢰가 가는 주제를 고를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문학 작품에서, 특히나 정치 문학에서, 내용(content)과 형식(form)의 관계는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질문을 형성하는 방식은 지당하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받고 있다. 이런 식의 질문은 단순히 학계에서 변증법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문학적 상관 관계를 맞지도 않은 곳에 끼워맞추려고 하면서 생겨난다고들 생각하기 때문이다. 좋다, 그렇다면 같은 질문을 조금 더 변증법적으로 고쳐본다면 어떨까?

 

기술의 개념

 

위와 같은 질문을 변증법적으로 - 그러니까 질문의 가장 주체적인 요소를 찾아본다고 했을 때의 말이다 - 바꾼 후의 질문은 동떨어져 있으며 생명이 움직이지 않는 객체들(작품, 소설, 책)을 언급하며 시작할 시에 그 어떤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는 반드시 사회적 문맥에 위치한 채로 살아 숨쉬는 예시로부터 시작해야만 하는데, 이쯤 되어서 당신은 이런 식의 질문은 이미 우리 주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주고받았다고 답할 수 있다. 맞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참 많이도 해왔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들이 단순히 “일상에서 거론 되는 이야기거리"로 전락해버렸다. 사회적 관계들의 의미는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산 구조에서의 관계들로 인해 그 의미가 결정 지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예술 작품을 바라볼 때, 자본주의적 비평은 그 작품이 해당 시대의 생산 구조에서 사회적 관계라는 측면에서 작품이 과연 어디쯤에 위치했는지부터 답을 내리려고 해왔다.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하며 답을 내리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언제나 명확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렇기에 난 이 광범위한 질문에서 상식적으로 가장 가깝게 여겨지는 부분부터 건드려 볼 예정이다. 조금 더 차분하고, 조금 덜 부담스럽게 답을 구해낼 확률을 조금 더 높일 수 있도록 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질문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작품이 나온 시대의 생산 구조와 예술 작품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냐? 작품은 과연 시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가? 시대에 대항하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시대를 뒤엎으려고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혁명이라고 불러야 하나?’와 같은 질문들은 우선 피하려고 한다. 나는 ‘글로 쓰인 작품과 그 작품이 나온 시대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가?' 하고 물어보기 전에 ‘그 작품이 그 시대 안에서 어떤 곳에 위치하고 있는가?’라고 물어보고 싶다. 이 질문은 시대에서 이루어지는 생산 과정 속 문학적 관계들 안에 속한 작품의 기능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데 의의가 있다. 다시 말해, 이 질문은 작품의 문학적인 기술(literary technique)을 향해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질문을 활용하여 보다 직접적인 사회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해줄 통로를 열어젖히는 개념을 꺼낸 셈인 동시에 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의 해석으로도 한 단계 더 가깝게 접근한 셈이다. 그와 동시에 이 문학적 기술이라는 개념은 형식과 내용이 서로를 반대하는 힘이 적은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변증법적인 시작점을 형성할 수도 있다. 또한 이는 초반에 언급했던 ‘경향과 수준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 더 알맞게 정의내릴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제시해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만약 우리가 ‘작품이 지닌 올바른 정치적 경향에는 문학적 경향이 담겨있고, 그렇기에 문학적 수준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위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이제 우리는 이 문학적 경향이란 것이 어떻게 시대에 따라 변하는 문학적 기술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지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만약 내가 특별한 소개 없이도 더 무거운 문학적 문제들 이야기로 넘어가더라도 당신이 따라오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바로 이 러시아 작가 한 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말이다. 