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4. 13:56ㆍ매일/번역
1) 오늘의 할 일: 뭘 뭐야, 어제 하던거 계속 하는거지.
2) 총작업시간:858HRS + 2.5HRS
3)
이곳저곳 (명사건 부사건 하나의 표현으로 자리잡으면 띄어쓰지 않음을 기본으로 삼는다.
4)
번역가의 말
어쩌면 거기에 계실지도 모르는 리스너들에게
과거. 수원시 율전동 신일 아파트. 초등학교 4학년 때 쯤이었나, 자전거에 앉아 아버지께서 사주신 아이리버 mp3를 통해 Smash Mouth의 All Star를 들었던 기억이 얼핏 난다. 본잡지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분명 내 “리스닝 역사”에서 가장 초반쯤에 자리잡은 기억이다. 코러스 부분이 나오는 순간을 기다리다가 내리막길을 위험할 정도로 달리던 기분이 어찌나 짜릿하던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항상 귀에 이어폰이 꽂혀있던 내 안에 자리잡고있는 몽글몽글한 그 무언가를 느낀건. (어쩌면 원래는 없던 게 생겨난걸지도?)
조금 앞으로 와서 중학교 시절. 아버지의 일을 위해 가족 전체가 짐을 싸고 미국의 캔자스주로 2년간 떠났다. 집과 학교 사이 등하교길을 매일 3,40분씩 걸어다니던 내 귀에는 여전히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하루는 노아라는 친구가 — 노아는 내 락커 바로 옆에 캐비넷을 쓰던 친구였다 — "넌 항상 이어폰을 끼고 다니던데 도대체 뭘 듣는거야?" 하고는 내 이어폰을 빼더니 자기 귀에 가져다댔다. 한두 찰나 정도 지났으려나, "내일 이 시간, 여기서 봐" 하고는 홱 가버리던 노아. 다음 날 같은 시간, 걱정 반 기대 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락커로 걸어갔다. 노아는 나를 슥 보더니 가슴 품에서 뭔가를 굉장히 은밀하게 꺼냈다. 기대보다는 걱정쪽으로 쏠리던 내 마음은 노아의 손에 들린 새까만 정사각형체를 보고 이내 곧 물음표로 가득찼다. 노아는 내게 "집가서 이걸 듣고 와," 하더니 또다시 시큰둥하게 수업을 들으러 갔다. 벙찐 내 손에 들려있던 건 AC/DC의 <Back in Black>이라는 앨범이었다. 집에 가서 느껴질 듯 말 듯,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앨범을 몇 차례 감상하고나니 내 안에 무언가는 이미 로큰롤의 그것으로 변해있었다. 그 날부터 머리카락도 빠르게 자랐고 청바지는 알아서 쫄아들었으며 싫은 감정이 들 때면 나를 화나게 만든게 무엇인지 생각할 줄도 알게 됐다. 적어도 느낌만큼은 분명히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위저, 브리더스, 라디오헤드, 너바나, 화이트 스트라입스, 블랙 키스, 브라이트 아이즈, 스노우 패트롤, 래몬스, 더 킬러스, 블링크 182, 롤링스톤즈, T.렉스, 비틀즈, 고릴라즈, 레드핫칠리페퍼스, 빌리 조엘,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더 스트록스, 더 후, 푸 파이터즈, 퀸, 더 도어스, … 그 날 이후로도 락커 앞에서 노아와의 은밀한 CD 거래는 매일같이 진행되었다. 거래라고 해봤자 내가 노아에게 주는거라곤 이번 건 베이스 라인이 좋았다는 둥, 아니면 이 밴드는 저번에 걔네보다 별로였다는 둥, 어영부영 뚫린 입으로 평가만 늘어놓으면 되었던 터라 내겐 너무도 좋았던 조건이었다. 노아도 내 평가 릴레이를 즐겼는지 점점 홱 돌아서는 빈도수가 줄었고, 어느새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당시의 그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 뒤로 어떻게 음악을 즐겨야할지, 왜 새로운 소리를 접해도 찡그리거나 놀라면서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는지, 또 그 안에 좋은 부분은 어떻게 골라들어야 하며, 그러다보면 결국엔 어떻게 그 곡의 전체를 좋아하게 되는지, 전부 그 때 그와 즐겨하던 작은 거래에서부터 배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서울. 