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26. 17:02ㆍ매일/번역
1) 오늘의 할 일: ‘The Great Gatsby: 제4 장' 잠정 포기 및 현재까지 한 채로 블로그에 올리기 및 Walter Benjamin 선생님의 ‘The Author as a Producer’ 번역 시작.
(이러나저러나 혹시 이상한 번역이더라도 개츠비 재밌게 읽고 계시던 분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벤야민 선생님 에세이부터 번역하고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2) [You recall how Plato treats the poets in his projected State.] -> [그의 저서 ‘국가론’에서 플라톤이 시인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다들 기억하고 있는가?] : 무조건 평서문이라고 해서 그대로 번역하지 말고 한국말로 옮길 때에는 (특히 옛날 문서를 옮길 때는 더더욱이) 이런 식으로 의문문으로 가끔씩 틀어주는 편이 더 나을 때도 있다.
3) 소설의 짧은 호흡에서 오래 머무르다가 에세이의 쭉쭉 긴 문단들을 보니까 기분이 묘하다.
4) 벤야민 선생님의 ‘The Author as Producer’ 번역본 예고편: [You recall how Plato treats the poets in his projected State. In the interest of the community, he does not allow them to live there. He had a high idea of the power of poetry. But he considered it destructive, superfluous – in a perfect community, needless to say. Since then, the question of the poet’s right to exist has not often been stated with the same insistence; but it is today. Certainly it has rarely been posed in this form. But you are all more or less familiar with it as the question of the poet’s autonomy: his freedom to write whatever he may please. You are not inclined to accord him this autonomy. You believe that the current social situation forces the poet to choose whom his activity will serve. The bourgeois writer of popular stories does not acknowledge this alternative. So you show him that even without admitting it, he works in the interests of a particular class. An advanced type of writer acknowledges this alternative. His decision is determined on the basis of the class struggle when he places himself on the side of the proletariat. But then his autonomy is done for. He directs his energies toward what is useful for the proletariat in the class struggle. We say that he espouses a tendency. [1]
그의 저서 ‘국가론’에서 플라톤이 예술가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다들 기억하고 있는가?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그는 그들을 사회에 남겨둘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예술이 지닌 힘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 완벽한 사회를 위해서라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 예술에서 넘쳐 흐르는 파괴적인 힘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이후로 그만큼 예술가들이 사회에 남아야 하는지에 관한 모두가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이야기가 다뤄져야 할 시기가 다시 돌아왔다. 확실히 플라톤의 방식처럼 말한 사람들은 잘 없었지만 근래 들어서 과연 예술가들은 그들이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예술을 해도 되는지, 즉 예술가의 자주권(自主權)에 대해 야기되는 논의들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당신은 예술가들에게 이러한 자주권이 있다고 쉽게 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현재 사회적 상황이 흘러가는대로 예술가들이 어떤 예술을 할지 결정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유명한 이야기들을 써내려간 부르주아 계급의 작가는 이러한 현상을 현실로써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당신은 그에게 그가 이 현상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그는 이미 그가 속한 계급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따질 것이다. 실력있는 작가는 이 현상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일원으로 여기며 이러한 계급간의 갈등을 다루겠다는 일념하에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갈등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애당초 한쪽의 편을 들어주기로 마음 먹은 그에게 자주권이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그런 예술가들을 두고 특정 “경향"을 갖추고 있는 예술가들이라고 말한다.]
오늘의 표현: unwind / shin / projected state (plato's) / plato는 어쩌다가 "플라톤"이 되었나 / insistence / autonomy / 자주권 / accord / 애당초 / espouse / tendency
BONUS
"플라토"가 왜 "플라톤"이 되었는지에 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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