세르게이 트레차코프(Sergei Tretiakov)라는 작가는 ‘움직이는 작가(operative writer)’ 라는 모델을 정의하고 실제로 그 모델이 지향하는 작가의 생활을 실천해나갔다. 이 ‘움직이는 작가' 라는 개념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정치적 경향과 진보적인 문학적 기술 사이에 반드시 존재하게 되어있는 기능적 상호의존성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건 하나의 예시이며 다른 예시들은 나의 머릿속에 충분히 보관해두고 있다. 트레차코프는 ‘움직이는 작가'와 단순히 정보를 주는 사람의 차이를 강조한다. 그는 스스로 특정 정보를 전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투쟁을 하는 천직, 즉, 관찰자가 아닌 적극적으로 상황에 끼어드는 임무를 받들어 수행한다고 말했다. 트레차코프가 해온 활동을 통해 우리는 그가 마땅히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일이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농업의 완전한 공영화가 이루어지던 1928년 당시에 ‘작가들을 콜크호지(*the kolkhozy: 소비에트 연방의 집단 농장 형태)로!’라는 슬로건이 야기되었을 즈음, 트레차코프는 ‘공산주의 등대(Communist Lighthouse)’의 일원으로서 활동했다. 그곳에서 두 번의 장기 거주를 하는 동안 그는 1. 전체 회의를 주관하고, 2. 트랙터를 위한 기금을 주선하고, 3. 일꾼들의 책 읽는 시간을 따로 만들어주었으며, 4. 벽보를 만들고 콜크호지 신문을 편집하고, 5. 모스카우 지역 신문의 리포터로 발벗고 뛰며 6. 유명한 음악과 영화들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렇기에 콜크호지에서의 생활을 마친 트레차코프가 써낸 ‘농촌의 절대자(Master of fields)’라는 제목의 소설이 그 이후 농업의 집산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트레차코프라는 작가, 또는 그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와중에도 이 예시가 과연 내가 위에서 펼쳤던 논리를 설명하기에 적절한지 아직 확신이 잘 서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가 해낸 일들의 대부분이 문학과는 상관이 없으며 그의 업적은 기자나 선전가라면 마땅히 해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난 오히려 의도적으로 트레차코프의 예시를 들기로 결심했는데, 그 기저에는 이 예시를 통해 우리가 현재 대중에게 이미 알려진 기술들을 통해 나온 문학의 형식이나 장르를 대할 때의 관점의 폭을 넓혀주고 그를 통해 오늘날에는 문학적 힘이 과연 어떤 형식을 통해 표현되어야 할지 고민의 장을 열기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 비극이나 굉장한 서사시가 언제나 우리 곁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진 게 아닌 것 처럼 소설이란 장르 또한 태초부터 독자들 곁에 존재해온 것이 아니며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어준다는 보장도 없다. 비평문, 번역본, 그리고 흔히 복제품(forgeries)이라고 불리는 문서들도 언제나 문학의 일부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단순히 철학적 문학에서만 나타날 뿐만 아니라 아라비아와 중국의 시적 문학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 추세이다. 수사적인 글이나 표현들 같은 경우도 오늘날이 되어서야 가치가 많이 떨어졌을 뿐이며, 오히려 과거에 이뤄진 다양한 문학적 시도들은 시기마다 각각 진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아 이쯤이면 당신도 결국엔 각 시대를 대변하기 위해 문학이 엄청난 변화의 흐름 위에 매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과 문학은 그렇게 매번 특정 세력에 반대하는 힘을 보여왔으며 실제로 그들의 힘을 잃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인지했을 것이다. 그럼 현재 그런 세력에 반대하는 힘이 부족한 상황이 과연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지, 그 예시를 제시해보겠다. 이번 예시에서도 다시 한 번 트레차코프의 예시에서 보인 원리가 적용될 예정이다. 그 예시는 바로, 신문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문의 탄생