평소대로 내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서 번역을 하던 어느 날, 지구옥 편집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내용의 잡지를 번역해줄 수 있겠냐고. 그렇게 받아든 텍스트는 정말 재미있었다.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리비나와 멋진 그림들을 그리는 에밀리아를 비롯해 업무 중 쉬는 시간에 짬을 내서 음악을 듣고 있던 가브리엘라, 그리고 미리 연락해둔 우버 운전자를 기다리던 짧은 와중에도 웃으면서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준 아데일까지. 지혜님께서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만난 멋진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담은 글은 당시의 장면들을 선명하게 그려냈기에 읽고 번역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무엇보다 인터뷰를 번역하는 흥미를 돋운 건 이곳 저곳 뚜벅뚜벅 두 발로 걸어다니며 사람들을 붙잡고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편집장님의 모습을 상상하는 재미였다. 잡지 구성중에 Music Spot이라고 이번 호에서 소개하는 유럽의 각 도시들에서 음악을 느끼기 좋은 장소를 소개하는 코너가 있다. 그 중 리옹편을 보면 지혜씨가 찍으신 어느 레코드 샵의 사진이 있는데, 조금만 가까이 보면 유리창에 비친 지혜님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휴대폰의 렌즈는 물론이고 편집장님의 시선 또한 어렴풋이 위로 향해있는데 그 모습을 보며 ‘어쩌면 이 분은 정말 이렇게 세상과 음악을 올려다보는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더욱더 그녀의 인터뷰에 담긴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번역에 필요한 과정과 마음 자세는 일반 독서의 그것과는 사뭇 달라서 어쩔땐 실제로 그 글 안의 세계를 보는 것과도 같은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나? 이 인터뷰집을 번역하며 지금껏 친구들과 힙합은 뭔지, 타일러인지 에이셉인지, 진정한 록이란 뭔지, 왜 블러가 오아시스보다 더 멋진 밴드인지, 백날천날 이야기해도 내리지 못했던 결론에 도달했다. 자기가 품고 있는 음악이 로큰롤이건, 힙합이건, 재즈나 트로트이건, 그건 아마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닐거라고. 그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든 우리 안에 음악을 품고 사는 것이라고. 멀리서 온 동양의 사람이 긴장된 표정으로 순수하게 음악이라는 주제로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을 때 유럽인들의 발목을 잡은 건 무엇이었을까? 골동품 가게 사장님이 마감시간을 한참 남겨두고 가게 문을 닫고 의자 두 개를 나란히 놓고선 오손도손 이야기를 하도록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여유로이 즐기는 그들만의 휴식시간에도 베를린의 들뜬 표정의 어느 화가의, 리옹의 느긋한 어느 노부부의, 파리의 무뚝뚝한 어느 부동산업자의 입을 열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사실 당신도 가슴속에서 그 무언가를 언뜻 느끼며 사는 부류의 인간이라면, 그런 당신에게 이번 <L!stener>의 창간호를 기분 좋게 권하고 싶다.
분명히 거기에 계시는 당신에게,
번역가 오성진 드림
…라고 “번역가의 말”이란 걸 처음 적어봤다. 좀 뿌듯했다.
5) 번역가의 말도 썼겠다, 제대로 피드백 수정은 조금이라도 해야겠기에 30분 추가 아자뵤.
6) 30분 더!
오늘의 표현: 이룩하다 / 언뜻 / strengthen, boost, build up, nourish, reinforce, toughen, pick up, increase, vitalize, esca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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