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8: 예술가라는 단어의 무게

2021. 11. 19. 00:03매일/번역

 

1) 오늘의 할 일: ‘The Author as Producer (2)’ 퇴고 시작.

 

2) SAMPLE:

 


 

브레히트는 ‘기능적 변화(Umfunktionierung)’라는 개념을 만들었으며, 이는 생산 수단의 자율화를 주장하며 그들이 계급 투쟁에 유용하게 쓰이기만을 바랬던 진보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생산 형식들과 도구들의 변화를 주장했다. 그는 그들에게 사회를 사회주의의 방향으로 최대한 멀리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새로운 수단이 아니라면 그들이 새로이 내놓은 생산 수단을 쉽게 전달하지 말라고 한 것이었는데, 지식인층에게 이 정도로 과감한 요구를 한 건 브레히트가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글을 내놓는 이들의 출판은”, 위 시리즈의 작가는 서문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더 이상 특정 작품들이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 연관지어서만 생각되지 않고, 오히려 특정 기관이나 현상들을 이용(변화)하려는 의지가 생겼을 시기에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주장하는 바는 파시즘에서 주장하는 ‘영혼의 정화(spiritual renewal)’와 같이 거창한 개념이 아니라 바로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만한 ‘기술의 혁신(technical innovations)’이다. 이 기술 혁신에 관한 이야기는 다시 하도록 하겠다. 여기서 나는 우선 생산에 쓰이는 기구를 단순히 전달하는 것과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내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나는 ‘새로운 객관성(New Matter-of-factness)’이라는 개념에 관한 설명을 시작으로 생산적인 도구를 - 최대한 사회주의를 위한 형태로 바꾸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 단순히 전달한다는 행위 그 자체가 얼마나 비난받아 마땅한 일인지 설명하고 싶다, 설령 그들이 내놓는 도구가 “혁명적"이라고 보일지라도 말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독일은 이 말을 뒷받침 해줄만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 십 년 동안 독일의 부르주아 측이 지녀왔던 생산 수단과 출판도 상당히 많은 ‘혁신적’인 소재들을 다룰 수 있으며 그들의 존재나 그들을 정녕 다루고 있는 계급의 출처를 밝힐 필요도 없이 그들을 대중에게 전달될 수 있음을 증명해왔다. 이는 ‘핵(hack)’류의 작가들을 - 설령 그들이 혁명적인 ‘핵’류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이야기는 같다 - 통해 그들의 도구가 전달되는 한, 모두 사실이다. 여기서 ‘핵’이란 근본적으로 사회주의를 위해 생산 수단을 발전시켜 결과적으로 생산 수단을 지배 계층으로부터 떨어뜨리려는 일련의 노력을 가볍게 여기는 작가들을 두고 내가 부르는 명칭이다. 더 나아가, 나는 소위 ‘좌익 작가들’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평생을 나날이 펼쳐지는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흥미로울만한 요소들을 집어 대중에게 유희거리를 던져주는 것 외로는 그 어떤 사회적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본다. 여기까지 말을 했으니 이제 ‘새로운 객관성(New Matter-of-factness)’이라는 개념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 개념을 통해 여러 기록물(documentary)들이 근사해졌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질문을 던질 때가 됐다. “그래서 이 기술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유용하다고 할 수 있는가?”

 

새로운 객관성(New Matter-of-factness)

 

더 명확한 설명을 위해 나는 여기서 사진의 형식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보겠다. 이 영역에서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논리는 연장해서 글쓰기의 영역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두 매체 모두 그들의 눈부신 성장의 공을 출판 기술(라디오와 사진이 들어간 신문)에게 돌릴 수 있다. 다다이즘을 떠올려보자. 다다이즘의 혁명적인 힘은 바로 예술의 진정성을 다시금 실험대 위에 올려놓았다는 점에 있다. 다다이스트들은 티켓, 스풀(spool, 카메라에서, 필름을 되감는 틀), 담배꽁초, 등등 그림과 관련된 물건들을 모아 정물화(still life)로 만들어 액자 안에 넣었다. 그렇게 완성된 정물화를 대중들에게 공개할 때의 그들은 마치 ‘봐봐, 이 그림은 시간의 벽을 폭파시키고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조각들이 일반적인 그림들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이야기하고 있잖아, 책보다 그안에 한 페이지에 묻은 살인자의 지문이 더 중요한 것 처럼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런 혁신적인 태도의 다양한 면면들이 사진술을 포토몽타주(photomontage)의 영역으로 이끌어 주었다. 간단하게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의 작품들을 떠올려보자, 그는 이 기술을 통해 책 커버를 정치적 수단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사진이 걸어온 길을 더 멀리 들여다 보자. 뭐가 보이는가? 사진은 그 이후로 보다 더 정교하고, 보다 더 현대적으로 변해왔다. 그 결과로 사진은 이제 더이상 무너져가는 아파트 건물이나 쌓여있는 배설물을 찍어도 그 의미를 변화시키지 않고선 도저히 해석할 수가 없게 되었다. 댐이나 전선 공장을 두고 ‘세상은 아름답다(the world is beautiful)’는 말 외로는 할 말이 없다는 점은 당연히 말할 필요도 없다. ‘세상은 아름답다(The World is Beautiful)’는 앨버트 랭거 파츄(Albert Renger-Patsch)의 유명한 사진집의 제목인데,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객관성’을 적용한 사진술을 가장 잘 염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기술적 완성도를 통해 심지어 불행마저 멋스럽게 다룸으로써 불행이라는 개념을 관찰자에게 하나의 희열의 대상으로 다가오게끔 성공적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새로운 객관성'에 따르면 대중들에게 봄의 계절, 영화 배우들, 외국의 경관 같은 장면들을 과거였다면 불가능한 감상법으로 현시대 유행에 맞춰 편집한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이 사진의 경제적인 기능일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 사진이란 안에서부터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현재 그대로의 현상을 유행에 맞춰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새롭게 보여주는, 정치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의 표현: readily / coercion / palpable / censur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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