 

“우리 시대의 글쓰기에 있어서,”라고 한 좌익 작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일찍이 양측에서 각자 서로에게 반대하는 입장을 펼치며 서로를 성장시켜주던 때, 즉 행복했던 시간은, 어느새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과학과 순문학(belles lettres), 비평과 생산, 문화와 정치는 서로에게서 완전히 멀어지고 말았고, 그 자리엔 그 어떤 관계나 이치 같은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문학적 혼돈이 가장 잘 비춰질 수 있는 무대는 바로 신문이며 신문의 내용(content)인 ‘소재'는 오로지 참을성 없는 독자들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형식 외의 다른 형식들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 ‘참을성 없는 독자’층에는 유용한 정보를 바라는 정치가들과 유용한 정보가 떨어지기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는 관망자들 뿐만 아니라, 이들 뒤에서 쓸쓸히 자신과 같은 의견을 가진 기사를 찾는 사람들도 있다. 이토록 굉장히 긴 시간 동안 매일매일 새롭고 유익한 정보들을 갈망하는 대중들의 욕구는 주로 편집자들에 의해 착취되어 왔는데, 편집자들은 이를 이용해 독자들의 질문, 의견, 또는 현정부에 반대하는 내용을 골라다가 자유롭게 적어 매일 새로운 칼럼을 써내려가곤 했다.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비슷비슷한 정보들은 대중들 사이에 무차별적으로 비슷비슷하게 퍼졌으며, 이를 통해 독자들은 자연스레 공동창작자의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이 뒤엔 한 가지 변증법적 순간이 숨어있다: 바로 부르주아 신문사에서 몰락한 문학이 소련 민중 언론에서 문학의 부흥으로 이어졌다는 점인데, 이는 문학이란 애초에 그 깊이가 얕아질수록 그 넓이가 더 넓어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부르주아 언론사가 외형적으로나마 유지해오던 작가와 대중 사이의 장벽이 소련(민중)의 언론에 와서는 비로소 무너지게 된 것이다. 독자들은 언제나 작가, 즉 상황을 설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전문가로서 - 물론 그가 제대로 아는 분야에 한해서겠지만 - 독자는 작가로서의 첫 발을 언제든지 내밀 수 있는 것이다. 노동 그 자체를 통해서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글감들을 체득할 수 있다. 글을 쓰는 자격은 더이상 엘리트 학교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오히려 전문 학교에서의 기술적이고 상업적인 훈련으로도 충분히 터득할 수 있는 모두의 소유물이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서, 다른 식으로는 더이상 나란히 연결하지 못했던 삶의 관계들을 문자화를 통해 극복해낸 좋은 예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글쓰기 자격은 신문이라고 - 한없이 낮잡아 명명된 - 매체를 통해 세상에 고개를 내밀며 구원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고로 위의 인용문을 통해 ‘생산자로서의 작가’라는 개념은 언론이 존재하고 커져가는 한, 계속해서 그 크기를 키워갈 것이라는 점이 이해되었다면 좋겠다. 왜냐하면 언론은, 적어도 위의 예시에서의 러시아 언론은, 일찍이 말한 거센 변화 과정 중에 통상적으로 거론되는 장르들 사이의 분화, 작가와 시인 사이의 분화, 학자와 포퓰러라이저 사이의 분화 뿐만 아니라 작가와 독자 사이에 발생한 분화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돌이켜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언론은 이 과정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이며, 그렇기 때문에 ‘생산자로서의 작가’에 대한 고찰에 있어서 절대 빠질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서유럽의 신문들은 작가의 손에 쥐어주기에 적절한 생산적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각국 수도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언론이란 한 편으로 기술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글쓰기라는 영역에 있어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위치를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편에서 봤을 땐 이 위치라는 것이 바로 우리가 대항하는 사람들의 손 안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현재 작가는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사회적 위치, 그에게 기술적으로 허용된 것들, 그리고 그의 정치적 임무를 인지하기 까지, 상당한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지난 십 년간 독일의 눈부신 발전 중 하나로 많은 생산자들이 경제적인 상황에 연관해서, 또는 자신이 처한 경제적 상황을 고려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작품들을 당대의 생산 수단, 기술, 그리고 작품 자체로서의 기술들과 연관지어 혁명적으로 생각하는 일은 없었다. 문맥에서 알 수 있겠지만, 난 흔히들 ‘좌익 지식인층’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 글에서 난 한층 더 좁히고 들어가서 ‘좌익 부르주아 지식인들’에 한해서만 이야기하겠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독일에서 현재 운용되고 있는 일종의 페이스를 만들어 낸 정치적 글쓰기 운동들은 모두 이 좌익 지식인들에게서 비롯되었다. 이와 같은 운동의 두 가지 예시로는 ‘행동주의(Aktivismus)’와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가 있다. 나는 두 가지 예시를 통해 이러한 정치적 경향들이 겉으론 얼마나 혁명적으로 보일지라도, 작가가 태도면에서만 프롤레타리아와의 연대감을 경험할 뿐, 자신을 생산자라고 여기지 않는 한, 사실 오히려 그 역으로서의 기능을 범할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원문 출처: 자유 이용 저작물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The Author as Producer'을 번역했습니다. 원문을 구할 수 있는 링크를 여기에 남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